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오오리이베에츠으으

그치지 않는 마을 방송(2025년 9월 29일)

by 그래도 캠핑

약국을 나와 JR 신치토세 공항역으로 가서 JR 패스를 픽업했다. 이번 여행 후반에는 여러 도시를 점찍고 다닐 예정이라 조금 비싸더라도 JR 홋카이도 7일 패스를 구매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단기 체류 목적의 외국인만 살 수 있는 이 패스는 여행 일정동안 열차 사용이 많은 사람에게는 제법 이득이 되는 할인상품이지만, 일본의 교통수단이 모두 그렇듯, JR 중에서도 이 패스를 사용할 수 있는 노선이 있고 못 하는 노선이 따로 있어서 미리 알아보고 사야 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의 후반 일정은 이 패스를 사용하기에 적당했는데, 미리 좌석을 지정하기 위해서는 기차 탑승시간을 미리 정해야 했기에 JR 패스를 픽업하더라도 좌석예약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IMG_2479.HEIC JR 홋카이도 7일 패스. 좌석을 예약할 경우 예약 티켓은 따로 있는데 개찰구에서 두 티켓을 동시에 한꺼번에 넣어야 한다. 아래에 있는 티켓은 손상이 되어서 빨간 스탬프를 받았다





이렇게 할 일 하고 먹을 것 먹고 있다 보니 어느새 노보리베츠로 가는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 안내소에 가서 물어보니 코인로커 앞에서 4시에 픽업한다고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모여있었다. 소프트볼 팀 티셔츠를 입은, 한눈에 봐도 야구소녀로 보이는 이가 명단을 들고 나타나더니 사람들을 두줄로 세우고 한 사람씩 이름을 체크하더니 깃발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구나. 단체관광. 내 인생에 깃발을 따라다니는 일이 생기다니.


살풋 잠이 들었나? 에너지가 좀 회복된 느낌이 든다. 여행 중에서는 이렇게 이동시 갖는 쪽잠이 은혜롭다. 특히 시차가 12시간 넘게 나는 곳으로 해외여행을 할 때 더 그렇다. 때문에 여행지에서 누군가가 운전을 제공하는 경우가 생기면 무척 난감해진다. 매우 고마운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내 에너지 회복한답시고 잠을 잘 수는 없는 일이다. 피곤한 상태로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다정한 말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먼 곳에서 왔다고 나를 환대해 주고 손수 운전해서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사과를 드린다. 앞으로 전 무조건 대중교통입니다.




DSC01579.JPG 노보리베츠 관광지 입구의 도깨비 동상




이곳 노보리베츠 세키스이테이(登別 石水亭) 숙소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한 다다미 방인데... ㅎㅎㅎㅎㅎ 난생처음 만난 다다미 방에서는 돗자리 냄새가 가득했다. 어릴 적 여름철마다 꺼내 깔던 돗자리. 자연스럽게 수박 냄새도 같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여름과 수박, 토마토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던 조합이었는데, 언제부터 수박이 이렇게 비싸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다미의 돗자리 냄새뿐만 아니라, 숙소 건물은 전반적으로 낡고 기본적인 청소 / 관리가 안 된 상태였다. 아니 마을 전체가 뭐라 그럴까... 쇠락해 가는 느낌. 2000년대 초반, 이민을 떠나기 전 친구들과 한국의 이곳저곳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경주였다. 80년대 수학여행의 메카 경주는 언젠가부터 극심한 쇠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마을 곳곳에 있는 대형 숙소들, 건물은 웅장했지만 집집마다 어우운 창문들, 전혀 관리가 안되어 마치 유령 마을인 것과 같은 광경을 그때 본 적이 있는데, 이번 여행의 일본 소도시 곳곳에서도 비슷한 정경이 발견되었다. 어딘가 붕 떠있지만 관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손을 확 놔 버린 느낌.




20250929_154753.jpg
20250929_154817.jpg
모기장 먼지와 창틀의 곰팡이
20250929_160004.jpg
20250929_160025.jpg
로비로 연결되는 전화기와 방 정경





그래도 노보리베츠 온천 마을의 특징이라면 마을 전체에서 유황 냄새가 그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오오오 달걀 썩는 냄새. 이거 제대로 온천인걸... 했었지만, 이게 어딜 가든지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자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몸에 좋은 걸까? 만화 <골든 카무이>에서 '토니 안지'가 유황연기에 너무 노출이 많아서 시력을 잃지 않았던가? 혹시 일본 온천 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이나 폐병 / 혈액병으로 해마다 많은 사람이 죽는 거 아닐까? 일본 정부에서는 몰래 감추고 있는?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관리하고 있는 정부청사 건물에서 어느 날 보일러 연통에서 가스가 조금 새자 환경팀과 보건팀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냄새랑 지금 이 냄새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온천수의 수원이라고 말하는 용천수 장소에 갔을 때는 그야말로 숨이 컥컥 막힐 정도였다.






그리고 마을 방송.

노보리베츠 뿐 아니라, 하코다테나 오비히로에도 마을 거리를 걷다 보면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방송이 흘러나오는데.. 아.. 이건 뭔가요. 알아본 바로는, 일본에서는 재해에 대비한다거나, 주민들에 대한 공지사항을 알리는 차원에서 마을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방송을 한다고 하는데, 노보리베츠에서는 끊임없이 "노보오오리이베에츠으으으~"하는 엔카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뉘 집에서 라디오를 엄청 크게 틀고 있네.. 싶었는데... ㅎㅎㅎㅎㅎ, 이런다고? 저 끝없이 반복되는 노래가 재해대비나 공지사항일 리는 없고, 내가 만일 이 마을에 직장을 잡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시 상대로 정신적 피해보상을 할 것만 같은 지독한 정신공격이었다.










