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림 국립공원 - 그린포인트 캠핑장 #5 (2019년 9월 14일)
여섯째 날
밤새토록 화장실로 출퇴근을 반복했더니 굳이 오늘 아침엔 화장실 때문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구나. 배탈의 순기능이네. 대충 정리하고 아침에 커피를 만들어서 마시다 보니 아내가 오늘 아침에는 '울프인더포그 (Wolf In The Fog)'에 가보자고 한다. ‘토피노 가 볼 곳’ 혹은 '10 things you must do in Tofino'라고 구글 검색을 해보면 반드시 순위권에 오르는 토피노 다운타운에 위치한 레스토랑인데, 방대한 칵테일 셀렉션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데 식당이라기보다는 바 같은 느낌. 그래서인지 브런치 영업을 할 때에는 전망 좋은 2충 테라스는 닫아놓고, 바가 있는 1층 테이블에만 손님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게 훨씬 편할지는 몰라도 여유로운 2층이 뻔히 비어 있는데도 따닥따닥 붙어 있는 1층 테이블에 몰아넣어지는 건 그다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 집 브런치 메뉴는 뭐.. 컨티넨털 브렉퍼스트나 프렌치토스트 등 꽤나 흔한 아침 식사 메뉴여서 유지방에 탈이 난 뱃속을 달래기 힘들 것 같아서, 그나마 그중에서 하나 특이해 보이는 요리 – 한치 튀김과 페퍼민트 차를 주문하고, 아내는 해산물 차우더와 빵을 주문했다. 차우더는 도무지 맛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내의 첫인상은.. "(복화술 하듯이 입은 안 움직인 채) 소보 (Sobo)가 훨씬 낫다."
일단 완전 탄 빵이 나와서 놀랐었는데 나중에 보니 요즘은 어딜 가도 저렇게 바싹 태워서 토스트를 하는 게 유행인 것 같다. 한치 튀김은 잘게 썬 양배추 샐러드 + 이탈리언 드레싱과 같이 나왔지만... 으음... 미묘했다. 흩뿌린 고수 잎은 개인 취향으로는 이탈리언 드레싱에도, 한치 튀김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듯하다. 음.. 뭐.. 관광지에 가면 이렇게 과대평가된 식당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런 건 골라낼 줄 아는 선구안이 생긴 걸로 알았는데... 하지만 2020년에 다시 방문한 '울프인더포그'는 마침 해피아워였었고, 이 때는 2019년의 안 좋았던 인상을 180도 뒤집는 대전복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먼저, 오후 시간대 음식들은 지난번 아침 식사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근사했다는 것, 해피아워 가격을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만드는 퀄리티의 칵테일을 대접받았다는 것, 그리고 인생 최고의 진 (Gin)인 '셰링햄시사이드 진 (Sheringham Seaside Gin)'을 소개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어제 꼴랑 하루 날이 좋더니, 오늘도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원래 유명 트레일 한 곳을 돌까 했다가,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멕시코야…라는 아내의 의견에 500% 동의하면서 느릿느릿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나저나 속은 아직도 부글거리고 더부룩하니 불편하기 그지없다.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끊임없이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기념품 가게를 보러 다니다가 카약 가이드 투어를 해주는 곳을 발견했는데 아내가 들어가 보더니 오늘 예약은 이미 다 찼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카약 집에서 같이 경영하는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그곳은 마침 카약 투어에 참여하기 위한 대기석이자 실내 교육이 진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어떤 식으로 투어가 진행되는지 무료 오리엔테이션을 꾸준히, 아주 줄기차게, 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 감상했다. 그리고 결국 다음날 오후에 예약을 잡고 만다. 오.. 하하하.. 내일은 간만에 카약이다. 예전에 몇 차례 2인용 카약을 타고나서 결딴나게 싸웠던 기억이 나서 이번엔 절대로 각자 1인용을 타자고 한다. 타보고 재밌으면 겨울에 세일할 때 하나 사자고 하다가, 그러면 도대체 어디다 보관할 거냐고 하는 둥, 별 쓸데없는 만담을 하다가 비가 잦아들자 다시 길을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쿠마 (Kuma)'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저기 이 지역 예술가들 가게나 돌아다니자고 한다. 아내는 마음에 드는 티셔츠를 하나 사고, 난 트레일러에 붙일 스티커를 두 개 샀다. 그렇게 3시 반에 쿠마가 오픈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주변을 돌어다니다가, 결국 마지막 5분을 못 참고 식당 파티오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오픈 간판을 걸러 나온 웨이트리스가 우릴 보고 깜짝 놀랐지만 가벼운 인사로 얼버무리고... 첫날, 점심 메뉴 중에선 카라아게만 먹고 나왔을 때부터 이 집의 김치-삼겹살 돈부리가 매우 궁금했었다. 마침 유지방 과다 섭취로 속이 뒤집어지던 중이어서 뜨끈한 사케와 함께 얼른 주문한다. 아... 또... 뜨거운 술이 들어가니까 위장이 따끔따끔해진다. 아... 좋다... 곧이어 나온 김치-삼겹살 돈부리는 반숙 달걀과 양배추 샐러드와 같이 나왔는데 (비록 삼겹살은 딸랑 한 덩이가 나오지만)... 으허헝... 간만에 김치랑 계란에 밥 비벼 먹으니까 눈물 나오려구 해. 김치의 유산균으로 뱃속의 유지방이 녹아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으흐흐흐허어엉... 김치덮밥... 날 다 가져요..
