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정한 비데 (2025년 10월 7일)
어제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아침에 숙취가 남아있다. 그동안의 피로가 몸에 쌓인 걸까? 뭐 그렇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일주일 넘게 매일매일 마시는 건 30대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으니까. 그나마 친구들이 사다 준 홍삼즙 덕에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간기능은 홍삼즙의 효과라고 하더라도 장이 탈이 나지 않았냐고? 정로환이 힘을 써줘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일본의 화장실 덕을 본 게 없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따뜻한 비데의 덕을.
영화 <크로커다일 던디 2>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저 비데라는 물건이 나랑은 평생 인연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변기에 앉으면 엉덩이가 떠끄은해 오는 것이, 마치 "잘 잤어?"하고 다정한 인사를 걸어주는 것 같았다. 모든 숙소나 식당, 공중화장실마다 설치되어 있는 비데에는 물 세척의 수압 조절이 가능해서, 배탈이 나서 한나절에도 몇 번씩 화장실 신세를 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았었다. 사용하기 전까지는 공중 화장실의 비데라는 것이 과연 위생적으로 좋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지만, 한 번 쓰고 나니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따뜻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게다가 어차피 공중화장실을 사용한다는 것에는 남들이 앉았던 시트 위에 또 앉는다는 것이니 이런 종류의 위생에 대한 염려에는 어느 정도 절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하코다테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 7시에 식당에 가서 일단 에너지를 또 풀충전한다. 카이센차즈케 (해산물과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 대신 해산물을 듬뿍 넣어 카이센동을 만들어 먹고, 돈지루와 라면으로 일본식 아침을 일단 두 세트 한 다음 계란 베이컨 소시지를 넣은 서양식 아침으로 마무리를 한다. 아무리 뷔페라고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는가.. 하는 현타가 가끔 왔지만, 맛이 있어서 먹는다는 순수한 욕망의 지당한 주장에 번번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오늘도 온몸에 음식냄새가 배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마지막 짐을 싸기 전에 일단 온천부터.
대욕장으로 올라가 보니 오전에는 남녀탕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음양의 조화 때문에 이렇게 욕탕을 번갈아 쓰는 온천이 있다더니 여기서 보게 되네. 헛헛헛. 그리고 탈의실 쪽으로 갔더니... 엥.. 여긴 이렇게 통창으로 뻐엉 뚫려 있네. 아무리 건물 최상층에 목욕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특히 실내조명이 밝은 밤에는 밖에서 다 보였을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유리창의 아래쪽은 시트지를 발라서 간유리처럼 되어있다. 허리 아래쪽은 가려주겠다는 의미인가? 생각해 보면 80년대 일본 잡지나 소년만화 등에서도 남녀불문하고 가슴노출은 종종 등장했었던 것 같다. 그 만화를 돌려가며 읽는 아이들 사이에는 '일본에서는 가슴 노출을 성(性)적인 금기로 삼지 않는다'라는 루머까지 돌기도 했었다. 쿠도칸구로의 최신작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를 보면 TV에서 여성의 가슴노출이 나오는 게 보고 싶어서 80년대에 머물고 싶어 하는 미래소년이 등장하는데 1980년대와 현재의 일본 대중매체에서 성에 대한 표현 차이는 단지 내 기억의 조작이 아니었던 듯싶다.
한 때 페미니즘 운동의 의제 중 하나가 토플레스나 노브라 운동이었기도 하니까, 여성의 상체노출에 대한 관대함을 굳이 전근대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렇다고, 대중매체 내에서 여성의 몸을 노출하는 것이 (상업적인 의도 전혀 없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만을 위한 거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분명한 건, 성(性)문화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이 수십 년 동안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개방성 + 독일과 서유럽에 영향받았던 시대에서부터, 유혈낭자 폭력보다 섹스에 더 엄격한 미국 대중문화의 잣대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하코다테에는 JR 도야 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예정. 이번에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교통편 없이 우리가 알아서 찾아갈 차례다. 아직 몇 시 기차를 탈 것인지는 안 정한 상태. 이번 여행에서 신세 진 다른 숙박업소와는 달리 이곳 노노카제 리조트는 체크아웃 시간이 11시였고, 그 시간에 맞춰 호텔 체크아웃을 한 다음 짐을 맡기고 나서 느긋하게 동네 산책을 하자 싶었다. 먼저 숙소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버스 시간표를 알아봤다. 11시 55분 버스 다음이 13시 25분이었는데 이 시간표로만 봐서는 마치 이 버스가 삿포로역 방면인 것처럼 쓰여있었다. 이때 나는 위 사진의 호텔에서 나눠준 시간표를 못 본 상태여서 잔뜩 조바심을 낸 채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내를 채근했다. 마침 정류장 앞 가게가 막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빗자루로 가게 앞을 청소하던 여성에게 스미마셍~ 하며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1. 활짝 웃으며 '아'라는 한 마디로 자신이 우리를 인식했다는 걸 보여주더니
2.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며 뒤돌아서 빗자루를 가게 입간판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3. 다시 다가와 우리의 질문을 귀 기울여 들은 후 (적어도 그런 자세를 보인 후)
4.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JR 도야 역에 간다고 말해주더니
5. 다시 빗자루를 집어 들고 앞마당 청소를 이어갔다.
