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레가리오 곤잘레스, <그리스도론>, 가톨릭출판사
최근에 읽은 올레가리오 곤잘레스의 책 <그리스도론>은 색인까지 총 1,148쪽이다. 제목을 보면 다들 구구한 생각들을 할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호불호를 판단하는 것이 전광석화와도 같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어떤 책을 대할 때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전에 다른 글에서 고백하였듯이 철학과 신학 관련 책을 읽으면 집중하기가 어렵고 잠이 자꾸 온다. 그래서 철학자나 신학자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라비안 나이트' 완역본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비롯한 러시아 소설들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후기의 가문소설 못지않게 사람의 기를 빨아들인다. 그래서 점점 책 읽기가 힘들어지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재미라는 관점에서만 책을 읽지는 않는다. 아무튼 돌도끼를 들고 '우까우까'하면서 뛰어다니던 인간이 차분하게 앉아 그것도 소리를 내어 낭독하지도, 몸을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흔들지도 않으면서 묵독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차원을 극복하면서 이루어낸 자기 극복의 산물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여 왜 사람은 책을 읽는가.
2주 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으면서 졸다가 깨면 다시 조금 보다가 영화를 봤다가 휴대전화를 들고 곁길로 샜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그럼 왜 이 책을 몸부림치면서 쓴 약 삼키듯 읽으려고 했느냐고 누가 묻기 전에 스스로 여러 번 묻고 또 물었다. 요즘 책을 읽고 그걸 자랑하는 것이 힙한 거라서? 아니다. 그럼 퇴직한 사람이 시간이 많아서 그 시간을 죽이려고? 물론 그것도 아니다. 우선 좀 있어 보이게 누군가의 말을 흉내 낸다면 '책이 거기 있으니까'다. (^^) 물론 원래부터 책장에 있던 것이 아니니 구입한 것일 테고 문제는 왜 이 책을 구입하고 읽어야 할 부채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는가에 있다고 본다. 흔히 하는 표현을 비틀면 이런 식의 문장이 가능할 것이다. '당신이 읽어 온 책의 목록을 이야기해 다오. 그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주겠다.' 내가 읽어 왔고 현재도 관심을 갖고 읽고 있으며 앞으로도 읽을 책은 어떤 것인가. 나의 책 읽는 행위를 추동하는 욕구는 무엇인가. 그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각자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나는 자주 인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한다. 환갑의 나이를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내가 안다는 것에 대해서 극히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앞으로 더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천문학적 지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상식에 의하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암흑물질의 질량과 비중이 우리가 눈에 보는 물질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듯 우리의 앎이란 것은 정말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단순한 지식의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실존적 측면에서는 더더욱 부족함 투성이다. 즉, 삶의 차원에서는 사전에 알고 있는 바를 바탕으로 임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부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삶은 앎이 아니라 실천 즉 행동 속에 자리하고 있다. 앎이란 이미 진행된 삶에 대한 후행적 성찰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면서 다시 자신의 행동(삶)을 재조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삶에는 다시 되돌아가기 버튼이 없다.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활자로 인쇄된 책의 글자들이 제시하는 내용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과 달리 완결적이고 체계적이고 구성적이지만 삶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혼돈 그 자체다. 그렇기에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일단 다르다.
나는 자주 인간의 불의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확정적이다. 진시황은 불멸을 원했다. 중국의 도가는 연단술과 호흡을 통해서 불멸을 얻기를 바랐다. 불가에서는 고통스러운 삶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했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주술적인 사고들은 초월적인 존재를 인간의 욕망에 맞춰 길들이고 그 힘과 타협하고 달래는 의식을 수행한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신앙은 이제 문화적 차원의 서사로 격하되었다. 북유럽의 신화도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브라함 종교 역시 근대의 비신화화나 인간중심적 비판 속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니체적인 자기 긍정을 최대치로 끌어내어 인간의 사회적 유토피아를 꿈꾸던 거대한 기획도 환멸 속에 좌초하고 말았다. 인종주의적 우월주의를 이념화한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적 전체주의도 끔찍한 비극을 인간의 기억에 선사하고 말았다. 윤리가 없는 경제의 비인간적 모습과 세계화의 결합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상품으로 상징되는 탐욕의 거품을 통해 그 추악함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과 약점에 대한 성찰 속에서 오래된 물음과 오래되어 낡은 것처럼 보이는 유산이 다시 발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가. 인간의 응답 여하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절망 속에 머물 것인가 희망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독서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고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 조건으로서의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 알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고 한 안셀무스와 같은 입장에 설 필요가 있다. 단 정직해야 한다. 그 정직함은 은총의 차원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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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국화가 피는 이유
오늘 밤 눈이 푹푹 내리는 이유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
빙판 위에서 연탄재를 생각 없이 걷어차지 말 이유
눈발이라면 진눈깨비보다 함박눈이 나은 이유
폭포가 곧은 정신이 되는 이유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남달리 흰 손이 슬픈 이유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이유
절정이 가까워질수록 뻐꾹채 꽃키가 소모되는 이유
내가 불경처럼 서러운 이유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유
유리를 닦으며 황홀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
자고 일어나 울며 헤매는 이유
사람은 무엇으로 죽는가
- 졸시, <때문에> 전문
나는 신학도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다만 믿음을 통해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평범한 신자일 뿐이다. 믿음은 만남에서 비롯된다.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유다교는 출애굽의 체험을 통해 탄생한 종교다. 계기적으로는 모세에게 말을 걸어오신 하느님의 행위에 그 단초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맥락 속에서 인간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체험된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만남에서 교회가 솟아났고 이어지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교를 통한 구원의 희망은 언제나 현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이 책에 담긴 많은 내용들은 사변적이거나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측면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고백하고 성서가 증언하고 전승들이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체험으로부터, 신앙적인 실천과 고백의 삶으로부터 조금씩 다듬어지고 명료화되고 체계화된 것들이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핵심적인 요소들은 보존되어야 하겠지만 그 구체적인 실천의 양상들 차원에서는 역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살아 있을 것이다. 믿는 자들이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살아 있으시며 구원의 능력이 있는 분이고 성령께서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소박하고 겸손하게 믿는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채워주시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