지난번 '플루비오'에서도 백김치 느낌의 절인 배추쌈 요리가 있었고 다음날 가게 될 '타코피노(Tacofino)' 푸드트럭에서도 김치-돼지고기 베이스 타코 그링가가 있던 걸로 보아, 김치가 북미 젊은 힙스터들에게 건강식으로 조금씩 인정을 받아가는 느낌이다. 심지어 '타코피노'는 김치를 직접 자기들이 만든다고.
오늘은 일찍 캠핑장으로 돌아와서 조금 쉬었다가 저녁놀을 구경하기로 한다. 다운받아 둔 넷플릭스를 보고 나서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 내려갔다. 아.. 뭐..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 저녁놀은 매일매일 다르구나. 날이 잔뜩 찌푸려 해가 어디로 지는지도 보이지 않지만, 해가 넘어가기 직전 하늘이 최고로 붉게 물든 때가 되면, 롱비치 특유의 갯벌도 붉은 하늘을 그대로 반사해 낸다. 사는 게 즐겁고, 인생이 명랑해지면 작가에게서 좋은 글이 더 이상 안 나온다던데, 이렇게 멋진 저녁 하늘이 있는 동네마다 화가들이 많이 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글과 그림은 창작 방식이 조금 다를지도.. 아니면, 아무리 자기가 근사한 시각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문학이 되었든 회화가 되었든 간에 예술적 창작 욕구는 또 다른 인생 경험으로부터 충동질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캠프 사이트로 돌아와서 마지막 캠프 파이어를 즐긴다. 어제 유키 시내에 가서 잡아온 불쏘시개용 박스들이 훌륭한 역할을 했다. 별이 보이는 걸 보니 내일은 맑을 예정일지도...
마지막 밤
7시 반쯤 일어났다. 하늘은 아직 흐려있지만 오후엔 맑을 예정이란다. 어제 먹은 김치덮밥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밤새 속이 편했던 건 물론이고.. (사실 저녁을 일찍 먹고 밤에 아무것도 안 먹은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침에도 문자 그대로 쾌통하게 내보냈다. 내 몸뚱아리가 이렇게나 서구 음식 문화에 적응을 못하는 걸 알게 되어 매우 유감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이렇게 몸도 마음도 편협해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다음에도 이렇게 먹거리 여행을 다닐 일이 있다면 반드시 총각김치를 싸들고 다니면서 매일 밤 먹어주리라 다짐한다.
