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 가는 소도시

반대편 해안 동네 탐방 (2025년 10월 9일)

by 그래도 캠핑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비스킷처럼 부서지기 직전의 형태였다. 작작 마셔대라는 몸의 경고인가?


이번 여행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일본의 숙박업체들을 들러 보게 되었는데, 화장실 비데와 함께 공통적으로 있었던 건 바로 공기 청정기였다. 그것도 가습기 기능이 포함된. 다른 나라에서 공기청정기와 비데가 이렇게까지 필수장비로 구비되어 있는 곳을 본 적이 없다 (초고급 호텔에는 있을지 몰라도). 심지어 여행 초반 신세를 졌던 삿포로의 민박집에도 가습기능이 있는 공기청정기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단기 방문자로서는 의문에 빠진다.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습한 기후로 유명한데 어째서 북미나 호주, 서유럽 숙박시설에는 없는 가습기를 필수적으로 구비해 두는 건지. 그냥 사회적 유행이었다가 어느 순간에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버린 걸까? 아무튼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상흔이 아직 남아서 그랬는지, 여행초반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가습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온몸의 피부가 쩍쩍 갈라질 것만 같았다. 건조한 날씨 탓이 아니라...


어째서인지 휴일이나 휴가동안에는 물을 챙겨 먹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혹은 의식적으로라도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지만, 노는 날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 휴일에는 물 대신 다른 음료수 - 술이라던가, 알코올이라던가 - 를 꾸준히 마셔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밤에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는 캠핑의 습관 때문인가. 아무튼 위점막을 통해 수분을 흡수할 생각이 없다면 피부점막을 통해서라도 수분을 흡수하는 수밖에 (두통은 어쩔 수 없지만)... 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누워버린다. 그렇지 어제 많이 마시긴 했지. 사카이 상은 잘 들어갔으려나.


하코다테 마지막 날. 어제 다닐 만큼 다닌 것 같은데 막상 떠나려니까 아쉽네. 저질 소화능력 때문에 원하는 만큼 못 먹어서 그런 거겠지. 역 대합실 근처에도 여러 가지 - 오징어 뻥튀기라든지 - 간식거리가 넘쳐났지만 위장의 공간이 한정적이라서 군침을 삼키고 뒤돌아서야 했다. 로마 시대처럼 거위털로 게워 내면서 먹을 수도 없고. 앞으로는 내 몸뚱이의 능력이 점점 더 저하될 텐데... 이러니 노인과 여행은 서로 안 어울린다는 말이 안 나오겠냐고. 아니면 먹는 것이 아닌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찾아야 할 때인가? 여하튼 단 한 번이라도 더 순수하게 그냥 먹으러 오고 싶은 동네다.



아니, 동네였는데...




이렇게 허접한 라면으로 아침 위장을 채우다니.



해장을 겸한 하코다테 마지막 조식을 위해 어젯밤 수많은 검색 결과 도달한 장소 - 히로바 아침 시장 골목에 있는 '아지노이치방 (味の一番 최고의 맛?)'. 하지만 이름값을 못한다. 밴쿠버에서도 이런 식으로 라면을 만들면 망한다. 간수냄새 그대로 나는 면에 기름기 둥둥 떠있는 짜기만 한 닭국물. 덜 익은 멘마와 퍽퍽한 챠슈. 이게 개항 당시 하코다테에 처음 들어온 중국식 수타국수의 원형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 <멋지다 마사루>를 본 이후로 줄곧 먹고 싶었던 미역 라면이었는데, 미역과 함께 국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따로 삶은 미역을 나중에 라면에 얹어 내었다. 그나마 아내가 선택한 콤보메뉴에 같이 나왔던 카이센동은 그럭저럭 먹을만했었지만.



사진빨은 좋네
2010년에 화제였다는 스즈키 쿄카, 후카다 쿄코 주연의 심야드라마 <세컨드 버진>




실내는 하코다테를 배경으로 촬영한 드라마나 영화 포스터, 그리고 연예인의 친필 사인들로 채워졌건만.. 어쩌면 내 입맛이 음식 수준을 못 쫓아가는 걸까? 그래. 그런 걸로 치자. 멘츄보 아지사이도 맛있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난 그냥 시오라멘 맛을 잘 모르는 걸지도. 그래도 앞으로 라면은 꼭 라면 전문식당을 이용하자. 그리고 식당을 고를 때 상호에 '아지 (味, 맛)'이 들어간 식당은 피해야지.. 다짐을 하고 나온 아침이었다.


그래도 아침공기는 좋구나. 이상기후라서 10월 홋카이도도 만만치 않게 더웠었는데, 촉촉한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피부에 와닿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하코다테 역과 아오모리 역을 오갔던 '세이칸 연락선 (青函連絡船)' 기념관이 보인다. 혼슈까지 연결된 세이칸 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본토와의 승객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겠지. 기념으로 마슈마루 (摩周丸)라는 배를 상시정박해 두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는데 이른 아침이라 아직 닫혀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마저 싼 다음 잠시 쉬었다가 10시에 맞춰 체크아웃을 한다. 아이고. 이번 여행은 어쩌면 이렇게 이동이 많은지. 이렇게 허접한 손목 상태로는 짐 하나 싸는 것도 만만치 않구나. 가방을 맡기고 나와서 동네 탐방을 하는데 이번에는 동쪽 해안으로 가보고 싶다. 하코다테 시내와 거주지 자체가 남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곶 모양인데, 남쪽 끝에는 하코다테 산이 있고 서쪽 해안을 따라 하코다테 역과 항구가 놓여있어서 그 중심으로 산업과 관광시설이 발달되어 있다. 이럴 경우 반대편 해안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게 인지상정 (나만 그런가?). 많이 걸을 생각은 없고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만 구경만 하는 정도로... 어제 소나기가 쏟아진 게 거짓말인 것처럼 날이 좋으니...



