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의 침묵,
구조된 자의 증언

- 프리모 레비를 기억하며

by 차거운

1. 만남


마키아벨리는 서간에서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귀가하여 자신의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순간 그는 이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나 옛사람들과 어울리며 대화에 빠진다고 말이다.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적절한 고립이 확보된다면 그 공간이 화려하든 작은 밥상 위든 규모가 큰 서가를 갖추었든 그렇지 않고 몇 권의 책만 있든 상관없을 것이다. 모든 독서는 낯선 이름과 삶과 정신과의 만남이기에 숫기가 많은 사람이든 사교적인 사람이든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는 편안한 대화인 셈이다.

독서를 통해 맺어진 관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리고 사회적 배경과 나이와 사상과 성별을 뛰어넘는다. 독서는 감자나 고구마를 수확할 때처럼 일련의 연쇄를 이루며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종의 연쇄적 고리를 형성하며 이어지는 독서 행위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모든 장소, 모든 시간, 모든 대상에서 연인을 떠올리며 전율하듯 연속적이고 상승적인 단계를 따라 진행된다. 읽기의 격렬함이 끝날 때까지 그렇다. 책은 중매꾼처럼 또 다른 책을 소개한다. 가장 바람직한 독서는 애초에 그렇게 계획하지 않은 만남들이 발산적으로 이어짐으로써 길을 잃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목적이나 실용성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며칠 동안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주기율표>가 그것이다. 책을 읽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책의 내용과 저자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마련이다. 1919년에 태어나 1987년에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 유대계 이탈리아인, 그가 바로 저자인 프리모 레비다. 그는 화학 박사 학위를 지닌 화학자이자 2차 세계대전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성장했고 무장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1944년부터 나치의 패배로 풀려나기까지 수용소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이력의 소유자다. 수용소의 노동력을 활용한 독일 화학기업의 이익 추구 덕분에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다양한 요소들의 작용으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귀환하여 생계를 위해 자신의 전공을 활용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글과 책들은 죽어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인류 앞에 고발하고 증언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자신의 실존적 운명도 결코 이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의 책들은 그의 삶 자체가 발언하는 기억과 증언이 물리적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나는 프리모 레비를 2023년에 작고하신 서경식 선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딘가 서평을 통해서 그의 책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알게 되었고 그 책을 읽으면서 프리모 레비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그는 1951년 생이며 재일교포다. 한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인 서승, 서준식이 유신 치하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공안사건으로 구속되는 경험을 통해 구명운동과 민주화활동을 하게 되었고 다양한 글과 저서를 통해 디아스포라 한국인의 문제의식을 드러낸 사람이다. 유대인으로서 프리모 레비가 겪었던 운명에 대한 끌림에서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는 1987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토리노 집과 무덤 등을 찾아가면서 그의 삶과 글들을 통해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모습을 소개하였다. 바로 이 독서가 나를 프리모 레비와의 만남으로 이끌어 준 셈이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은 <이것이 인간인가>, <살아남은 자의 아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주기율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정도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니면 그의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할까. 글쎄. 어떤 점에서는 충분하고 어떤 점에서는 더 읽어야 하리라. 그렇지만 나와 이 하늘 아래 비록 멀리 떨어진 곳이었을망정 서로 겹치는 시간을 살았던 인물에 대해서 이제 조금은 안다고 하겠다. 그렇다. 나는 프리모 레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나에게 소개해 준 서경식 선생에게도 감사한다. 모두 편히 잠들었기를! 아니 편히 잠들지 않기를! 세상은 여전히 경계해야 할 광기와 적의로 들끓고 있으므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도 깨어 있기를 희망하자.



