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화산에 묻힌 또 하나의 폼페이
지금 나는 서촌 일대를 걷고 있다. 많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흘러가고 있다. 영화 혹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임금과 신료들은 백척간두에 선 종묘사직을 붙들고 울부짖고 있다. 지금도 그 대사가 귓가에 맴돈다. '과인은 살고자 한다.' 삼전도에 설치된 아득한 단상 위 저 높이 앉은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그 앞에 조선의 임금이 삼배구고두례를 행한다. 그렇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칼날에 상처 입은 종묘사직의 명맥은 이어졌지만 척왜양이의 척화비를 쓰러뜨리고 강화도조약 이후 외세의 밀물은 거침없이 이 땅을 휩쓸고 대한제국으로 탈바꿈하여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시나브로 외교권과 군대를 잃고 주권을 상실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남북이 갈라진 지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불가에서는 시방세계에 빽빽이 저마다의 세계 불국토와 부처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다중세계가 아닐까. 하나의 공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서촌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시간으로 분할되어 있는 일종의 평형세계들이 접촉하는 지점일 수가 있겠다. 칠궁에서 살아가는 후궁들, 서촌을 차지하고 살았던 왕실 종친들의 집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거기에 장동 김 씨들의 오랜 세거지가 이 근처에 넓게 자리 잡았고 겸재 정선의 삶의 자취가 이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중인 지식인들의 송석원 시사의 웅성거리는 움직임도 이 근처에서 엿볼 수가 있다. 그뿐인가 이중섭과 이상과 구본웅의 집들도 이 근처에 있으며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했던 윤동주와 그의 육필 시고를 소중히 간직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정병욱의 인연도 머물고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공간은 하나의 시점과 풍경만을 허락하지만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과거의 시공의 더께를 걷어내거나 폼페이에서처럼 생생하게 복원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청운동공원을 지나 수성동 계곡에 서니 산자락까지 올라갔던 아파트가 철거되고 겸재의 그림에 보이던 돌다리가 초입에 남아 있다. 제법 아득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고단한 삶의 풍경이 옛 풍경을 잠식하며 이 계곡으로 스며들고 있다. 평창동의 산자락을 먹어 들어간 집들을 보거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산자락의 아파트도 사실 자연의 입장에선 뜨악하고 낯설 뿐이리라. 그렇지만 인간은 자연을 향해 늘 한 발 다가서고 싶어 했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의 그 이질적이고 이단적인 건축물이 그럴 것이다. 망한 나라의 조선 귀족이 지었던 그 건물이 불에 타서 다시 사라져 버리는 그 과정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파도가 백사장에 쓰인 글자와 모래성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흔적을 지워 나가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사람은 와서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오랜 역사의 숨결과 사연들이 중첩된 이 서촌거리를 거닐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종묘사직보다 더 오래가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삶이라고. 그 갑남을녀의 출렁거리는 삶의 역동 위에 잠시 솟았다가 다시 잠기는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몇 권의 책을 읽는 일과 그 이야기의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 연관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우선 최종현, 김장희 공저인 <오래된 서울>을 보니 주로 서촌을 중심으로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고려 시대의 남경에서부터 최근까지를 짚어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유홍준 관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역시 사대문 안을 지나 강북 특히 성북동 일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현재의 강남 금싸라기 땅에 남은 봉은사와 선정릉 등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게 자극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봉은사에 가서 추사의 '판전'이라는 글씨도 확인하고 차도 한 잔 마시고 시끌벅적하지만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정릉에 가서 성종 임금과 정현왕후의 선릉을 보고 중종이 홀로 잠들어 있는 정릉도 함께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곳에 왕비와 함께 기껏 잘 쉬고 있는 사람의 무덤을 이장해서 결국은 홀로 있게 한 그 사연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말하거니와 <2016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정용준의 "선릉 산책"이라는 단편이 선정릉에 갔던 기억과 맞물려 기억에 남는다. 아르바이트로 돌보미 역할을 하는 젊은 청춘의 하루가 장애를 가진 듯한 청년의 하루와 겹쳐지면서 울리는 감정의 협화음 혹은 불협화음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생각한다. 