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사무라이의 도시

라스트 사무라이는 톰 크루즈가 아니었다 (2025년 10월 8일)

by 그래도 캠핑


상공에서 본 고료가쿠. (출처 : 하코다테 관광 공식 사이트 hakodate.travel)
출처 : Noda Satoru, 2022, ゴールデンカムイ, 株式会社集英社






'고료가쿠 (五稜郭)'는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봤을 때 오각 뿔 모양의 성으로 1854년 개항 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서양식 스타일을 도입해서 만든 일본 최초의 근대 요새다. 하지만 그보다 보신 전쟁 (戊辰戦争 무진년에 발생한 내전) 당시 막부 최후의 항전이 이루어졌고, 실제 농성전 당시 포사격 등에 무척 취약했던 점 탓에 일본사에서 막부 시대를 종결지은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막부 (幕府 바쿠후)'에 대해서 생소한 분들을 위해 잠깐 덧붙이자면,


첫째, 일본의 중세시대는 중앙집권 왕정이었던 조선이나 명나라, 청나라와는 달리 오랫동안 봉건제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각 지방마다 호족이 있었고, '번 (藩)'이라고 불리는 영지를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다이묘 (大名)'라는 영주가 있었다. 이들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조선시대 고을원님과는 달리 자신들의 영지를 대대손손 세습해서 관리하는 사람들로, 사실 농사짓는 기층 민중들이 머리 조아리고, 세금 바치고, 생사여탈이 달려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주거이동의 자유마저 제한이 되어 있어서, 허락 없이 다른 번으로 이사를 갈 경우 범죄자가 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둘째, 교토에 있는 '덴노 (天皇)'라고 하는 왕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대신해서 일본 전체의 행정과 군사, 외교를 맡았던 '쇼군 (将軍)'이 있었는데, 이 쇼군이 주관하던 정치조직이 바로 '막부 (幕府 바쿠후)'가 되겠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야전사령부' 정도 될 텐데, 당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수많은 내전을 극복하면서 조성된 구조였기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처럼 문관과 무관으로 구분되지 않았고 무사가 곧바로 행정까지 맡는 형태였던 것이다. 쇼군의 정식명칭 역시 '정이대장군 (征夷大将軍 -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라는 명칭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 행정부나 고려말기의 최 씨 무신정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가끔 말 안 듣고 뻗대는 다이묘들을 찍은 후 덴노의 허락하에 다른 번들과 힘을 합쳐 다구리를 놓는 일도 한다. 그러고 보니 판도라 행성의 '토루크막토'랑 같다고 봐야겠네.


