최근에 한 권의 책과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한 권의 책은 고대 그리스의 전쟁과 관련한 투키디데스의 책이고 영화는 각각 <콜드 마운틴>과 <시네마 천국>이다. 서로 다른 의미의 지향을 지닌 이 경험들이 이상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소산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 중심에 인간의 실존과 경험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침묵 가운데 생각해 본다. 어떤 목소리가 내게 말 걸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다. 재난과 재해 소식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인류의 삶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칼 세이건의 글이 떠오른다. 보이저 호가 태양계 외곽을 통과하면서 찍은 사진 속에서 작고 희미하게 빛나는 점인 지구를 두고 그는 어떤 인문학자보다 통절하게 인간의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26쪽)
천문학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학문이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 정도라고 한다. 지구의 역사는 46억 년 정도에 근접하고 인류의 존재는 불과 200-300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한다. 이를 하루에 빗대어 표현하면 자정이 되기 직전 11시 59분 57초 정도에 해당한다고 하니 절로 겸허히 고개를 숙여야 하리라.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간의 발자취가 남기고 있는 다양한 결과들을 목도하고 있다. 인간은 공존의 가치를 아직 진정으로 내면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산업화 이후 온실기체의 증가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온실 기체의 비율이 급격하게 치솟고 있으며 기후 체계가 요동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현재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들을 통해 인류세로 명명할 만치 자신의 생물학적 약점을 놀랍게 극복하고 지구상의 주도적 종이 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세이건이 이야기한 우주 앞에서의 겸손함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그리스 영역 내에서의 역학 관계가 전쟁의 언어로 드러나고 있으며 각국 사절들이나 지도자들이 연설의 형태로 이야기하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향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반향할 만한 것들이다. 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학설이나 종횡가의 유세, 그리고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드러나는 생생한 인물들의 모습처럼. 헤로도토스의 <역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나 줄리어스 시저의 <갈리아 전기>, <내전기>와 같은 저서들도 흥미로운 책들이다. 인간의 행적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의 행적은 그들의 생각과 가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평가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전에 아자 가트의 <문명과 전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인류의 전쟁이 피로 점철된 투쟁의 역사라고 보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핑커와 같은 사람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쟁의 치명적인 요소나 야만성은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감소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곰곰이 곱씹어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인류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기는 있는 것일까. 때로는 그런 믿음을 무너뜨리는 상황들을 목도하기도 하고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측면을 현실에서 보기도 한다. 토인비의 말처럼 개인적으로든 인류 전체로든 세상이 도전과 응전으로 이루어진 싸움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칼 세이건이 이야기한 것처럼 더 큰 지평 속에서 우리의 행위를 상대화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더 성찰해야 한다.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와각지쟁(蝸角之爭)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시야를 넓혀야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전쟁의 발발 이유나 경과 결과적인 영향 등을 자세하게 논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내전이면서 연방국가로서의 해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는 점과 노예문제나 사회적 산업구조에 기인한 전쟁이었다는 점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영화에 대한 이해에는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콜드 마운틴 지역에 사는 인만과 에이다가 주인공이다. 목회자의 딸인 에이다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왔고 인만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연인이나 약혼자의 관계로 진전되지 못한 채 서로에 대한 끌림에 기인하여 피상적인 듯이 보이는 대화를 통해 탐색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젊은이들은 남군에 입대 혹은 징집되어 군대로 떠나간다. 떠나기 전 이별의 안타까움이 좀 더 과감한 감정 표현을 하게 하고 그들은 입맞춤을 통해 일종의 연인관계로 전환되는 순간을 맞이하지만 전쟁의 지속과 그 여파로 인한 고통 속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면서도 그 순간의 기억과 상대에 대한 감정을 기반으로 삶을 지탱하는 닻으로 삼아 견딘다.
에이다의 아버지는 세상을 등지고 에이다는 현실적인 삶의 기능과 기술을 배운 적이 없어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아끼는 피아노와 가재도구들을 팔면서 혼자라는 고립감에 고통스러워한다. 물론 이웃의 호의 앞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 마음의 그 미묘한 움직임을 현실은 점점 무겁게 짓누르고 파괴하려 한다. 율리시즈의 귀환을 기다리는 페넬로페를 압박하는 구혼자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도 존재하기에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다.