김금희의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취업 준비와 현재의 직장 생활 속에서 대학 후배와 나눴던 마음의 스침과 어긋남의 과거가 현재 속에서 잠시 조우하는 그런 내용이다. 기준영의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그랬다던가 인생은 권태와 궁핍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고. 출전은 확실하지 않지만 결혼은 미친 짓이다 유의 발언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평생 해결된다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 권태의 물크러짐을 방지하는 방부제는 무엇일까. 그리하여 책임지지 않으려는 삶의 가벼움과 안온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는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이다. 계층과 계급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갑오경장 이후 폐지된 노예제도는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일까. IMF 이후 우리 사회에 도래한 유연한 노동의 모습은 층층이 나뉜 노동의 피라미드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싸우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또 박찬욱 감독의 최근작 <어쩔 수가 없다>도 그런 양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영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 무언가 또 존재해야 할 무엇은 있는 것이겠지. 김솔의 "유럽식 독서법"은 정말 해외문학 전집을 읽는 방식(?)으로 읽어야 할까 싶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글쓰기의 방식 또는 작가와 작중 인물이 서로 만나게 하는 우나무노의 <안개>와 같은 방식들. 그렇지만 다소 울렁증이 생긴다. 태국인의 시각에서 따라가기엔 정서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 오한기의 "새해" 역시 글쓰기의 자의식이 묻어 있지만 현실에서 꽤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일종의 추상성. 최정화의 "인터뷰"는 보이는 것과 실재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이야기의 일종으로 보인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면 좀 비약일까.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 보이는 것을 통해 규정한 의미 부여나 심판은 한 사람의 내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자기 복제적인 힘을 지니고 관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이체의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을 읽으면서 그 언어 구사의 다채로움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의 시집은 쉽게 읽히지가 않는데 비유하자면 장애물이 촘촘하게 박힌 지뢰지대를 식은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듯한 신중함을 요구한다. 독자는 진지하게 의미를 곱씹으면서 일상적 언어의 붕괴를 감당하며 읽든지 아니면 실용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신속하게 안전지대로 도망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다. 위악적인 언어와 메타포가 가라앉고 맑게 남는 것을 건지면 청주 같은 시가 뜨겠지. 모든 발효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은 상당히 알찬 단편들이 옥수수 알갱이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다. 소설을 읽는 맛이 난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보면 어떤 분류 기준들이 떠오른다. 이승우의 "전기수 이야기"는 일단 퇴직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박민규의 "누런 강 배 한 척" 역시 퇴직해서 긴 노후와 치매에 걸린 아내의 수발을 감당해야 하는 노년의 이야기다. 이동하의 "헐거운 인생" 역시 이태준의 "복덕방"을 떠올리게 할 만큼 노년의 그늘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완서의 "대범한 밥상"은 노년의 이야기이면서 윤리적인 쑥덕거림의 문제를 곁들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김애란의 "성탄 특선"은 가난한 청년들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김중혁의 "유리 방패" 역시 청년들의 막다른 심정을 다소 해학적이고 낙천적인 여운을 주며 보여주고 있다. 김경욱의 "천년 여왕"은 다소 현대판 요재지이의 설화의 현대판 각색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는 파산에 이른 가장의 막막한 심정을 개의 이빨에 물린 아이의 치료처를 찾는 막막함과 조바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강의 "왼손"은 정상적인 삶과 일탈에 대한 욕구 사이의 내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인 상징으로 보인다. 왼손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한 인간의 통합성은 붕괴하고 일상적 삶의 의지는 제어력을 잃고 빙판 위의 자동차처럼 제멋대로 움직여 파국을 불러오고 있다. 왜일까 고골리의 "코'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코"가 생각난 것은. 혹은 카프카의 "변신" 같은 작품과 뭔가 상상력의 차원에서 상동성이 있을 것만 같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지킬과 하이드, 인간의 내적 길항의 정교함이란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조그만 충격에도 인간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 아득한 미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늘 전전긍긍할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