2. 대화


이른바 가청주파수, 가시광선이라는 용어가 있다. 인간 감각의 물리적 한계를 염두에 둔 개념들인데 인간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함께 삶에는 반드시 단순화 작용이 필요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슈퍼맨처럼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미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우리가 지상에서 벌어진 인류의 폭력과 잔혹함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들을 모두 생생하게 느낀다면 우리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벌어진 전쟁과 폭력에 대한 기록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도 많을 터이지만 고통의 기억들은 입에서 입으로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한 고발의 노래와 서사를 통해서 반향 하듯 살아남아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노골적으로 동시에 은밀하게 진행된 제노사이드는 국가적 과제와 전쟁 수행의 목표가 되어 이 지상에 지옥을 만들었다. 유대인이 가장 1차적인 목표였으나 집시나 장애인, 정치범, 포로 등도 같은 원리에 의해 처리되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사명감까지 드러내면서 같은 인간을 분쇄하여 물질화하는 폭력이 있었던가.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죄책감을 유발하는 트라우마를 남긴 일이 있었을까.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95-96쪽 부분 발췌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서 자신이 저항운동을 하다 파시스트 군대에 체포된 후 유대인임이 드러나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어 1945년 종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정을 회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병에 걸려 버리진 결과 그는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학자로서의 지식도 그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은 먼저 육체로 삶의 사건들을 경험, 즉 살아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기억의 반추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삶에 대해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수많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들처럼 프리모 레비 역시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해야 할 욕구를 느낀다. 그는 작가가 된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그는 시와 소설의 형태로 누에가 자신의 내면에서 실을 토해내듯 자신의 체험을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 곱씹어가며 글을 쓰고 책을 발간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은 그의 말에 의하면 구체적인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다른 책들과 달리 온전히 허구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배경으로 살아온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소설이라고 한다. 빨치산이면서도 단일한 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한 존재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인 그런 존재로서의 유대인의 상황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제사처럼 쓰인 로마시대 랍비들의 잠언을 기억할 만하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산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살아남은 자의 아픔>은 시집이다. 파울 첼란의 시를 읽으면서 듣던 목소리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그 무엇이 있다. 고통이 존재의 갈라진 균열을 비집고 나오는 것과 같은 소리를 듣는다. 세상의 고요와 침묵 위에 부서지는 언어들! 프리모 레비의 시가 좀 더 직설적일 수는 있겠다. 증언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와 책임감이 드러나는 시 한 편을 기억한다.


그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고통 너머 그 무엇,
그 무엇을 난 아직도 믿고 싶다.
세월이 흘러 이미 모두 끝났지만
우리가 저 태양 아래에서
다시 떳떳하고 자유롭게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꿈꿨던
그 시절의 치열함을
난 죽을 때까지 기록하고 싶다
-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10쪽

<주기율표>는 화학자로서의 프리모 레비의 정체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책이다. 주기율표에 박혀 있는 원소들의 물리적인 속성이 은유적인 차원과 결합하여 한 편의 시적 울림을 풍기고 있다. 불활성 기체인 '아르곤'이라는 제목의 장은 프리모 레비 자신의 혈통과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지닌 각각의 문화적 융합에 대해서 언어적인 검토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스페인의 레콩기스타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이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으로 유입된 경우가 바로 그의 가계에 해당한다. 절멸 수용소에서 죽어간 많은 유대인들 역시 독일, 폴란드, 동유럽, 프랑스 등지에서 현지에 동화되어 자신을 거주 국가의 주민으로 인식하고 살았다는 점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혈통은 철저하게 추적되어 이러한 모든 맥락을 부인당하고 이방인, 불순물, 오염원으로 규정되고 바퀴벌레나 해충처럼 박멸되어야 하는 존재로 격하되고 비인간화되었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이러한 분리와 배제의 메커니즘은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수소, 아연, 철, 칼륨, 니켈, 납, 수은, 인, 금, 세륨, 크롬, 황, 티타늄, 비소, 질소, 주석, 우라늄, 은, 바나듐, 탄소로 이어지는 각각의 장들은 그의 전기적 경험과 녹아들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각각의 원소들이 물리적 세계를 구성한다면 그 원소에 대응하는 기억의 핵자들은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요소들인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프리모 레비가 사망한 1987년을 한 해 앞둔 시기에 마지막으로 발간된 책이다. 이 책은 에세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인에 의해 저질러진 제노사이드는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해와 피해의 차원에서 1차적으로 대응된 사람들의 죽음과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법적 사회적 사후 처리 과정을 통해 조금씩 희석되고 퇴색되는 과정에 있음을 저자는 확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잊지 말아야 하고 앞으로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생생하게 성찰하고 기억하기를 희망하는 듯하다. 과거를 망각하면 잘못된 과거는 다시 미래의 가능성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앞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248쪽


