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도시 삿포로에서 길 잃기

외국어는 기세라지만 (2025년 9월 30일)

by 그래도 캠핑

송영버스가 떨구어 준 삿포로 역 근방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다 보니 12시 30분에 칼같이 파란색 벤츠가 등장하더니 우릴 픽업했다. 도착한 곳은 삿포로 역에서 차로 10분 거리 주택가에 있는 2층 양옥집. 이런 집을 4LDK라고 하나? 1층은 게스트들이 쓰고 2층은 집주인들이 쓰는 형태로 현관문은 공유하는데 번호가 아니라 카드키를 받았다. 민박을 제법 오랫동안 해왔는지 문패로 民宿 @HOME N23이라고 쓰여있다. N23은 기타니쥬산초 (北23条, 북쪽 23번째 거리)라는 의미. 차를 처음 발견했을 때 어설픈 일본어로 인사를 했더니 그 뒤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일본어를 감당해야 했다. 마침 영어를 할 줄 아는 집주인아저씨는 직장에 있었고 집주인아줌마 메구미 사사키 상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 영화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 관광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정도 한국어 강좌에 나가기도 한다던데, 정작 내가 들은 한국어는 "최우식" 밖에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신형 갤럭시 폰을 가지고 왔지!! 하면서 스폰서를 받을만한 경험담을 나누고 싶지만 중년들의 실생활 대화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대화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사가 "어어어 그게 뭐였지? 하아 그게 뭐더라?"였거든. 인간의 기억능력이 그렇게 저질일 거라는 건 Ai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20250930_121506.jpg 삿포로 역 북쪽 출구 방면 버스 승차장



그럼에도 갤럭시 통역기능과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를 총동원해서 어렵게 어렵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믿고 싶은 얘기만 믿는 것은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건지, 번역기를 써서 얘기하고 두 번 세 번 정정을 했음에도 아내는 캐나다에서 최우식이 다녔던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전달된 것 같았다. "어 그럼, 정말로 최우식을 만났던 거야?" 하는 질문에 절대 아니라고 정정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 "스고이이~ 스고이네, 최우시쿠"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그렁거리면서. 하아아. 뭐.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얘기를 해도 오해는 언제든지 생기는 법이니까.


그 외에도 일본어와 손짓 발짓을 통해서 간신히 주의사항 및 열쇠 사용법 등을 전달받았는데 (그리고 동경대 재학 중인 딸이 캐나다에서 유학 중이라는 얘기도), 마치 처음 이민 왔을 때처럼, 못 알아들는데도 '오케오케' 하는 나쁜 버릇을 여태 못 버려서 실수하기도 했다. 카드로 문을 열 때 5초를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걸 몰라서 문 손잡이를 돌렸더니 2층에서 부리나케 내려와서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지만 뭐. 어차피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때는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겠어. 인내심을 사용하든 이해심을 사용하든, 결국 의사소통이 되어야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연초에 교토와 도쿄를 갔다 온 아내의 말을 빌자면, 삿포로에서의 의사소통이 훨씬 더 어려웠다고 한다. 일단 영어를 쓰는 사람이 현격히 적기도 하지만 일본어를 쓰는 사람들도 너무나 빨리 얘기한다는 것. 따지고 보면 캐나다에서도 이민자 인구가 적은 앨버타나 다른 주에서 쓰는 영어가, 이민자 인구가 많은 비씨 주나 온타리오 주의 영어보다 빠른 편이니까. 삿포로는 그래도 제법 큰 관광도시인데도 도쿄나 교토에 비하자면 관광객들에게 의존하는 경제의 비중이 높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이번 여행 일정 중 들렀던 다른 소도시 - 히가시 무로란, 오비히로의 경우에는 더욱 심해서, 식당에서 주문할 때에도 일본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엄청나게 빠른 일본어로 대응받았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민박집에서 짐을 풀고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이 동네로 오는 중이라고. 메구미 씨가 차로 픽업을 해줄 수 있다고 제안해 줬으나 유붕이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야라는데 얼렁 버선발로 가서 직접 맞이해 줘야지.


