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AI와 곰과 가짜뉴스 - 하코다테

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20

점심 식사 후 노면전차를 타고 고료가쿠로 향했다. 하코다테 최고의 랜드마크답게, 우리와 함께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비롯해 꽤 많은 사람들이 고료가쿠를 향해 걷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우리가 도야역에서 타고 온 특급 호쿠토선에는 하코다테역 도착 전 '고료가쿠역'이 있다. 이 역은 고료가쿠 요새의 이름을 땄지만, 정작 고료가쿠에 가려면 하코다테역에서 내려야 한다. 열차가 고료가쿠역에 가까워지면 "고료가쿠에 가실 분들은 여기서 내리지 말고 하코다테역에서 내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올 정도다. 하코다테 관광 공식 사이트에도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다.

Although there's a "Goryokaku" Station on the way, Goryokaku Park is far from the station. Please go all the way to Hakodate Station, and then use a tram or a shuttle bus. (비록 가는 길에 '고료가쿠' 역이 있지만, 고료가쿠 공원은 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종점인 하코다테 역까지 가서 전차나 셔틀버스를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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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너른 정원을 산책했다. (이 장소의 역사 관련 내용은 남편의 글로 대신합니다.)

줄곧 좋았던 날씨가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정원을 다 돌고 건물 옆에 도착했을 땐 굵은 빗줄기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지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10분 정도 퍼붓던 비는 곧 그쳤고, 우리는 고료가쿠를 떠나 숙소 부근으로 이동했다.






저녁에는 이자카야에서 한잔하기로 하고 남편이 미리 알아봐 둔 식당을 찾아갔다. 마침 오픈 시간이 가까워 앞선 세 분 뒤에 줄을 섰다. 곧 문이 열리고 종업원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자리가 없어 두 사람밖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 그런데 일본어로 한참을 더 설명하시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못 들어가는 거라면 다른 데로 가면 되니 '예스냐 노냐'만 알고 싶은데 말이 길어지니 답답했다. 우리 앞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설명을 듣다가 이내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셨다. 그때 앞에 서 계시던 부부 중 여성분이 한국말로 통역을 해주셨다. "자매 식당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겠느냐"고 묻는 것이라고 했다. 낯선 곳에서 이런 제안을 받으니 덜컥 경계심이 생겼는데, 남편은 웬일인지 그러겠다고 답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누가 데리러 올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계심이 더 커졌다...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통역해 주신 분께 "한국말을 참 잘하신다"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분의 한국어 실력도 나의 일본어 실력이랑 비슷했는지 내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시는 듯했다. 참 어렵다, 언어의 세계.


잠시 후 한 청년이 나타났고, 아주머니는 이 사람을 따라가라고 했다. 주춤주춤 따라가니 작은 식당의 바 자리로 안내했다. 덥석 앉으려는 남편을 밖으로 끌고 나와 불안하니 차라리 다른 곳을 가자며 걱정을 쏟아냈지만, 남편은 데리러 오기까지 했으니 그냥 먹자고 고집했다.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하필 테이블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야 하는 바 자리라니 더 난감했다. 그런데 옆옆 자리를 보니 아까 우리 앞에서 기다리다 홀연히 사라지셨던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이미 아는 집인 듯 편하게 계신 모습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스르르 놓였다. 뭘 드시나 흘끔흘끔 봤더니 작은 접시에 얹은 회 몇 점과 사케를 주문해 드시고 계셨다. 우리(나만?)도 안심하고 주문을 시작했다. 우선 나마비루 한 잔씩. 메뉴판 속 멍게 사진을 본 남편은 흥분하며 멍게를 주문했고, 오코노미야키도 하나 추가했다.

멍게가 껍질과 살이 예쁘게 분리되어 나왔다. 껍질 부분을 먹어야 하는지를 두고 남편과 심각한 토론을 벌이다 파파고의 힘을 빌려 직원분께 여쭈었더니, 이전까지 조근조근 말씀하시던 분이 아주 단호하고 큰 소리로 “노!”라고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계셨는지 나와 할아버지 사이에 앉아 계시던 중년 남성분이 웃음을 터뜨리셨고, 그 일을 계기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파파고와 Gemini를 활용해서.


S상은 출장 차 하코다테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가 밴쿠버에서 왔다고 하자, 그분은 신혼여행을 밴쿠버로 다녀왔다며 반가워하셨다.

이제는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바 안쪽의 직원분께 눈웃음을 건네며 검지 손가락으로 일자를 그려 맥주를 추가하고 하코다테의 명물 이카소바(오징어를 국수처럼 가늘게 썰어 서빙)도 주문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스마트폰으로 번역된 일본어를 한국어 독음으로 읽거나 폰을 직접 건네어 보여주면 S상이 스마트폰에 대답을 하고, 그걸 번역된 한국어로 읽는 방식. 비록 속도도 느리고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oct8p.jpg 이 오징어는 잠시후 이카소바가 됩니다... 수다 떠느라 완성본 사진은 없네요.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우리가 캠핑 도중 곰 때문에 혼비백산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S상은 일본 드라마에서나 보던 표현인 “무리무리무리(無理無理無理)!”를 연발하셨다. 오, 이게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표현이 아니었구나 ㅎㅎㅎ



bear.jpg 작년 캠핑장에서 우리 사이트를 방문했던 곰. 차에 숨어서 떨며 찍은 사진




그러다 S상이 하코다테 야경을 꼭 보라고 추천하자,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로프웨이 운행 안 한다"며 참견하셨다. S상이 할아버지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곰 때문에 폐쇄됐다"고 전해주어 모두들 에에? 하고 동시에 놀랐다.


당시 홋카이도에는 곰들이 자주 출몰해 폐쇄된 지역이 많았고, 인명사고까지 났던 참이었다. 가볼까 했던 하코다테의 명소인 트라피스티누 수도원을 일정에서 제외했던 이유 중 하나도 기차역에서 내려 걷는 길에 곰이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니 로프웨이 중단 소식 역시 곰 때문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이후 할아버지는 쿨하게 자리를 뜨셨고, 아오모리에서 오신 S상의 동료분이 그 자리에 합류하셨다. 역사 관련 공부를 하신다는 S상에게 남편은 고료가쿠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이후 나도 조심스럽게 일본 선거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보았다. 동료분은 질문을 듣고는 “얏빠리(역시)!”를 외치셨고. 이것도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표현이 아니었구나 No. 2 ㅎㅎㅎ

(참고로 동료분이 이카소바를 주문하려 했을 땐 이미 품절된 상태였다. 혹시 가실 분들은 꼭 일찍 주문하시길!)







유쾌한 여러분들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본어가 유창한 유튜버들이 이자카야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문명의 이기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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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고, 차가워진 밤공기를 가르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 참, 로프웨이가 중단된 이유가 정말 곰 때문인지 나중에 찾아보았더니, 매년 이맘때 진행하는 정비점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가짜뉴스의 시작인가…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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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야경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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