잘 정돈된 서쪽 해안지구에 비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동쪽 해안의 육교



시내를 가로질러 반대편 해안으로 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이러다간 오늘도 2만 보 가볍게 넘을 판. 상업지구에서는 끝없이 흘러나오던 마을 방송들도 거주지로 들어가니 좀 잠잠해진다. 그런데, 바닷가에 가까운 거주지로 갈수록 그동안 생각해 온 일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쇠락해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집들, 육교의 계단도 마치 정비를 안 한지 몇십 년은 되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근처 상업지구를 통과해 오는 동안에도 굳게 셔터가 내려간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일본 지방 소도시의 현실인가? 반대쪽 해안 마을, 역과 항구 주변의 화려한 호텔과 식당들에서 일한 사람들도 퇴근하고 나면 이런 집으로 돌아오는 건가? 엔화 환율이 낮아서 여행 가성비가 좋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일본의 경제불황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부터 곪고 있었던 걸까?


잠깐 들러본 '오모리 해안 (大森海岸)'에도 쓰레기가 즐비하다. 동네 상태가 이 정도면 지방 정부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거라고 봐도 되는 건지. 은퇴를 하고 연금을 받을 나이가 되면 맛있는 거 먹으러 종종 놀러 오고 싶었었는데, 이 정도면 이곳 공동체 역시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길을 걷던 중에 홋카이도 도청에서 경영한다는 아파트 단지를 마주쳤다. 공영임대주택인가? 그러기엔 스러져가는 주변 건물들과 달리 번듯한 고층빌딩이다. 사람들도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옆 안내판에, 쓰나미가 발생하면 이 단지로 대피하라고 적혀있다. 아... 기껏 홋카이도 관광 왔는데 왜 이리 덥냐고, 도로 상태는 왜 이 모양이냐고 불평만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기후위기는 나에게 그저 짜증의 원인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언제나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이들에겐 한정된 세금을 집행하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하코다테 공원을 들러본다. 막부가 몰락하고 10여 년 후인 1879년, 하코다테가 본격적인 국제도시로 탈바꿈하면서 개장한 공원이라고 한다. 안내지도를 보면 한 때 이곳에 시립 박물관도, 시립 도서관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텅 빈 건물이다. 관광의 중심이 고료가쿠 근처로 이동하면서 시민들의 문화 인프라도 같이 옮겨간 것. 그래도 고즈넉한 일본식의 정원이 아름답다 (그리고 어린이 동물원도 있잖아!!).



공원 건너편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동상. 팻말에 '에조 땅의 료마'라고 쓰여있는데, 하코다테는 일본 막부 말기 인물들을 모두 끌어다 팔아먹으려고 하는 건가




도서관은 2005년에 폐관




tempImagevOMSxv.heic 어린이 동물원에는 수조도 있었다!!
날개를 펴면 2미터가 넘는다는 참수리와 설치류 커플들. 쟤네들은 어쩌면 저러고 자는가




그리고 오픈 시간을 맞추어 어제 커피 로스터리 사장님께 소개받은 돈까스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건만 식당은 '호라이 쵸 (宝来町) 전차 정거장 바로 근처에 있었다. 이것도 뚜벅이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였나요? 이런 섬세하디 섬세한 구마적 같으니라구.




'돈에츠 (和風とんかつ専門店 とん悦 https://tonetsu.com)'는 말하자면 부드러운 부침식 (Pan Fry) 돈까스가 특색인 집이었다. 본인들은 일본 전통 방식이라고는 하는데, 서양식 커틀릿 (Cutlet) 요리를 일본식으로 만들어 낸 돈까스의 원조집이라고 알려지는 도쿄 '렌카테이 (煉瓦亭)'에서도 기름솥에서 바삭하게 두 번 튀겨내는 (Deep Fry) 걸 고집하는 걸 보면, 그게 진정 일본 전통인 건지 아니면 이 집만의 전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내와 각각 부쳐낸 방식과 튀겨낸 방식 둘 다 먹어봤는데, 전 튀김이 더 좋습디다. 물론 두 가지 방식 중 취향껏 고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훌륭하다고 생각은 들지만, 음.. 뭐랄까, 죄송하지만 이번에도 또 절감했습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일본 음식들 수준이 제법이라는 걸.











아직 열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한다. 오래된 항구 도시 특징인 구불구불 길도, 골목마다 놓인 여러 소품들도 재미있었지만, 확실히 여행의 반은 날씨입니다, 날씨. 이렇게 화창하니까 길가에 돌멩이도 다 예뻐 보인다. 목이 말라 근처에 보이던 '코옵 삿포로(Coop Sapporo)' 슈퍼에 들어갔는데 홋카이도 아니랄까 봐 특이한 유제품들이 많이 보였다. 오.. 저건 뭔가요. 혈당도 잡아주고, 혈압도 낮춰주고, 중성지방도 낮춰주는 요구르트라니요. 이 정도면 카이스트나 나사의 신기술로 만든 거 아닌가요? 일단 냉큼 집어 본다. 효과를 믿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웃겨서. 그런데 이게 뱃속의 폭풍을 만들어낼 줄이야.




먹자마자 중성지방을 실시간으로 쫙쫙 빼준 요구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