셋째, 다른 모든 중세국가와 같이 일본의 막부 시스템도 권력의 부침을 겪으며 쇼군과 거점지가 바뀌어 왔는데 (그리고 그 거점지의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 막부 (鎌倉幕府)', '무로마치 막부 (室町幕府)'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마지막 막부이자 에도 (江戶 도쿄)에 거점을 둔 '에도 막부 (江戶幕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통제하면서 200년간 평화를 이어온 막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막부말기,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흑선을 끌고 개항을 요구하던 사건이 있었다 (黒船事件 쿠로후네 사건 1853). 소심한 저항을 해보긴 했어도 이미 막부로서는 당시 일본의 기술력이나 군사력으로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바로 몇 해전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을 자랑하던 청나라가 1차 아편전쟁 (1839)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던 사실도 있었고, 개항 전후로 발생한 소소한 충돌의 결과 탈탈 털렸던 현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 스스로 세계의 짱이라고 생각했던 덴노는 개항을 꾸준히 반대했고, 결국 막부는 덴노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임의로 미일 화친조약 (1854)과 수호조약 (1858)을 맺은 후 하코다테 포함 총 8개 도시를 개방해서 외국인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200여 년의 평화를 거치면서 막부에겐 예전만큼 군사력을 통한 지방 통제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개항 때문에 덴노는 덴노대로 빡쳐있었고, 쵸슈 번 등의 지방 호족들은 이 때다 싶어서 막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데 이 운동을 '존황양이 (尊皇攘夷 천황을 보필하며 외국세력을 몰아낸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그저 명분일 뿐, 지방 다이묘들은 이걸 빌미로 막부를 쓰러뜨리거나 최소한 자기가 왕실과 연을 맺어서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단적인 증거로, 지방 호족들 역시 서양세력에 대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곧 깨닫게 되면서 '양이 攘夷'라는 구호는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사라지고, 국면은 '아이즈 번(会津藩)'이나 '나가오카 번 (長岡藩)' 등의 '좌막 (佐幕 막부를 지지)'세력과 '쵸슈 번 (長州藩)'이나 '사쓰마 번 (薩摩藩)'등의 '도막 (倒幕 막부를 전복)' 세력의 대결로 전환되었던 것. 그리고 여기에 서구사회를 목격한 후 일본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이 도막 세력과 결합하면서 막부를 둘러싼 내전은 구시대를 종결짓는 혁명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암살과, 방화, 모략과 협박, 밀실 합의 그리고 본격적인 내전 (보신전쟁 1868~1869)을 거쳐가면서 에도 막부와 좌막 세력들은 점차적으로 힘을 잃었고, 결국 홋카이도로 패퇴하면서 하코다테 고료가쿠 성에서 '에조 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하며 농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신 정부군의 군사력에 밀려 3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이후 일본은 봉건영지인 '번' 시스템과 무사계급 등의 신분제를 폐지하는 등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1868~), 동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헌법 시스템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 유학파나 이상주의자들이 꿈꾸던 공화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민중들 입장에서는 다이묘 봉건영주 대신 윗대가리만 바뀌는, 국민들의 충성심을 중앙권력에 집중시키기 위해 덴노를 신격화하는 교육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의무교육과 국민개병주의를 통해 군대를 성장시켜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경쟁하는 입헌군주제 제국주의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보니 다카키 마사오의 영구집권을 위해 일으킨 10월 유신이 어디서 이름을 빌려왔는지 잘 알겠다).


똑같이 외세의 침략이 견인한 중세시대의 종말을 겪게 되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그 시기가 대중적인 인기가 별로 없는 것에 반해 일본에서는 그 당시 정국을 주도해던 인물이 여전히 최고의 역사 속 인물 순위에 계속 오르는 등, 막부말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아직도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1위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는 전쟁 영웅이 아니지만,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해서 막부의 권력을 덴노에게 넘기는 '대정봉환 (大政奉還)'을 계획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세계정세를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서 일본의 근대화를 꿈꾸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후 산업개혁을 통해 군사력을 정비한 일본은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투를 승리로 마치면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누리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이 시대의 인물들을 좋아하는 건 과거 제국주의 패권에 대한 향수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카모토 료마나 '가츠가이슈 (勝海舟)' 등 낡은 막부 시스템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꿈꿨던 사람들에 대한 인기는 이해가 가더라도, '히지타카 토시조 (土方歳三)'와 같은 막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신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까지 여전히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고료카쿠에는 히시타카 토시조의 동상뿐 아니라, 당시 반란을 진압했던 신정부군 지휘관들과 같이 곳곳에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대립하는 두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존경을 받은 건 삼국시대 계백과 김유신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일본인들은 21세기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당시 세력들의 권력투쟁에 희생된 민초들에 대한 관심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아무리 봐도 뻔한 권력욕의 발현인데도 그걸 국민과 국가를 위한 충의로 이해하려 한다. 이는 어쩌면, 20세기 초 열강세력에 진입하려고 한 일본에서 국민징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 모든 인물들의 - 특히 충성을 다해 싸우다 죽은 무장군인들의 행적을 미화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충성심이 되었든 사리사욕이 되었든 권력욕이 되었든, 뭔가 한 가지 이해할 수 있는 기준만 가지고 있다면 딱히 선과 악은 관계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입장은 이해하겠다. 그러니 내가 널 죽이는 것도 이해하겠지?). 일본 신화에서는 창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세상을 만들기 전에 우주는 혼돈으로 가득 차있었던 걸로 표현되는데, 일본 사회에 있어서 극한의 공포는 혼돈일 뿐이지 전쟁이든 살육이든 그게 어떤 기준하에 저질러진다면 상황에 따라 적군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곧 루스 베네딕트의 오래전 분석처럼, 개인의 신념이나 이념보다는, 타인에게 보이는 성실성이나 명예를 더 중요시하려 하는 국민성, 바로 직전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가도 전쟁포로가 되어서는 포로수용소의 규율을 잘 지키려 하는 그런, 서구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이중적인 성향으로 드러난다. 여하튼, 고료가쿠에서 마지막 막부군에 대한 찬양은 보는 내내 무척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서울 올림픽을 즈음해 한국 사회가 해외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조금씩 인권에 대한 감수성도 높아지고,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다니게 되고, 이후 영화나 음반에 대한 검열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덕분에, 나아가서 12,12 군사반란 덕분에 한국인의 인권이 향상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전두환의 동상을 세우자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 있겠지만.