부상당해 병원에 치료차 입원한 인만은 에이다의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호소가 담긴 편지를 받고 탈영을 을감행한다. 예나 지금이나 탈영병은 가혹한 군법의 적용을 받으며 특히 전시에는 즉결처분될 수도 있는 행위다. 추적대가 따라붙고 곳곳의 자경단도 이들을 위협한다.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기울었다는 점을 알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인만이 에이다에게 가는 과정과 에이다가 인만을 기다리며 살아내는 과정이 평행하게 제시된다. 인만은 탈영병 수색대에 체포되어 후송되다가 다시 탈영하고 어느 전쟁미망인의 집에서 북군 세 사람을 살해하기도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은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특히 가혹한 상처를 남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도 전투원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전리품으로 노예가 되거나 살해되는 것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우리나라 화냥년의 유래를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아동들이 러시아에 의해서 강제 이송되었다고 하는 보도를 접하면 아직도 우리는 여기에서 멀리 있지 않아 보인다.
민간 자경단의 두목과 그 패거리는 탈영병과 그 가족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반역자로 간주하여 잔인하게 죽이고 박해한다. 평상시에는 이웃으로 살아가던 시민들을 말이다. 전쟁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과 야만성을 풀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들의 도덕적인 측면들이 드러난다.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군대와 그 구성원들의 모습을 우리는 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알고 있다. 인만은 자경단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죽고 부상한 루비 아버지 일행을 찾아온 에이다를 만나 자신이 귀환했음을 알리고 사랑을 확인하고 실질적인 부부가 된다. 자경단원들의 습격과 함께 이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인만은 죽고 자경단원들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장면은 일종의 에필로그. 인만의 딸이 자라고 있고 루비의 아버지는 회복되었고 루비는 조지아라는 청년과 결혼하였고 가족의 몰살로 혼자가 된 이웃과 다 함께 대가족을 형성하면서 살고 있다.
인만이 에이다에게로 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를 향해 갖은 고난을 극복하며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와 자신의 왕좌가 있기 때문이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의 청혼과 압박을 견디면서 남편을 기다리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활로 쏘아 죽인다. 전쟁을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좋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념들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등등 화려한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한다. 평화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우리를 구원할 때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과자의 맛이 소환하는 그 기억들처럼. 하나의 빛, 하나의 소리, 하나의 감각, 한 사람의 이름이 우리가 기를 쓰고 도달하려는 고향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7월에 재개봉한 이 영화를 노원에 있는 극장에서 집사람과 함께 보았다. 영화에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살바토레의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소식이 두절되었고 끝내 사망자로 처리된다. 어린 살바토레는 토토라고 불리며 동네에 있는 영화관에서 우여곡절 끝에 영사기사인 알프레도와 친해진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애정을 갖고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도 전수한다. 둘의 관계는 영혼의 멘토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세대 간의 사랑이면서 부재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존재인 셈이다. 알프레도는 토토가 단순한 영사기사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며 더 큰 꿈을 위해 움직이라고 이야기한다. 인화성이 강한 옛 필름에 불이 붙어 쓰러진 알프레도를 토토가 끌어내어 목숨을 구하지만 시력을 잃게 된다. 시력을 잃었음에도 알프레도의 멘토로서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고 불이 난 영화관은 새로운 단장을 하게 되고 토토가 영사기사 역할을 하면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만 알프레도는 지속적으로 토토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전하도록 재촉한다.
우연히 새로 전학 온 엘레나에 반한 살바토레는 그녀를 필름에 담고 그녀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다가 엘레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통해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되지만 둘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로 인해 장애를 겪게 된다. 군대에 징집되어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엘레나와 만날 방법을 알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 채 고향 시칠리아를 떠나 로마로 간다. 알프레도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단호하게 그에게 말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도 자신을 만나려 하지도 말라고 이야기한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살바토레는 고향에 발을 디딘 적이 없지만 어머니가 전해준 알프레도의 죽음과 장례식을 계기로 지나간 자신의 기억들을 반추하게 된다. 첫사랑 엘레나를 잃은 후 그의 삶은 무언가 공허함이 있고 어머니의 말처럼 그녀를 대신하는 여자들은 안정된 관계가 아닌 일시적인 관계일 뿐이다. 고향에 돌아와 알프레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물건들을 보면서 지나간 과거의 기억과 엘레나의 상실에 대해서 눈물을 흘린다. 옛 극장이 폭파되어 주차장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긋남 속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엘레나를 떠올리며 로마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한 인간의 성장 과정과 첫사랑의 문제는 모든 예술의 단골 서사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떠오른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쓸쓸한 결말. 시골의 가난한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귀향하는 문제와 첫사랑과 엇갈려 서로 다른 궤도에서 살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들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도 자주 목도하곤 한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기억은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뿐이다. 그러니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자. 세상이 불타고 난 뒤에도 남아 있을 유일한 것은 사랑뿐이리니. 살아가는 일에도 사랑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