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닫힌 방 속의 청춘들의 초상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理性)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萬物)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 민태원, <청춘 예찬>
예전의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되어 우리들 모두에게 친숙하면서도 진한 감동을 주었던 민태원의 '청춘 예찬'이란 글의 첫대목이다. 삶에서 가장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젊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찬란하게 빛나는 무가지보(無價之寶)가 아닐 수 없다. 이 젊음이 주는 열정과 패기를 바탕으로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희망을 간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위에서 보게 되는 청년들의 모습은 상당히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기형도의 시 <빈집>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쓸쓸한 시구처럼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청춘들이 처한 현실은 '닫힌 방'에 갇힌 것처럼 출구 없이 막막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금수저로 태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어려서부터 성적으로 판가름 나는 학창 시절을 거쳐 서열화된 대학과 특정한 학과에 지원이 집중되는 현실은 우리의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소위 좋은 일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부침이 있지만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청년의 좌절과 절망감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지표가 청년 자살률인데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가리키고 있다. 청년의 위기는 우리 사회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가 되고 있다. 기성세대와 정책 당국자는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교육과 취업 환경을 개선할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청년 의식주의 문제가 복지의 차원이 아닌 자활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수도권의 집값은 정권의 정책적 수단의 허점을 비집고 언제든 폭발력을 지니고 상승할 태세이고 평균적인 수준의 청년들이 성실하게 월급을 모아서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연애와 결혼을 생각하는 것도 현실적인 계산을 먼저 해 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부모의 지원 없이 사회에 발을 내딛고 자리를 잡아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부모의 지원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이 낙관적인 희망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프니까 청춘'이라든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기성세대의 덕담은 분노와 냉소를 받기 십상이다.
오늘 혜화동 대학로에서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다. 제목은 <즐거운 나의 집>. 이 제목은 꼭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그것처럼 반어적으로 곱씹게 된다. 취업 준비생인 한 청년의 상황을 중심으로 특별한 외적 서사의 전개 없이 연극은 흘러간다. 그는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사회와도 위화감을 느낀 채 고립되어 있으며 자살 시도를 수차례 시도한 인물이다. 휴대폰 요금, 수도 가스 요금, 건강보험료 등 각종 납부 고지서는 궁지에 몰린 그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으며 반복되는 취업 실패는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져 친구와 가족 등 친밀한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 맺음조차 힘들게 만든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기피한 채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이러한 극적 상황 설정은 복지 안전망으로부터 제외된 채 생활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최근의 반복적인 사례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연극은 그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 어떤 해결책이나 긍정적인 전망 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연극은 관객인 우리 각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말이다.
이 연극의 출연자 중의 한 명을 나는 잘 안다. 그 아이는 나의 조카다. 연기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쉽지 않은 길임을 알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판에서 버텨내면서 삶을 살아내기가 어렵고 밥벌이로서의 측면에서도 녹록지 않음을 알지만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나 역시 '심장이 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었으니 말이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갔다 오면서 흘러간 지난 10여 년 넘는 시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친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응원도 하고 오랜만에 연극도 볼 겸 하여 대학로에 갔던 것이다.
연극 중에 취업 면접을 진행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마음에 남는다.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고 이를 통해 당당히 취업의 문을 뚫고 다음 삶의 단계로 진입하는 친구들도 있겠으나 대부분 그저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삶의 이력을 만들어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아는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 그런 마음에서 예전에 내가 썼던 시 하나를 떠올리기도 했다.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고
면접장에서 신사 숙녀가 다정하게 묻는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데 공손하게
두 손 맞잡고 제 아비는 눈먼 리어 왕이시고
제 어미는 안티고네여서 가계가 조금 복잡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프로이트에게 속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아들러의 상담실을 찾는다 저는
고아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투명인간이 아닐까요?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친 사람은 나의 먼 친척이고
폐위된 왕의 아득한 후손이라고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아요
나의 거주지는 장미 한 송이가 자라는
작은 별 B612입니다
사랑만이 나를 심판할 것이니
슬픔이 만연한 세상의 폐허에서 무너지지 않으리
- 졸시, <자존감>
우리 집 아이들도 아직 취업 준비생들이다. 물려줄 재산도 없고 화려한 이력을 만들어 줄 능력도 내게는 없다. 부모로서 머물 공간과 밥 세끼 정도를 제공해 줄 정도로 살고 있다. 이 아이들과 함께 나도 희망한다. 영화 <다음 소희>에서처럼 사람이 비인간적인 시장경제의 단순한 소모품으로 대우받지 않을 수 있기를 말이다. 자신이 꿈꾸는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부모로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사로서. 또 어느새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시험지를 훔쳐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하는 시도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 입시를 위한 혹독한 예비과정처럼 되어 버렸다. 고교 평준화 이전의 상황처럼 초등학생은 중학교 입시로, 중학생은 고등학교 입시로, 고등학생은 대학 입시로 피폐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의 틀과 기능을 바꿔나가야 한다. 이 사회는 지금 엄청난 위기에 내적으로 직면해 있다. 정치인들, 기업가들, 종교인들, 타인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언론인들, 법을 다루는 모든 율사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군인들, 자식의 현실적인 성공을 위해 <스카이 캐슬>과 같은 드라마의 상황보다 더한 편법도 감행하는 학부모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투사해서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용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전직 현직 미래의 지도층들.
연극 한 편을 보면서 세상이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희망은 없는가. 아니다 희망은 있다.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그말리온 효과와도 같이 우리의 간절함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냈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려받은 채 상병의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모든 정치는 무가치하다. 세월호 사고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정치도 무의미하다.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바로 성서에 나오는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공자도 그랬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하라.'
우리 청년들에게 모두 말 그대로의 '즐거운 나의 집'이 허락되기를 희망한다. 우리 조카와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다음에는 좀 더 환한 내용의 연극에 출연한 조카의 얼굴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도 많이 바뀌어야 하고 시간도 더 흘러야 하리라.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믿고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