아니면 단지 비장한 죽음에 대한 찬미인가? 혹은 과장되어 전해진 무술 실력에 대한 찬양? 마치 미국 서부시대 악당인 '빌리 더 키드'나 '제시 제임스'와 같은 악당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지는 서부영화들처럼? (그것도 아니면 단지 잘 생겨서?) 아놔 참말러, 이렇게까지 특정 인물을 신격화하고 인생사를 짜깁기해서 스토리를 만들고, 그걸 최대한 상업화하는 걸 보면서 넌더리가 나는구나.










우정 전차를 타고 고료가쿠까지 찾아오게 된 건 사실 만화 <골든 카무이>에서 최종 결전장소였던 장소를 방문하고자 했던 단순한 욕심이었지만, 막상 왔더니 그냥 야트막한 산성을 구경하는 것과 같았다. 바로 옆에 있는 전망대 타워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상공에서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굳이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히지타카 토시조와 신센구미를 영웅화 한 캐릭터 상품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있는 1층 매장에서부터 빈정이 상한 이유도 있었다.


고료가쿠 성곽을 돌며 산책을 하다가 하코다테 봉행소 (奉行所) 근처로 내려올 무렵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거센 빗줄기가 퍼붓는다. 마침 2만 보 걷기로 한 날이라 통기가 잘 되는 신발을 신고 왔는데 헛헛헛. 군사반란을 찬미하는 관광지에 심통이 난 걸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에 얼른 처마 안으로 숨었다. 후덥찌근한 날씨가 계속 꾸물꾸물거리더니 결국 이렇게 쏟아지는구나. 그나저나 하코다테 봉행소에 입장을 하는 데에도 돈을 내야 했었네. 원래 홋카이도 남부는 오랫동안 '마츠마에 (松前)'라는 가문의 영지였지만 1855년 개항 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는 이유로 막부가 직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군수를 파견해서 지방행정이나 외교 관련 업무 같은 걸 보았던 것. 뭐 아무리 역사적 가치가 있고 역사적인 건축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건물을 돈까지 내가면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서 신발 벗는지 안 벗는지 감시하는 사람도 있고 ㅎㅎ).



하코다테 봉행소 실내 (출처 : 하코다테 관광 공식 사이트 hakodate.travel)


고료가쿠 후문 다리 (우라몬바시)


고료가쿠 성곽 능보에서 보는 전망대 타워. 그리고 히지타카 토시조와 오오토리 케이스케 (동학운동 당시 고종에게 농민들을 진압하라고 협박했던 그 오오토리 공사가 맞다) 사진




고료가쿠 밖으로 나왔더니, 아 여기가 하코다테의 광화문 - 종로구나 싶었다. 교통도 복잡하고 각종 쇼핑몰과 유흥시설이 즐비하다. 하긴 성곽의 역할보다는 하코다테 봉행소로서 행정관청의 역할을 더 오랫동안 해왔을 테니까. 어젯밤 갔었던 멘츄보 아지사이 (麺厨房 あじさい)의 본점도 고료가쿠 바로 옆에 있다. 3시가 막 넘은 애매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구나. 복잡한 마음을 안고 숙소 근처로 돌아가기로 한다. 차가운 맥주라도 들이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료가쿠 주변 지도











역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 '쿄산코 (大衆居酒屋魚さんこ)에 갔는데 이미 예약이 다 되어있다고 만석이라고 한다. 네시에 오픈한다고 해서 시간 맞춰 왔는데... 여긴 정말 무슨 동네 술집도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보니 매니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와서 뭐라고 한참 설명하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구글 번역도 갤럭시 통역도 파파고도 소용없었다. 아이고.. 은혜롭게도 마침 같이 줄 서서 기다리던 일행 중 한국어를 하는 분이 계셔서 우리에게 통역을 해주는데, 바로 옆 골목 자매점에 자리가 남았으니 원한다면 그곳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ㅎㅎㅎㅎㅎ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 맥주가 고팠기에 졸래졸래 따라가 본다.