우와아아아아. 이런다고?
이게 수많은 서양인들이 깜짝 놀라 칭송하던 일본인의 친절함인 것인가?
뭘 또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길안내를 해주는 것인가, 참 나.
그렇게 황송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려는데 삿포로 역으로 가는 버스와 JR 도야 역으로 가는 버스 구분을 어떻게 하는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그래서 미안함을 무릅쓰고 다시 물어봤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아' 하는 한마디로 시작해서
1~3번 반복 후에
4. 같이 버스 정류장 시간표를 읽고 나서
5. 11시 55분 버스를 타서 JR 도야 역에 내리면 하코다테까지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고 확인해주고 나서는
6.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 입간판 앞에 있던 빗자루를 집고 가게 앞을 다시 쓸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까, "너희들의 질문 하나하나가 날 얼마나 번거롭게 하는지 잘 지켜봐라.."라는 식의 교토화법이 아닌가 살짝 걱정되었지만, 일단 친절은 곧이곧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게 낫다 싶었다. 적어도 어디론가 끌려가 장기가 털릴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여행지에서는.
도야호 온천마을은... 말 그대로 도야호와 온천 리조트 호텔들을 빼고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있다. 근처에 공원도 있고 좀 더 가면 골프장도 있고.. 여기저기 건물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살아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마을 전체가 도야호 온천 리조트 관광사업에 100% 올인한 것처럼 보였다. 단적인 예로 도로포장 자체도 도야호 호숫가 앞 길과 마을로 가는 길과 전혀 달랐다. 도야호 및 호텔 단지들 주변은 각종 예술품에 맨발 걷기 길 등 여러 가지 관광코스가 있었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곳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길 건너 마을 시내로 들어가면 각종 식당 들이나 관광상품 파는 곳도 있었던 것 같은데,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도 모두 개장 전이어서 마을의 썰렁함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단지 호수 앞 오리배 대여, 혹은 유람선 들만 북적이고 있어서, 온천 리조트 외 다른 경제구조가 버티기에는 악순환만 계속되는 걸로 보였다. 어쩌면 도야호 온천마을뿐만 아니라, 관광 리조트 산업을 도입하는 전 세계의 소도시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의미 없는 걱정에 잠시 빠졌다가...
썰렁한 광경을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서글퍼져서 그냥 일찍 마을을 떠야겠다 싶었다. 호텔에서 짐을 찾으면서 역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이 정도 크기의 짐을 들고 탈 수 있을지 문의했는데, 버스에 짐 싣는 곳이 있다고, 충분히 탈 수 있다고 단언한다. 왜 저런 단호한 대답은 전혀 신뢰가 안 가는 걸까? 여기서 살고 일하는 저들이 과연 70리터짜리 배낭을 들고 시내버스를 탄 적이 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 때문인가? 아니면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 가르쳐줘서 결국 낭패를 보게 만드는 캐네디언들의 요상한 친절을 하도 많이 겪어서 생긴 방어기제인가? 어쨌든 11시 55분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고 기다려 본다. 못 타면 우버 부르면 되겠지.
호텔 프런트의 말 대로 버스에 짐을 싣는 곳은 있었지만, 손바닥만 한 크기로 이미 다 차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고, 이걸 다리 앞에 둬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기엔 버스 의자 간의 간격이 무척 좁아서 무릎이 이미 앞 좌석에 닿고 있었다. 아놔. 이것이 수많은 서양인들이 깜짝 놀라 불평하던 좁아터진 일본인 것인가? 결국 다른 의자에 짐을 올려둔 채 가게 되었다. 아직은 좌석이 널럴한 상태. 뭐, 사람들이 많이 타게 되면 짐을 내 다리 위에 올려두면 되겠지. 사또 앞에서 주리가 틀리는 고통이겠지만.
다른 리조트를 한번 더 들른 버스는 관광객들을 더 태웠지만 여전히 많은 좌석들을 남긴 채 역으로 향했다. 중간에 마을회관이나 학교도 지나쳤지만 이 동네에서 낮 12시에 이 버스를 탈 사람은 관광객 밖에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도야호 온천마을을 천천히 유람하고 나서 우릴 역에 내려주었다 (그 와중에 동전을 잘 구분 못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거스름돈을 직접 계산해서 돌려주신 친절한 버스 기사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