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기 문화의 시대적 흐름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지만 모름지기 인간은 걷고 뛰는 물리적 활동을 근거로 생존해 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근육의 움직임에 기반을 두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수렵 채집인의 식단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운동 부족과 비만을 산업화 이후의 사회적 재난으로 간주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농업을 근거로 하는 전통적인 사회 역시 동물의 힘과 도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걷기는 삶의 속도를 규정하는 기본 요소였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고 살았고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말이나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 수준에 인간의 걷기가 조합된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차와 자동차, 내외연기관을 이용한 선박, 그리고 항공기의 등장은 시간의 흐름과 사회적 변화의 속도를 근본적으로 전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은 작품들은 그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일주에 소요되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으며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가 흘러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경험과 문화적 변화에 대한 인식 역시 이와 함께 본질적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고 다시 이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광속으로 정보가 오가고 옛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물리적인 속도로 육체적인 근육의 소모 없이 인간이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이 축복받은 이 시대에 걷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걷기는 인간의 비만과 근육의 퇴화에 대한 처방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육체적 단련과 이에 수반되는 정신적 치유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걷기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려워졌다. 다만 근래에 걷기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지향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과 자연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과 삶에 대한 태도 돌아보기 등에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순례자(?)로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비중도 점점 커져서 심심찮게 한국어를 듣게 되고 순례길 완주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들을 담은 책들도 쏟아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내 주변에도 산티아고 길을 다녀와서 책까지 낸 경우를 몇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파울료 코엘료의 <순례자>와 같은 책의 소개나 그 작가의 사례 등이 오늘날과 같은 순례 열기의 계기가 된 점도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열기는 각 나라별로 다양한 자원을 활용한 트레킹 문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있었던 다양한 걷기 문화와 유산들이 있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체력장이 입시에 반영되던 때에 그래도 가장 자신이 있는 종목이 오래달리기였다. 속도나 힘을 요하는 종목에 비해 지구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 그래도 가장 자신이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걷기가 제일 쉬웠던 경험에 그 근거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시골에서 자란 내게는 기본적으로 걷는 것이 익숙하고 강원도 태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산을 넘어 다닌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한두 정거장의 경우는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도 그런 내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퇴직한 후에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사람과 함께 걷기와 관련된 몇 가지 시도를 한 바 있다. 제주도 올레길을 작년 3월에 걷기 시작해서 올해 3월에 완주를 했다. 그리고 작년 4월과 10월에 걸쳐 세 차례 방문을 거쳐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했다. 그리고 작년 5월에는 8일 동안 울릉도와 독도를 아울러 방문하고 성인봉을 포함해서 울릉도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밖에 다른 여행의 경우 걷기와 다른 활동이 섞여 있기에 걷기만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아무튼 그동안의 걷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걷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걷기의 속도에 맞춰 눈에 들어오는 세상은 자동차와 같은 현대적인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경우와는 천양지차가 있다.
앞으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희망컨대 일종의 버킷리스트 삼아 기회가 되는 대로 코리아 둘레길을 한 번쯤 완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국내든 국외든 걷기 속도에 맞춰 사람들의 삶과 연관된 인문지리적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학습과 이해가 동반되는 그런 지향을 갖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다.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이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통합하는 양상이 제각기 다를 것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최근 같은 학교에서 오래 같이 근무했던 선배교사인 지모 선생님과 만나는 자리에서 당신과 아주 막역한 사이인 이화규 선생님의 새로 나온 책을 선물로 받았다. 제목은 <걷는 이의 축복, 코리아 둘레길>인데 내가 알기로는 저자인 이화규 선생님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2023년 말에 <산티아고 카미노 블루>라는 책을 이미 출간한 이력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많이 공감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극도 받으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에 또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저자의 책을 읽게 된 셈이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성격의 산물이든 정리해서 생산적인 계기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도 절절하게 느끼는 바이다. 그런 점에서 이화규 선생님이 보여주는 퇴직 후의 전해 들은 궤적은 배울 바가 많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을 읽으면서 지난번 책의 성격과도 또 한층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숲에 깃든 다양한 나무와 꽃들과 인문적인 요소들이 걷기의 피로함과 먹고 자고 쉬는 육체적 흐름과 연계되어 생생하게 현장감을 살려 내고 있다. 그리고 코리아 둘레길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그 자신감이 경기도 둘레길과 DMZ 평화누리길의 여정을 적절하게 교차하여 편집한 구성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단순한 걷기에서 다른 차원으로 연계하여 발전적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행보를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으로 많은 시니어들이 저자의 행보와 같이 당당하고 진취적인 모습으로 각자의 관심과 장기를 기반으로 한 영역에서 풍요로운 결실들을 산출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스스로도 열심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노력하기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는 독서였다.
이화규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전에 읽었던 책 두 권이 떠오른다. 하나는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다. 존 프란시스는 삶 자체를 걷기를 통해 전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책은 그의 그런 삶의 궤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격변하는 기후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이미 1971년의 유조선 좌초 사건으로 인한 기름 유출 사고를 계기로 산업혁명 이후 발전된 모든 화석연료를 이용한 이동수단을 포기하고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미국 전역을 걸어서 이동하며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삶 자체가 하나의 상징적 언어가 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존 프란시스는 걷는 22년의 도보여행을 과정에서 그림을 그리고 오해로 공격을 받기도 하고 도보여행 과정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도 마친다. 그리고 유엔환경계획과 정부 기관에서도 자문을 하고 지구의 환경을 보전하고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자로서의 삶도 살게 된다. 걷기가 삶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린 그런 사람의 경우를 우리는 존 프란시스에서 보게 된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인 <걷기 예찬>은 걷기와 관련된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월든 호숫가를 산책하는 헨리 데이비 소로우의 목소리 역시 비슷한 감정을 반향하고 있고 산사에서 수행의 일환으로 걷는 스님들의 일상도 그러하다. 평생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벗어나지 않은 칸트는 시계처럼 정확하게 산책 시간을 지켰다고 한다.
걷기는 삶의 기능이고 정신적인 움직임을 촉발하는 경험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각 사람의 속도가 다른 사람의 속도와 비교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걷기가 그저 걷멍의 차원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 걷기가 무언가 생산적인 의미와 결합되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걷기는 필연적으로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게 마련이다. 길 위에서 생겨나는 온갖 상황들과 인연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