오늘도 이삿날. 늦게까지 휴가 계획이 안 정해졌던 탓에 이번 캠핑은 일주일간 4개의 사이트를 전전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마지막 사이트로 이동한다. 66번. 해변으로 가는 진입로 코 앞에 사이트가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린 늦게까지 토피노 다운타운에 있을 예정이라 이렇게 훌륭한 환경조건을 백 프로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번 재수가 좋으면 그 본전을 뽑으려는 욕심은 언제나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속은 매우 편해졌지만 그래도 허기는 느낄 수가 없다. 그래 며칠간... 정말 배 터지도록 먹고 다녔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치지 않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를 반복했으니, 거위털로 게워내면서 계속 식도락을 탐했다는 로마의 폭군과 다를게 뭐가 있나 싶다. 그런가? 내 인생이 이제 로마 황제 수준으로 상향된 건가? 트레일러를 새 사이트로 옮기고, 세팅하고 나서도, 느릿느릿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었다. 와... 정말... 휴일은 어쩌면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지. 오늘은 3시 반에 해상 카약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해상 카약이라고 하더라도 저 먼 태평양으로 나가는 건 아니고, 토피노 근방의 섬들을 카약 타고 구경 다니면서 각 섬의 역사에 대해 얘기도 듣고 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다운타운으로 나서서 '소보'에서 아점을 먹기로 한다. 지난번 왔을 때 메뉴판에서 우동된장국 메뉴를 보고 궁금했었는데. "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매우 맛있다. 이야… 여기 요리사 정말 잘한다… "하는 감탄사가 다시 나온다. 다시 국물을 어떻게 냈는지 모르겠지만 감칠맛과 염분의 농도를 정확히 맞춘 건 물론이고, 뭣보다 놀라운 건 중국식 두부를 훈제해 넣어서 가츠오 부시 느낌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버섯으로 엑센트를 줬다. 아니... 어떻게 우동에 두부를 훈제해서 넣을 생각을 하는 거지? 이런 걸 보면 오히려 선입견이 없는 서구 요리사들이 오히려 더 동양요리에 다양한 상상력을 넣는 것 같다. 같이 주문해서 마신 아이스티 역시 텁텁한 입맛을 싹 씻어주었다. 면발의 쫄깃함이 나한테는 좀 부족했던 느낌이긴 했지만... 뭐 국수를 직접 만들지 않는 한, 쫄깃한 우동국수 재료를 구하기 지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암튼 이것도 순식간에 국물 한 방울까지 흡입.
아내는 해산물 차우더 작은 컵과 ‘킬러 피시 타코’라는 이 집에서 제일 인기 좋은 메뉴를 주문했다. 해산물 차우더는... 지난번과 같이 명불허전. 킬러 피시 타코는 소프트 타코셸을 가볍게 튀겨서 바삭한 식감을 만든 후, 매콤하게 구운 연어살과 각종 과일 (딸기, 포도, 망고 등) 베이스의 살사를 푸짐하게 넣어서 나왔는데, 멕시코나 텍스멕스 (Tex-Mex, 멕시코 음식을 가장한 미 텍사스 음식) 음식이라기보다는 타코를 가장한 과일 특선 안주와 같은 느낌. 옆에 다른 손님은 타코인데 어째서 사워크림이 없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지만, 유지방은 쳐다도 보기 싫었던 당시의 나에겐 아주 완벽한 음식이어서 얼른 한 개 더 주문했다. 아하하하.. 뭔 이렇게 상큼한 타코가 다 있는지. 맥주가 강하게 고파졌지만 곧 2시간 넘게 카약을 타야 하므로 일단은 자제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웃기는 낙서가 있다. 아니 낙서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해서 이게 농담인가… 헷갈리기도. 북미의 상업용 건물에는 건축법 상 화재 시 대피를 위한 비상 스트로브 등을 화장실에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제품에 따라 마치 방범 카메라 모양처럼 생긴 것도 있다. 그 아래 누군가가 제대로 된 타이핑으로 “촬영 영상은 연구 목적으로만 쓰임”이라고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아.. 이게 농담이 맞겠지? 이런 농담을 걱정 없이 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카약킹을 하는 동안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면 왠지 방수팩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여기저기 아웃도어 스포츠점, 서핑 물품 가게를 헤매고 다녀 봤으나 딱히 적당한 걸 못 찾았었는데, 동네 약국에 가서 8불짜리 투명 방수백을 발견했다. 오케. 이제 준비 완료. 이제 시간도 얼추 되었고, 미리 화장실도 가 놓아야 할 것 같아 투어 사무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출신 강사 '샘'이 나와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이번 투어는 워싱턴 DC에서 온 커플과 캘리포니아에서 온 할머니 둘. 그리고 우리 둘이 참여를 하는 걸로 되었는데, 자신 있게 우린 싱글 카약을 탈 거야 했더니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서 "맞아, 2인용 카약의 별명이 '이혼 카약 (Divorcing Kayak)'이라고들 하지..."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장비를 준비하고. 입수하기 전에 카약 운전법이나 물에 빠져서 배 안에 갇혔을 때 (capsized) 카약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 등 약간의 안전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바다로 나섰다. 아.. 또 이렇게 바다에서 카약을 다 타보게 된다. 이전엔 가이드 투어 없이 그냥 우리끼리 카약을 빌려서 근방을 돌아다니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좀 더 나가 섬들 사이를 가로질러가게 되었다. 날씨는 왜 이리 또 기가 막힌지..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많이 뒤처져 있다. 뭐.. 급할게 뭐 있나. 근방 섬들의 역사나 전설에 대해 강사가 설명하는 걸 못 듣는 거뿐이지. 기세 좋게 싱글 카약을 탄 것까진 좋았지만, 더블 카약을 탄 두 사람이 함께 패들링을 하는 동력을 따라가긴 힘들었나 보다 (심지어 할머니들 한테도 뒤쳐졌다 ㅠㅠ).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사진 찍고 그러면서 아내를 기다리고.. 다시 따라가면서 중간쯤 거리를 유지하고 뭐 그런 식으로 싱글 카약킹을 즐겼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자 인생 최후의 싱글 카약킹이 될 찬스가 매우 높아 보였다.