삿포로 중심지에서 북쪽에 위치한 민박집은 북 23가에 있는데, 삿포로를 종단하는 지하철 남북선 (난보쿠센 南北線)의 북 24가 (기타니쥬욘초, 北24条)역과 가깝다. 도보로 20분 거리. 슬슬 동네 구경이나 하면 좋겠다 싶어서 한 시간 정도 전에 길을 나섰다. 어쩌면 이렇게 날도 좋은 건지. 이제 막 아이들 하교시간인지 란도셀을 맨 병아리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너는 모습도 귀엽다. 그런데, 예전에 도쿄에서는 잘 몰랐는데 삿포로의 주택들은 기름보일러를 많이 쓰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집집마다 기름탱크를 건물 바로 옆에 두고 있었던 것. 새로 지은 집들은 히트펌프 실외기와 같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삿포로 정도 춥다 보면 히트펌프의 난방능력만으로는 모자란 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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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민박집 게스트 주방 - 간단한 식사준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 동네 산책 중 발견한 공사장 - 일본은 아시바 (비계)도 귀엽네. 폭이 1미터도 안 되었다.



그리고, 밴쿠버와는 달리 (그리고 아마도 서울과도 달리) 삿포로의 주택가에는 종종 작은 상점이 박혀있는 것이 보였는데, 물론 상가건물이 따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택들 사이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업구획과 주거구획이 분명히 나눠져 있는 밴쿠버에서는 잘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주택가에 있는 상점 중에서는 안경점과 치과가 무척 많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일본 전체가 늙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삿포로는 나름 계획도시라 중심가 소세이가와 공원과 오오도리 공원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격자형으로 길이 나뉘어있고 거기에 맞춰서 주소가 결정되기 때문에 길을 찾기 쉬....워야 하는 건데...


분명 북23가 + 동6가 집에서 출발해 북24가 + 서3가에 있는 역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중인데...


왜 동쪽 숫자가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거지?


동13가까지 왔는데?


아무리 도시가 계획도시고 도로가 격자형이면 뭐 하나. 방향감각이 없는 걸.


날씨가 좋다고 하하 호호하면서 칠렐레 팔렐레 하다가 갑자기 지도를 보면서 맹렬하게 왔던 길을 뒤돌아가게 되었다. 아니, 삿포로 춥다더니 왜 이리 더워? 하고 불평도 하면서. 결국 도보로 20분 걸리는 길을 45분 만에 도착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길거리에서 회포를 풀기에는 너무 지쳐 역 근처에 있는 소바 집에서 일단 요기를 해야 했다.


삿포로 여행으로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그러니까 올해 초부터, 일본 여행에 대한 팁을 얻기 위해 관련 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찾아봤는데, 그중 하나가 정재형이 이적과 장우영과 같이 도쿄로 떠난 <요정투어>였다. 아내는 그 영상을 보고 오리국물 소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우연히 들른 동네 소바집에서 바로 오리국물 소바를 팔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고기 국물만 팔고 있었다. 메뉴판에 있는 그림에도 국수가 안 보였으니 주방에서 깜빡하고 빼먹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안 그래도 충분히 짜고 기름진 오리고기 국물을 국수 없이 들이켜는 건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 외에도 돼지고기 소바, 튀김정식 소바 모두 같이 나온 국물들이 모두 짰다. 그래도 나중에 나온 눅진하고 뜨거운 면수에 국물을 약간 섞어서 마시는 건 아주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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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튀김정식 소바, 돼지고기 소바, 오리고기 국물




일단 요기를 했으니 회포는 저녁 야키도리 집에서 천천히 풀기로 하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숙소로. 20분 도보 거리니까. 아까는 45분을 돌아왔으니까 이 정도야.. 하며 만만하게 생각했었는데,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휘청휘청 심상치가 않다. 이상하게 힘이 든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나중에 우리 트렁크를 끌고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을 때 알게 되었다. 아니 무슨 여기는 보행자도로가 이렇게 개판인가? 물론 자전거와 공유하는 일본의 보행자도로 스타일은 홋카이도에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이나 캐나다에 비해 훨씬 넓은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완전 오프로드인데? 무슨 이유인지 보도블록이 하염없이 들쑥날쑥한 것이 이대로 30분만 트렁크를 끌고 간다면 바퀴가 다 박살 나기 십상이겠다. 아마도 눈이 많이 오는 도시이다 보니까 염화칼슘 사용량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보도블록 아래의 지반이 침하된 걸 대충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근데, 이 정도 단차면 레이싱용 자전거는 포크가 망가지겠는데... 그래서 일본에는 마마차리 (탄소강프레임으로 만든 튼튼한 업라이트형 자전거. 주부들이 쇼핑할 때 많이 탄다고 마마차리라고 부른다)를 많이 타는 건가?