그는 자신의 체험에서 가치 있는 광석을 캐어내어 유용한 물질을 뽑아내는 일종의 채굴자였다. 그의 책들은 자신의 일생 어느 한 영역과 관련하여 성찰되어야 할 의미 있는 질문과 사유의 내용으로 채워진다. 평생 그는 증언하는 자세로 글을 썼고 광맥은 어느 정도 소진되었다. 남은 것은 그 캐어낸 원석들을 가공하고 정련하여 인간의 미래에 유용한 물질로 다듬는 작업이었다. 그러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세상은 위태로웠다. 카인의 후예들은 여전히 죄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하고 새롭게 저지르는 죄악들도 목격되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의 목록을 갱신하고 있다. 프리모 레비는 지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고 느꼈을까. 그는 거대한 상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코끼리와도 같이 조용히 세상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상아 즉 증언들은 불후의 것으로 남았다. 그에게 안식이 있기를. 그리고 세상의 파도에 휘말려 가라앉은 자들과 구조되었다가 세월의 파도에 다시 가라앉은 모든 구조된 자들에게도 안식이 있기를 빈다.



3. 성찰


다들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의 세계는 사화산이 아니다. 지층 심부 저 밑에서는 마그마가 부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도 피어나고 가끔은 소규모의 분화도 이루어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 존재를 드러냈던 핵분열을 이용한 무기는 그 이후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세계에는 인류를 몇 번이고 절멸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핵탄두들이 쌓여 있다. 아우슈비츠,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을 비롯한 절멸 수용소들은 인간의 잔악함에 대한 교훈의 장소로 남아 있다. 우리는 충분히 깨달았는가? 프리모 레비가 경고했듯이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동일한 인간의 지위에서 격하하여 비인간의 구덩이로 격하하고자 하는 선동과 적대감으로부터 인류는 정말 자유로워졌는가? 프리모 레비는 1987년까지의 세계사적 변화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종의 망루 위의 감시자를 자처한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세상에는 많은 증언자의 목록이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긴 명단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라는 시집, 엘리 위젤의 <흑야>,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등.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매개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후와 의미를 모든 사람이 함께 경험할지라도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기록자 증언자들인 경우가 많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내용을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경우도 그렇고 역사적 기록물과 증언의 글들을 보아도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증언자의 역할을 맡아서 기록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자료들과 4.3과 5.18 그리고 사회적 참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올바른 사태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를 토대로 사회가 제자리를 찾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덮으려는 는 자가 있고 진실을 드러내려는 자가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국내적으로 적대감이 팽배하다. 국가와 국가는 경제와 이권을 토대로 패권을 다투고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프리모 레비가 살아서 오늘날의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목격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본다. 타자를 말살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평화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민간인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미사일을 날리고 있다. 지난 몇 달간 국내적으로 일어난 일들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대하는 태도와 언어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공자가 말했듯 '공교로운 말과 얼굴빛을 잘 꾸며대는 사람치고 선한 자가 없다.' 추상적인 말들 번지르르한 가치로 사람들을 홀리는 자들 사이비 교주들을 조심하고 보이스 피싱처럼 영혼을 정신을 낚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향해 잘 벼려진 의식으로 한 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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