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라멘?

(부록) 일본 라면에 대해서

by 그래도 캠핑

예전에 누군가와 일본 라면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그건 라면이 아니라 라멘이죠. 두 개가 다른 거 아닌가요?라는 퉁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그건 마치 카레가 아니라 커리죠.. 라는 광고문구 같구려,라고 유치한 반박을 하고 말았지만, 사실 라면과 라멘을 구분 지으려는 건 너무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심정은 여전합니다. 만일 국적을 바탕으로, 혹은 조리방식을 바탕으로 구분하려고 한다면, 닛신에서 만들어 일본 시장에 깔려있는 일본산 인스턴트 라면은 라멘인가요, 라면인가요? 또는, 인스턴트 라면을 바탕으로 계란 등 각종 토핑을 얹어 한국 분식집에서 제공하는 라면은 라멘인가요, 라면인가요? 심지어 라면은 원조는 일본인가요, 중국인가요? 말하자면 국적이나 원조, 음식 제조, 서빙 방식 등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는 이 음식의 정체성을 달랑 이름으로 구분한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니 누가 라면이라고 하든 라멘이라고 하든 이해심을 십분 발휘해서 전체 맥락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일본인들이 주로 먹는 무절임을 다꾸앙이라고 안 하고 단무지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앞으로의 홋카이도 여행기에서는 라면을 먹는 상황이 여러 번 등장할 예정이기에, 따로 부록을 만들어 사전설명을 깔아 두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 (주로 만화책에서 얻은) 어쭙잖은 지식 자랑으로 지면(?)을 낭비하려 합니다. 귀가 아프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원조집 논쟁과 같은 몇몇 역사 기록들은 아직 논쟁 중인 것도 있다는 걸 미리 밝힙니다. 이 글은 단지 앞으로 연재할 홋카이도 여행기를 읽으시는데 참고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였고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데, 많은 부분이 쿠베로쿠로의 만화 <라면요리왕> 시리즈에서, 그리고 심야식당 엔스키친 님의 블로그, 일신 님의 블로그에서 발췌되었다는 것도 미리 밝힙니다.

















1. 라면의 시작


라면을 한자로 쓰면 拉面. 한국식으로 읽자면 '납면'이 되겠지만 ('납치'의 그 납자가 맞습니다. '잡아당기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라면이라고 몇 십 년간 읽어온 걸로 봐서는 아마 중국식 발음인 '라미옌'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로 보입니다. 당연히 일본에서 말하는 '라멘'도 '라미옌'에서 파생되었다고 봐도 되겠죠. 한자 그대로의 의미는 '수타국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7세기에 명에서 망명한 유학자가 일본 미토번에 초대받았을 때 헌상한 선물 중에 수타국수 제조 도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로 당신들이 만들어 먹으시오.. 뭐 이런 뜻은 아니었을 테니, 당신 미토번주였던 토쿠가와 미츠쿠니가 일본 최초로 라면을 먹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tempImage8mmKtr.heic 밴쿠버, 라멘 단보 Ramen Danbo, 클래식 라멘



하지만 이걸 가지고 원조를 따지기는 좀 그렇고 서민들에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를 봐야 할 텐데, 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 메이지 시대 개항한 도시에서 시작한 중국식 면요리, '난킹소바'를 그 원조로 보고 있습니다. 닭 육수에 소금으로 간을 한 시오 라멘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다가 1910년에 도쿄 아사쿠사의 '라이라이켄'에서 이 중국식 면요리에 간장 베이스의 일본식 소스를 적용해 '시나소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이때를 라면원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중국식 국수요리는 이후, '중화소바 (츄카소바)'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패전 후 경제불황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포장마차 (屋台 야타이) 라면 개업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라면 흥행을 이어나가게 되었다고 해요. '라멘'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건 1958년 닛신에서 만들어 판매한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부터라고 합니다 (1920년대 삿포로의 중식당에서 '라멘'이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코다테 아지노이치방 (味の一番) 미역 시오 라멘





2. 폭발적인 성장


이렇게 간토지역 중심으로 간장 베이스의 소유 라멘과 함께 성장한 일본 라면은 1950년대 까지 각 지역에 따라서 일본 된장 (미소)을 바탕으로 맛을 내는 삿포로 미소 라멘, 소금을 바탕으로 맛을 내는 하코다테의 시오 라멘, 돼지뼈로 국물을 내는 큐슈 후쿠오카 지역의 돈코츠 라멘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1970 ~ 80년 대 경제 성장기에는 라멘이 남성 노동자들의 단골 점심메뉴로 성장하면서 지역마다 좀 더 다양한 라면이 소개되었는데요. 여기에 최초로 유행을 만든 라면집 이름을 따라서 "~케(계열)"라는 용어가 차용되기도 했습니다. 손님의 선택에 따라 면의 익힘 정도, 차슈의 기름 정도를 다르게 만드는 걸 처음 도입한 요코하마 '요시무라야' 계열의 '이에케 (家系) 라멘', 기름기가 많은 간장 베이스 국물에 굵은 면발과 마늘, 숙주 / 파 토핑을 산처럼 쌓아주는 도쿄 '라멘지로' 계열의 '지로케 (二郎系) 라멘', 동물성 육수와 어패계 육수를 섞어서 이른바 더블 수프를 제공하는 나가노 '추카소바 아오바' 계열의 '아오바케 (青葉系) 라멘' 등럼 말이죠.



