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인간에 대한 사유

- 테오 코부쉬, <그리스도교 철학 주체성의 발견>

by 차거운

1. 사적인 고백


솔직히 고백한다. 철학과 신학책을 읽으면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지다가 자주 졸린다. 선배 교사 한 분이 퇴직 전에 책들을 싹 정리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눈도 침침하고 책을 읽을 체력도 저하되어 읽기보다는 살기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즘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이 내게 남은 날들의 재고량 혹은 기대치와 저울질되면서 용돈으로 받은 신사임당 한 장 허물기 싫어하는 아이의 심정처럼 마음을 졸이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 스스로를 고문하듯 괴롭히는 이 독서라는 행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뜬구름 잡는 것처럼 몽롱해도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확연대오! 깨우칠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를 안고 오늘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대로 손에 잡고 들여다본다.

인문학적 기초와 교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논리적이지 못하고 아둔한 인간이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도 누가 어떤 내용의 책이냐고 물어온다면 설명해 낼 재간이 부족하다. 그저 막연히 아,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우물을 깊게 파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살지 못했다. 10만 시간의 법칙과 같이 문리가 트일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런 불도그 같은 근성이 내게는 부족한가 보다. 아무튼 이 실용의 시대에 여전히 문학과 역사와 철학, 사회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갖고 인문학도의 기질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이 분야의 독자이기를 포기하지 않고자 한다.

미사에 가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천국에도 노령인구가 많을 것 같고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심각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말이다. 물론 부활이 없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자식 없이 죽은 형제의 형수와 결혼한 사례에 대해 답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활의 삶에서 연령의 문제 남녀의 문제도 부질없는 차원이 되리라는 것은 안다. 다만 성당의 앞자리에는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보다 많고 젊은이보다 많다. 남자들보다 여자 교우들이 많다. 여든넷의 노모 역시 성당까지 걸어서 미사에 참석하러 가시는 길은 아득히 멀다. 평일미사에 참석하는 일도 이제 점점 힘에 부치시고 차로 모시고 가지 않으면 이제 머지않아 미사 참석도 힘드실 것 같다.

왜 이렇게 사족이 기냐 하면 종교적 믿음 즉 신앙 행위는 사실 논리적인 숙고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단이자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허리가 굽고 몸을 추스리기도 힘드셔서 성체분배자가 앉은자리로 다가가서 분배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사람의 일생이란 것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 것이며 때로는 덧없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코헬렛의 말씀처럼 마음속에서 울려 퍼진다. 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시구처럼 우리 각자를 위해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 듯하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분들의 기도와 믿음이 가장 간절하다. 신학은 저분들의 경륜 깊은 신앙감각 앞에서는 침묵해야 하리라. 나는 모든 신학자들을 존경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례를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신앙적 체험을 한 이후로 아퀴나스 성인은 자신의 모든 저서가 지푸라기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래된 초기의 가성직제도 운영의 오류나 성직자도 없던 시절의 엉성한 전례생활 속에서도 무엇이 그렇게 맹렬하게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기에 죽음조차 달콤한 그 무엇인 양 껴안고 입 맞출 수 있었을까. 그 마음속, 영혼 속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바로 그 점이다.



2. 책에 대한 간단한 이해


테오 코부쉬의 <그리스도교 철학 주체성의 발견 - 교부들의 내적 인간에 대한 사유>라는 긴 제목의 책을 지난 희망의 성지 순례 일정으로 명동에 갔을 때 구입했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철학적 학습을 제대로 한 적도 없고 읽은 책도 거의 없어서 철학적 신학적 배경이 필요한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다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좋게 기억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 나는 이해한다. 안셀무스인가 아우구스티누스였던가. 사실 인간의 지식이란 것은 출발점이 되는 자명한 원리들(공리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지 않은가 말이다.

서양의 문화적 기초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듣게 되는 말이다. 유대교적 유산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했고 그리스의 철학적 유산을 활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이해하고 정리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치열하게 신앙에 대해서 사유했으며 그것을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하나의 논점이라고 읽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 스토아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등등의 희랍철학과 교류하고 논쟁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은 자신의 독특한 체험과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갔는데 그중의 하나가 내적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확립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본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원죄, 자신의 영혼을 염려하는 것으로서의 철학 즉 신학이며 단순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아니라 실천적 행위로써의 믿음. 인간의 내면성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사물들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자기 초월과 관련된 것이 궁극적인 목표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한다. 이 이상의 언급은 내게 무리인 것 같으니 추후의 공부를 기약하기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럴 때 떠올릴 만하지 않은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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