마을 관광코스를 따라 걷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도 같았지만, 천천히 날이 개면서 굿타라 화산지대의 일부인 '지옥계곡 (地獄谷 지고쿠다니)'에 근사한 정경이 펼쳐졌다. 햇볕에 반사된 노란색과 하얀색 유황의 흔적이 남아있는 암석들과, 중간중간 간헐천, 분기공, 용출구 등이 또렷이 드러났다. 예전 자스퍼의 ‘에디뜨 캐블 (Edith Cavell)’ 산에 갔을 때에도 이런 색감의 계곡과 암석들을 본 적이 있는데, 뭐 여기에 비하면 지옥의 외인구단 버전이긴 하지만, 그 정도면 그 지역에서도 유황온천을 개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40도의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는 쾌감이라는 게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은 유희는 될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에디뜨 캐블 산에 관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https://brunch.co.kr/@campnonetheless/63)


DSC01567.JPG
DSC01569.JPG









저녁 뷔페 시간에 맞춰 숙소로 돌아왔다. 삿포로 관광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 세 가지라고 한다면 보통 카이센동 (해산물 덮밥), 징기스칸 (양고기 철화로 구이), 미소라면 정도를 얘기하더니, 뷔페 코스 초입부터 바로 카이센동이 있었다. 연어회와 연어알, 그리고 다른 해산물들을 직접 잔뜩 담은 후 밥에 비벼 먹는다. 객실의 청결상태로 봐서는 이 음식을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0.5초 정도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 그 옆에는 징기스칸을 테이블에서 직접 해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철화로 및 고체 연료, 라이터와 고체연료 불을 끌 수 있게 하는 캔들 스너퍼 (Candle Snuffer, 한국 단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양고기와 야채들이 쌓여있었다. 아니 잠깐만, 저걸 숙박객들이 직접 테이블에 들고 가서 해 먹도록 한다고? 고체연료를? 안 위험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전에 대한 감수성은 사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더라도, 과연 고체연료가 쉽게 꺼지는가? 화로를 하나 더 가져와 영양솥밥을 해 먹는데 캔들스너퍼를 올려두었는데도 불이 꺼지지 않아 밥이 타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테이블에서 불이 얼굴 높이로 활활 올라오는 화로를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생겼다. 그런데, 서빙을 하던 여성 접객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입으로 훅 불어 불을 꺼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 그렇지.. 이런 것도 다 경험과 자신감이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



20250929_181555.jpg
IMG_2229.heic
위생이나 안전이 걱정되더라도 일단 먹고 봅니다




결코 모범병사나 특급병사의 자질은 아니었지만,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부터 칭찬받았던 건 바로 밥을 빨리 먹는다는 거였다. 당연하지.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던 세대고, 보통 2교시 후 쉬는 시간 10분 안에 먹고 싸고를 다 했던 훈련이 이미 되어있었는데.. 하지만, 회사를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생활 25년을 하면서도 먹는 속도는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먹기로 유명했던 아내의 먹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안 그럼 굶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위기의식 때문일까? 아무튼 이 속도로 한 시간 반동안 줄기차게 먹었다. 세계 1위 마라토너 킵초게의 페이스가 100미터를 17초에 뛰는 속도로 마라톤을 완주하는 페이스라던데 거의 뷔페계의 킵초게가 된 것마냥 먹었다. 인간이 이 많은 양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집어넣고 집어넣었다. 단지 뷔페의 본전을 뽑기 위한 건 아니었고, 해산물 재료들이 무척 신선해서 도무지 물리지가 않았던 것. 홋카이도를 일본의 냉장고라고 부른다더니, 이렇게 쇠락한 관광지 마을 호텔의 저녁 뷔페라도 할 건 하는구나 싶었다.


일본의 온천 호텔에서는 실내에서 입고 다닐 수 있도록 간편복 - 유카타를 제공하는데, 그걸 입고 식당에 가기는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지고 온 옷 중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객실로 돌아오니... 아... 음식 냄새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하게 옷에 밴 걸 발견했다. 아니 이것 보세요. 명색이 호텔 레스토랑인데.. 이렇게 환기가 안 되나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음식을 집어 담는 바로 그 장소에서 즉석요리를 하기도 하는 뷔페 구조상 어쩔 수가 없었던 듯.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이곳 노보리베츠 세키스이테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만난 모든 로컬 식당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 방문했던 오비히로에서는 동네 전체에서 부타동 (돼지덮밥) 냄새로 자욱했었다. 어쩌면 일본에선 식당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나중에 하코다테에서 믿음직한 페브리즈를 살 때까지, 음식 냄새가 잔뜩 밴 옷들을 들고 다니느라 걱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온천욕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밖은 이미 어둑해졌건만 그래도 차가운 밤공기를 머리에 쓴 채, 뜨거운 노천온천물에 흐물흐물해지는 건 문자 그대로 '휴식'이라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목욕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 뜨끈하게 목욕을 했으면... 당연히 맥주죠. 아까 동네 산책을 할 때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깠다. 에비스 프리미엄과 기린 이치방시보리,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홋카이도 한정 삿포로 클래식은 내일모레 양조장에 가서 생맥주로 실컷 마시기로 하고. 그런데... 이렇게 먹고 이렇게 마시니까, 결국 배탈이 안 날 수가 없구나. 배탈엔 정로환.




20250929_175149.jpg 마을지도


끝으로 노보리베츠가 자랑하는 관광상품인 "변신하는 염라대왕". 뒤에 들리는 음악은 예의 그 노보오오리이베에츠으으~ 엔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