하코다테 라멘야 아지사이 (函館麺厨房 あじさい) 시오 라멘




2. 돈코츠 라멘


영화 <담뽀뽀>에서 나오듯이, 전통적인 라면 육수는 닭뼈와 닭머리를 베이스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후쿠오카 현 구루메 시에서 시작한 돼지등뼈 육수 라면 (돈코츠 라멘)은 1953년 구루메 시의 '타이호 라멘'에서 간장 소스 베이스로 본격적으로 판매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돈코츠 육수의 라면은 미소 소스나 시오 (소금) 소스를 넣어 응용되었고, 한국으로 말하자면 동네 중국집 짜장면과 같았던 일본 라면의 지위를,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맛집요리의 하나로 격상시키게 됩니다. 현재 돈코츠 라멘은 누가 뭐라 해도 일본 라면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전 세계에 일본 라면을 명품요리의 하나로서 알리는 것에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새 끓인 뽀얀 돈코츠 육수의 농후한 풍미, 하얗고 가는 국수, 그리고 면 추가 (替え玉 카에다마)라는 후쿠오카 돈코츠 라멘의 특징은 요즘 유행인 일본라면의 전형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80년대 경제호황시기에는 돈코츠 라멘으로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든 기업도 나오고 했답니다.



밴쿠버, 라멘야 호린 (鳳凛) 돈코츠 라멘 (라멘야 호린에 대해선 사쿠라 블로그를 참조하세요 https://sakurablog.tistory.com/38)




3. 뉴웨이브 라멘


1990년대 버블이 깨지면서 일본의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로 전환되듯이 일본 라면은 대대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마치 IMF 시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뛰어들었던 한국에서 후라이드 치킨 사업이 혁명적인 발전을 했던 것과 비슷한 연유로 생각됩니다. 다른 요식업에 비해서 라면집을 개업하는 것이 비교적 소규모 자본과 간단한 기술, 짧은 훈련기간으로 가능했기 때문이죠. 일본의 라면업계는 엄청난 경쟁 속에서 새로운 라면문화를 만들게 되었고, 바로 라면 역시 근사한 일품요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유로운 발상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가 진행되었습니다. 엄격한 재료선정부터 시작해서 돈코츠를 벗어나 어패류를 베이스로 국물을 내거나, 동물계와 어패류 두 가지 이상의 소스로 복잡한 맛을 내기도 하고, 향미유의 역할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만화 <라면요리왕>에서는 간수 없이 밀가루와 소금만 가지고 국수를 만들고는 "이걸 라면이라고 부른다면 라면이 되는 시대"라고 뉴웨이브 라멘을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뉴웨이브 라멘이라고 불린 라면가게들은 그동안 지저분한 카운터에 모여 앉아 먹는 남성적 음식이라는 라면가게 이미지를 깨고 산뜻한 다이닝홀 개념을 도입해서 본격적으로 여성 직장인 고객을 식당에 유입하거나 가족외식의 장소로 만든 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나 실험적인 요리법에 비해 고객들의 저조한 식사만족도 때문에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돈코츠 라멘이나 지로케 라멘에 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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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ImageiiB26n.heic 그림은 오른쪽부터 보세요. Kube Rokuro, Kawai Tan, ラーメン発見伝, 2009, Shogakukan



요이치, 본보리 雪洞 ぼんぼり 청어육수 시오 라멘




4. 일본 라면의 종류


한국식 탕요리나 국수요리의 전통적 제조방식과 달리, 일본 라면은 육수와 별도로 소스 (타레 垂れ)가 존재하고, 이 둘을 섞은 후 국수 및 토핑을 넣어 만들어집니다. 육수를 계속 끓이고 있으면 점점 졸아들기 때문이라고 만화 <라면요리왕>에서 설명이 나오긴 하던데, 한국의 곰탕 전문집이나 잔치국수 전문점 들도 이렇게 하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보통 일본의 4대 라멘이라고 하면 미소(된장) 라멘, 소유(간장) 라멘, 시오(소금) 라멘, 돈코츠 라멘을 꼽는데, 이런 분류가 이상하다는 거죠. 미소, 소유, 시오는 모두 소스의 종류가 되고 돈코츠는 육수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돈코츠 미소, 돈코츠 소유 라멘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밴쿠버에 있는 유명한 돈코츠 라멘 가게에 가더라도 미소와 소유, 시오 모두 따로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기준으로 일본 라면을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소스 베이스로 분류 : 소유 라멘 (간장소스), 미소 라멘 (된장소스), 시오 라멘 (소금소스), 기타 (땅콩소스, 카레 등)

육수 베이스로 분류 : 돈코츠 (돼지뼈), 토리가라 (닭뼈), 쿄카이 (어패류)

육수의 형태에 따라서 분류 : 백탕 (돈코츠, 닭가슴살 등), 청탕 (닭뼈, 어패류), 아부라소바 (육수 없이 소스로만 먹는 것), 츠케맨 (간장 베이스의 진한 육수 / 소스에 찍어 먹는 것)

토핑에 따라서 분류 : 차슈맨, 완탕맨 등




히가시 무로란, 도미인 (Dormy Inn), 카레 라멘



이제까지 귀 따가운 이야기를 들어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지난 홋카이도 여행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 표지의 사진은 삿포로 '라멘야 케야키 (けやき)'의 콘버터 미소 라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