바로 모퉁이 하나를 돌아 찾아갔던 '후사야 (ふさや 大門店)' 역시 사람이 가득했고 카운터 석만 두 자리 남아있었다. 그 옆에는 딱 봐도 출장 온 회사원으로 보이는 (유튜버 마츠다 부장의 차림새를 한 타케나카 나오토 배우처럼 보이는) 아저씨 한 명과 퇴근 후 이자카야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려는 걸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 이런다고? 이렇게 되면 다른 곳에 간다고 해서 (예약이 없는 이상) 역시 테이블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 초라한 저희를 받아주셔서 황송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좌석에 앉았다. 물론 생맥주 두 잔을 외치면서. 와글와글 소란스러운 분위기인 데다가 서빙을 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무척 작아서 의사소통이 무척 힘들었음에도, 꽁꽁 언 글라스에 가득 찬 살얼음 생맥주는 감탄사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크으으으으. 이거지... 그러면서 메뉴판을 천천히 보는데... 어라? 멍게가 있네?


중국계 아시안 인구가 많아서 다른 북미 도시에 비해 월등하게 다양한 해산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밴쿠버라고 할지라도 멍게, 해삼, 미더덕을 먹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가끔 한국 슈퍼에서 하는 특별전 행사를 할 때나 한국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온 걸 현지 가격보다 몇십 배를 주고 사 먹었는데,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에이 뭐. 멍게 안 먹는다고 죽나?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팔천킬로 하늘에 기름 뿌려가며 날라 온 걸 먹어.. 뭐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한국에 안 갔는데도 멍게가 있네. 홋홋홋. 당장 먹어야지요, 그럼.



멍게 회와 오코노미야키




멍게를 받고 나니 왠지 심각한 의문에 빠졌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멍게를 먹을 때는 저기 빨간 부분을 오돌오돌 씹으면서 육즙을 쪽쪽 빨아먹었던 것 같은데, 접시에 담아둔 폼새가 이건 왠지 장식용이라고 붙여 놓은 것 같이, 먹으라고 낸 걸로 보기엔 너무 잘게 썰어 쌓아 두었다. 일단 한 잔을 마시고 나서, 파파고에 번역을 한 문장을 외워둔다. 그리고 종업원 아주머니가 지나가자 붙들어서 더듬더듬 일본어로 물어보았다. 이 빨간 것도 먹는 거냐고. 그러자 그때까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던 분이, 그나마 일본어도 소곤소곤 말씀하시던 분이,



노우!!



느닷없이 명쾌한 답변을 주셨다. 아줌마 영어 잘하시네요.


그 사태를 보고, 그제껏 언어장애가 있는 중년의 관광객 커플을 훔쳐보고만 있던 옆자리 (타케나카 나오토) 아저씨가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헛헛헛. 그나마 이렇게 큰 웃음 드려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옆자리 아저씨에게 종업원이 양푼을 들고 가 뭔가를 보여준다. 헐. 오징어네. 그것도 말쑥하게 생겨서는 살려고 버둥치는 오징어. 싱긋 웃는 아저씨의 표정에서 긍정의 의미가 전달되었는지 오징어 외계인은 스뎅 양푼 우주선을 타고 돌아간다. 나는 저 외계인의 미래를 알고 있다. 조각조각 내어져 접시에 담겨 나오겠지. 그리고 그의 친구 역시 나에게 먹히게 될 터이다. (그날을 회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취기가 올라오는...) 아니나 다를까, 한국의 산낙지처럼 접시 위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회조각들이 아저씨에게 배달되었고, 그걸 유심히 바라보는 관광객 부부에게 아저씨가 한 입을 권했을 때 부부는 웃으며 사양했으나 그들의 시선은 오징어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잠시 후 또 다른 오징어가 스뎅 양푼을 타고 부부에게 보였다


