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시 할리크, <그리스도교의 오후>
요즘 많이 덥다. 그래도 여름꽃은 제가 피어야 할 때를 알고 핀다. 루쉰의 책 중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제목이 달린 것이 있지만 능소화가 피었다가 무더기로 져서 소복하게 쌓이고 무궁화도 그렇게 피었다가 지고 또 피면서 한철을 보내고 있다. 목백일홍도 뜨거운 여름에 오래 피어서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모든 생명은 마치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는 듯이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때가 되면 다시 꽃이 발치에 떨어지듯 그렇게 떠나간다. 이 흐름을 바라보는 유정한 인간의 눈에는 온갖 감회가 새롭거니와 그 관찰되는 꽃이나 뭇 생명들도 그러한가 아닌가 심히 궁금하다.
날이 워낙 덥다 보니 어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안거에 든 스님들처럼 가급적 두문불출하고 최소한의 활동만 하면서 지내고 있는 날들이다. 가장 좋은 피서는 독서가 아닐까 한다.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의 작은 책 두 권을 읽고 마음이 가는 대로 독후시로 흔적을 남겼다. <우울한 마음의 의미>와 <삶과 나이>가 그것이다. 과르디니는 이탈리아에서 출생한 후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준 분이다.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특히 사제들의 글을 읽으면 그 사제의 내면적 믿음과 종교적 체험 등의 폭이나 깊이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는 강론을 통해서도 느끼는 바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고 교만한 마음일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군중이 하나같이 놀라는 반응을 보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새로움과 권위와 마음을 건드리는 힘이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말과 글은 동양적 관점에서 이미 인정하듯 그 사람의 내면의 인격과 지향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과르디니 신부님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요즘 세상은 많이 복잡다단한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외적인 요소들과 대내적인 상황들이 모두가 녹록하지 않게만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를 지렛대로 한 무역공세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고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닌 처지에서 변화에 적응해야 할 과제가 변화무쌍하게 밀려오고 있다. 미중 간의 패권 투쟁이 노골화되고 있으며 브릭스에 대한 경고의 속내가 관세율에 반영되어 있다. 가자와 우크라이나로 촉발된 지정학적 요소들은 언제 대만과 한반도를 비롯한 범위로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후쿠야마가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맞으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던 일이 이제는 아득한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종의 말씀마따나 '분산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3차 세계대전'의 양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군사비 지출을 늘려가는 양상은 평화를 만들고 기약하는 미래지향적인 국제 정치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작년에 있었던 12.3 불법 계엄에 대하여 헌정 질서에 따른 법적 절차에 따라 파면 선고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이제 2개월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반년 가까운 시간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갈등의 골이 깊고 같은 상황을 두고 이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깊은지 알게 되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날 선 언어와 선동적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의 법원에 대한 폭력적인 난입과 파괴 행위 등을 통해 드러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도전적 태도 역시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대중영합적 선동가들이 인터넷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경제적인 이득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모습 또한 시민들의 비판적 태도가 걸러내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 큰 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원칙에 대한 합의와 존중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이 거센 세계의 흐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라고 믿는다.
나는 매끄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언어로 현실에서 높이 떠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에서는 감동을 받기가 어렵다. 지금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들과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대중영합적인 태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동원되는 언어들은 이분법적이고 편을 가르고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적대시한다. 넓은 지평에서 공동체적이고 발전적인 포용력을 보여주기보다는 문을 닫아걸고 추방하고 배제한다. 가자의 비참한 상황과 우크라이나의 상황과 미얀마, 수단 등등.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매끄러운 언어는 다양한 영역에서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한 해 2,000명 가까이 직업과 관련하여 산재사고와 질병 등으로 사망한다. 언론에서는 연일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남성이나 스토킹에 의해 사망하는 사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3명이 죽음을 택할 만큼 압박을 받고 있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의 자리가 이렇게 죽음으로 뒤덮여 있다. 삶이 전쟁터와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어떤 이유로라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합리화하기 어렵다.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토마시 할리크는 1948년에 체코에서 태어나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회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지하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사목활동을 한 인물이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 종교인이 소수자나 박해 대상자로 살아가는 문제는 익히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도전과 응전을 유발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1989년 이후 박해 상황에서 풀려났고 그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그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듣게 된 것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책에서였다. 그리고 <신이 없는 세상>, <그리스도교의 오후> 등을 읽었다. 나는 내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에 판단을 괄호에 넣는다는 원칙을 갖고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섣부르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다만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가급적 듣고 '좋은 것은 마음에 담아두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렇지만 고통이나 고뇌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천상의 순수함으로 맑게 쓰여진 글에서보다는 고통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 증상을 껴안고 정직하게 앓아 낸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를 매혹하는 영혼들, 목소리들이 있다. 혹 사이렌의 목소리처럼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을 위험을 지닌 목소리들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곱씹어 본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감동을 주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과장되지 않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며 냉철하고 냉정하게 지적하되 겸허하게 기본적인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학문적 배경과 이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깊이 성찰한 결과로 보인다. 그는 잘 짜이고 매끄러운 체계에 대해서 경계하고 역동적이고 현장적인 현재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적인 영성과 만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의 핵심적인 모든 요소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세계에 대화하고 뛰어들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목소리에 화답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한스 큉의 목소리와는 또 결이 다소 다르게 느껴진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들을 모두 긍정하고 있되 현실적으로 예리한 비판을 양보하지도 않는다. 사회학과 심리학 철학 신학을 아우르는 그 학문적 배경이 오늘날의 교회 상황과 나아갈 바에 대한 모색 과정에서 강점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는 것과 포용적인 태도는 대화적인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미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졸지 않고 빨려 들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재미와는 차원이 다른 눈썹이 타는 듯한 화두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교회에는 이렇게 숨겨진 보물과 같은 유산과 살아 있는 정신들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