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독후
시간이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익숙했던 이름들 혹은 잘 모르지만 같은 시공간의 좌표 위에서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음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고 있다. 죽음의 천사가 호명하는 이름들이 점점 내 주변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는 느낌은 왠지 서늘하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자취를 더듬어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삶의 빈자리는 단순히 죽음이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삶에 대한 평가와 추억이 자리를 잡는다. 욕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찬란하지는 않아도 소박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이 뜨겁고 습하고 폭우가 뒤섞인 여름의 기억도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느낌을 갖게 된다. 조만간 이 여름도 백일홍의 기억과 함께 가을에 자리를 내주고 떠날 것이다. 매년 지독해지는 더위는 또 당분간 유예된 사형집행처럼 아슬아슬하게 잊히겠지만 잠재의식 속에서 수시로 떠오를 것이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인 인간의 처지에 대한 상념이 마음을 짓누른다. 내 마음의 한 조각은 가자에 머물고 있다. 거기 의도적으로 조장된 굶주림이 있다. 아이들이 비아프라에서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 일상화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일상에 수시로 날아드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적이고 사치스러울 지경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동행할 수 있는 것일까. 수잔 손탁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듯 반복적인 고통과 악은 우리의 감수성의 역치를 점점 높이게 되고 추상화하고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의 어려움은 인간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을 벼리고 감각이 무뎌지게 하지 않는 것이며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이다. 살아 있어야 한다. 그저 생물학적 차원에서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의미의 차원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이탈리아어 철자와 스페인어에 대한 간단한 회화를 알려주는 책들을 보고 있다.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사람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사람들은 언어 습득의 관점에서도 어려움이 많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는 성격을 지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타인과 관계 맺음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특효약이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에 대한 애착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낯선 자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동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모든 전쟁과 갈등의 배면에 이런 간단한 원리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경계해야 할 타자와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이웃 사이의 경계선이 얼마나 넓고 좁은 가에 따라 사회적 윤리적 차원의 차별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저 바리사이의 질문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셈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11>, 2021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윤학 시인의 <그림자를 마신다>, 오은 시인의 <없음의 대명사>가 그것이다. 유홍준 현 국립박물관장의 답사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같이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함께 다양한 조건이 결합한 결과이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 유홍준 관장의 책과 삶은 개인의 성실성과 사회적 호의가 적절하게 결합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연작>을 읽으면서 그녀가 만든 세계는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미디어와 결합하고 변화할지언정 본질적인 요소들은 보존될 것이다. 세상이 새롭게 천지개벽을 하여 변화한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현재와 같은 인류의 삶의 양식이 존속하는 한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서울 안에 남아 있는 삶의 흔적과 유적과 기념물들에 대해서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인 환경에 대해서 많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유홍준 관장의 글에는 뾰족한 가치판단이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간혹 정책적인 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는 삶의 모든 근거와 흔적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담겨 있다. 그것은 크나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고 감사할 필요가 있다. 하늘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새롭지 않은 것도 없다.
이승우의 <마음의 부력>과 <부재 증명>을 인상 깊게 보았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들을 생각하게 한다. 아브라함에게 늦둥이를 안겨주신 하느님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을 내면적인 아픔에 주목한 대표적인 철학자가 키에르케고르였다. 물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인류는 형제간의 갈등과 하느님의 인정에 대한 문제를 떠올려 왔다. 로마 건국설화에서 로물루스가 레물루스를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마음의 부력>은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이 엇갈리고 교차하는 그 지점을 초점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세상살이가 사실 그렇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자식은 사고를 치거나 아니면 시들시들 말라가는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자식은 낭중지추처럼 도드라지고 사회적 성취를 해서 가문을 빛내기도 한다. 그럴 때 가족 안에 평화만 존재하기 어렵다. 영조에게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비극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부재 증명>은 카프카의 심문과 같은 차원에서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상에 수많은 익명의 퍼스나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오늘날의 인간의 삶에서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의 내적 외적 충돌과 현실적 책임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아니면 도플갱어나 복제된 자아 등의 문제도 떠올릴 수 있겠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한 일들에 대해서 어느 날 문득 추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기억의 한계로 그 모든 맥락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다.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의 맥락과 연결의 논리를 누군가에게 납득시키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윤성희의 <블랙홀>은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뉴스에 나오는 흉악한 범죄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간혹 경험하듯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의 당사자가 내가 잘 아는 영역에 속한 사람일 때 우리는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왜?’ 또는 ‘어째서?’ 등의 의문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박형서의 <97의 세계>는 사고의 순간에 무한히 시간적으로 갇힌 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유의 상상적 서사가 낯설지는 않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 등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천운영의 <아버지가 되어주오> 서류상으로 위장 이혼한 부모의 삶에 대한 이력을 통해 아는 것과 실제의 간극에 대해서 돌아보게 한다. 간혹 우리는 타인의 삶과 심리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객관적인 사태와 주관적인 이해 사이에 심연이 가로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특히 자녀가 부모의 마음이나 관계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한지수의 <야夜심한 연극반>은 한일 관계를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부모와 우토로 마을에 대한 역사적 흔적을 이야기 속에 녹여낸 작품으로 보이고 장은진의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생각나게 한다. 대학 시절 한문학 강독 시간에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선명하다. 젊은 시절 소풍 갔을 때 개울가에 빨래하던 어떤 처자의 희디흰 종아리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런 말에 대해 오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미지나 순간적인 기억은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오래오래 무의식 속에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은 시인의 <없음의 대명사>는 언어와 관련된 문법적 범주들과 어휘가 실제 삶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의미의 틈새에 대한 변주들을 통해 일상적인 인식을 흔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시집들을 더 읽어 보아야 시인의 특징을 제대로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약간의 상견례 정도로 생각하기로 한다.
이윤학 시인의 <그림자를 마신다>를 통해 이 시인의 시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의 풍경들은 우리의 감각을 통과해서 시간의 용매 속으로 녹아든다. 우리는 잠시 그 풍경과 경험들이 제공하는 맛을 공감각적으로 느끼면서 삶이라는 기억을 축적하는 셈이다. 유홍준 관장의 글이 그렇듯이 문학 작품들도 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소화하는 것이 인생의 삼쾌라고 하듯 우리가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들을 깊고 온전하게 경험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읽지 못한 시집들과 소설들을 좀 읽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가자. 순리대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