결국 먹게 된 살오징어 (するめいか) 회. 눈은 제발 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입은 있었다. 아주 야무지게 다문 상태로




아웅... 왜 이리 먹을 걸 보여주는 거야. 밴쿠버에서도 해산물 식당에 가면 곧 요리가 되어 나오게 될 랍스터나 게의 최후의 모습을 손님 테이블에 들고 가서 보여주는데, 나처럼 남이 대신 죽여준 동물만 먹는 비겁한 사람은 그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얼마나 신선한지 자랑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곧 생명을 끊을 식재료를 보여줌으로써 죄책감을 나눠 가지라고 그러는 건가? 나도 모르게 오징어를 보면서 "미안하다. 내가 널 먹을 거다"라고 뇌까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옆자리 아저씨가 웃음이 또 한 번 터지더니 숨을 제대로 못 쉰다. 앗싸. 2안타.


그러더니 아내에게 "남편분이 무척 자상하시네요 (ご主人さんはとても優しいですね)"라며 덕담을 건네는데, 호칭에 대해서 까탈스럽게 구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도 남편을 '주인 主人'이라고 칭하는 일본식 표현은 여전히 어색하다. 하지만 나름 존칭을 쓴 걸로 이해하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나서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제지 회사에 근무하시는 사카이 상은 예상대로 출장을 온 거라고 했다. 과일이나 해산물 보관용 종이박스를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인데 시장 수요 점검 차 하코다테에 온 거라고. 마침 아오모리 지사에 있는 직원도 같이 출장 와 있어서, 그 동료와 나중에 이 이자카야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단다. (캐나다도 제지 산업이 발달했다가 트럼프 때문에 죽어간다고 했더니 또 빵 터짐) 밴쿠버에서 왔다고 하니 예전에 신혼여행을 밴쿠버와 캐네디언 록키로 왔었다고 한다.


이어서 서로 사는 이야기, 국제 정세 이야기, 하코다테와 삿포로 이야기 등을 파파고 통역을 통해 나누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처음 본 관광객과 전화기를 통해 통역을 받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척 귀찮았을 텐데도 사카이 상은 참을성 있게 우리를 상대해 주었다. 저 정도로 인간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수양을 쌓아야 하는 걸까? 정말 부럽고 존경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릴 적에 혼자서 그렇게 여행 (이라고 쓰고 방랑이라고 읽는)을 많이 다녔을 때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트는 일을 아주 질색했었는데, 사교성 쩌는 아내와 같이 다니니까 나한테도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취기를 빌어서 물어보았다. 고료가쿠 성을 점거했던 좌막파와 신센구미 잔당들은 누가 뭐래도 군사 반란을 일으킨 건데, 일본 사회에서는 어째서 아직도 동상을 세우고 추앙을 할 수 있는지. 전화기에 번역된 글을 읽던 사카이 상은 깜짝 놀라더니 술이 후다닥 깬 얼굴로 한참 고민하게 되었다. 그 얼굴은 오전에 커피 로스터리 마스터가 괜찮은 식당 추천을 고민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나라를 대표해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답변을 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의 얼굴. 예상대로 그의 답변은 너무나 교과서 적이었다. 그때 서로 싸웠던 두 세력 모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투쟁한 것이었고 단지 가고자 하는 방향만 달랐다는 것. 그들이 생각했던 방향이 옳았든 틀렸든 간에 그들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서 시원한 삿포로 생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너무나 모범답안이구나. 역사를 좋아해서 대학시절 역사 연구부였다고 하니까 좀 더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속내를 들을 수 있을라나?


모두들 불콰하게 취한 상태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내년에 사카이 상이 사는 나고야에 방문하기로 약속한다. 오게 되면 반드시 연락 달라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며 사카이 상은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는데, 어라? 하하하. 나에게 '사카이'라는 일본 이름은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대치의 일본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자로 쓰니 酒井이었네, 다음번에 만나면 또 신나게 마시자는 사카이 상에게 마지막 농담을 건넸다. "사카이 상, 이름 한자가 술 우물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