그래도 걷다 보니 집은 나오는구나. @HOME N23 민박의 미덕 중 하나는 걸어서 5분 거리에, 바로 길 하나 건너면 편의점이 있다는 거였다. 때문에 아침에 슬슬 걸어 나가 간단한 아침 거리를 사오기 참 편했다. (그리고 밤에 술 떨어지면 걸어 나가서 술을 사오기도 편했다... 죄송합니다. 메구미 상. 밤 11시부터 조용히 하기로 했었는데 ㅠㅠ)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저녁 시간 맞춰서 동네 야키토리 집으로 향했다. 문자 그대로 따지자면 야키토리라고 하면 닭고기구이를, 아무리 양보해도 닭꼬치를 일컫는 말이 되겠지만, 요즘 일본에서는, 특히 돼지고기를 사용한 꼬치가 많은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모든 꼬치구이 요리를 야키토리라고 한다고 한다. 일반 식당이나 이자카야의 메뉴판에도 양고기나 돼지고기 꼬치 역시 야키토리 섹션에 부담 없이 들어있었다. 이름을 붙이는 것에 유연한 성향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러니 모든 종류의 한국식 쌈 요리를 삼겹사루(サムギョプサル)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걸지도.


아무래도 집 근처에는 술집을 찾기 힘들었고 전철역 부근까지 가자 여러 가지 식당이 나왔는데 아무런 사전 검색 없이 그때 문을 연 곳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데이비드 보위의 <스타맨>. 오오오오오. 왠지 이 집. 나랑 취향이 맞는 것 같은데...


일본 문화를 보다 보면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는 것에 진심이라는 걸 종종 느낀다. 찻잔을 씻어내는 것 하나부터 형식을 따라야 하는 다도(茶道)는 물론이고, 유카타를 입는 법도, 사무실에서도 아침마다 체조로 시작한다든지.. 하는 어쩔 때는 뭘 또 저렇게까지.. 스러운 것도 많지만,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에 있어서는 이런 건 좀 캐나다도 도입을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자카야에서는 맥주를 항상 얼음처럼 차가운 컵과 마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맥주를 주문하면 반드시 새 잔, 그것도 냉장고에서 갓 꺼낸 (어쩔 때는 냉동고에서 꽁꽁 언 상태로 꺼낸) 잔에 따라 준다는 것. 물론 맥주의 종류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최적의 온도가 따로 있기에 캐나다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라거와 흑맥주를 다른 온도로 서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차가운 컵을 사용한다는 건 거품을 최대한 줄이면서 쫀득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기도 하고, 일단 저 차가운 잔에 마시는 생맥주는 컵을 잡는 순간부터 몇 곱절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일본인들에게 맥주를 마신다는 일은 꽁꽁 언 컵을 손에 잡는 것부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얼음처럼 차가운 잔에 마시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는 지난 시절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더할 나위 없는 윤활유가 되었다. 마시다 보니, 한 모금에 마시기에도 적당하고, 세 모금에 나누어 마시기에도 적당한 이 미디엄(中) 사이즈 맥주잔의 용량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졌는데, 주문한 요리가 나올 때마다 물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 방문했던 대부분의 식당이나 이자카야에서는 이상하게도 中 사이즈의 맥주만 취급을 했는데, 제각각 크기가 조금씩 달라서 마치 한국의 고깃집에서 1인분이라는 의미처럼 이곳에서의 맥주잔 용량도 어떤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생맥주잔 용량은 소(小): 약 200~300ml, 중(中): 약 350~500ml, 대(大): 약 700~1000ml라고 한다. 오늘 갔던 꼬치집의 맥주잔은 400ml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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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시간이 지나자 몇몇 단골로 보이는 손님들이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아예 카운터에 앉아서 주방장과 대화를 나누며 같이 술을 마시는 손님도 보였다. 특별한 식사 메뉴가 있는 집은 아니지만, 단골손님들의 취향에 맞게 요깃거리 정도는 마련해 주는 집 같았다. 사실 꼬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점은 없었다. 소금간만 해서 구운 것과 타래 (양념소스)를 묻혀서 구운 것이 있는데, 소금간만 한 양고기에서는 약간 특유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식 꼬치집에서는 쯔란 양념을 잔뜩 발라서 나오는 것이겠지.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차가운 맥주와 함께 먹다 보니 더 먹을 수도 있었는데... 아... 사실 식당이 환기가 너무 안되었다. 주문을 받고 나서 꼬치를 그때그때 즉석으로 구워주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주문을 하기만 하면 홀 안이 연기로 가득 차게 되어서 이건 마치 안갯속에서 맥주를 마시는 분위기가 되었다. 당연히 여행 중에 계속 입고 다녀야 할 옷에 냄새가 배는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래서 적당히 마시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러 캔맥주와 안주를 사 와 숙소에서 간단한 2차를 꾸려나갔다.



20250930_202520.jpg 숙소 앞 편의점의 주류 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