두 시간 반짜리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도, 뭐.. 오리엔테이션 받고, 준비하고, 사진 찍고 그러다 보면 뭐, 정작 한 시간쯤 타려나 싶었는데, 2시간 반 동안 꽉 채워 패들링을 했다. 그나마 군데군데 사진 찍느라 쉬었던 나랑은 달리 계속 쫓아다녀야 했던 아내는 그야말로 2시간 반 동안 빡세게 운동만 했을 듯. 사무실이 있는 해변에 도착하니 3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놔.. 새파란 초보들이 싱글 탄다고 고집 피우더니 강사 초과근무를 시킨 셈이다. 장비 정리하고 반납하고 사무실을 나서자 아내는 "우리가 만약에 카약을 산다면, 2인용을 사는 게 맞는 것 같아."라며 단호하게 말한다. 아, 그러니까 그걸 어디에 보관해 둘 거냐고.
이미 6시 반. 신나게 패들질을 했더니 오래간만에 배가 고파온다. 아..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허기인가? 믿고 먹는 '소보'에 또 가볼까 하다가 토피노의 명소 중 하나인 ‘타코피노 (Tacofino)’ 푸드트럭이 7시에 문 닫기 전에 얼른 가보자고 한다. 서퍼들 대상으로 재밌는 타코를 팔던 푸드트럭이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서 밴쿠버와 빅토리아에 십여 군데 지점을 가진 외식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성공신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 보니 치렁치렁한 머리와 얼굴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은 청춘들이 잔뜩 와서 북적대고 있다. 지점마다 조금씩 메뉴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곳 본점에서는 직접 담근 김치로 만든 ‘김치/돼지고기 그링가 (Gringas)’와 ‘참치 타타코 (참치 타타키로 채운 타코)’, ‘소고기 부리또’가 유명하단다. 여기에 피시 타코와 치킨 부리또까지 포함해서 주문했다. 우리가 거의 맨 마지막 줄이었는데, 정말로 7시 딱 되자 문 닫고 폐점 준비를 했다.
김치 그링가를 제외하곤, 내용물은 딱히 색다르지 않았지만 (뭐 타코가 다 그렇지만), 일단 타코 한 개의 양이 어마어마하고, 타코셸의 쫄깃함이 매우 특별했다. 마치 광동식 딤섬 만두피처럼 약간 투명한 느낌도 드는 것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외에도 전분을 많이 넣어 쫄깃함을 극대화시킨 듯하다. 그걸 또 살짝 구운 다음 타코나 부리또로 만들어서 군데군데 바삭한 맛도 즐길 수가 있다. 역시 트렌드를 따라간다거나 음식 솜씨가 좋다거나 하는 것 만으로는 요식업 서바이벌에서 살아남는 게 힘이 든다. 뭔가 이렇게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날 '타코피노'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진했던지, 밴쿠버에 돌아와서도 종종 '타코피노' 매장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8개의 매장 모두 각각의 특별한 메뉴를 갖추고 있어서 한 군데씩 도장 깨듯이 찾아다니며 먹어보는 재미를 받기도 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이미 해가 질 때가 다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오늘은 날이 좋아서) 오늘 석양이 기가 막힐 거라고 했는데 (그만큼 이 동네에선 맑은 날을 보기 힘든 모양이다. 우리가 왔던 지난 2번의 토피노 여행도 별로 그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 없었다), 시간상 우리 캠핑장으로 가서 저녁놀을 즐기긴 어려울 것 같았다. 서둘러 캠핑장으로 향하다가 일단 롱비치 해변 주차장에 차를 대어 저물어 가는 노을이 비치는 바다를 구경했다. 아... 아름답다… 주변 지형을 보니, 이 고장 화가들이 수없이 그려온 그림에 나오는, 딱 그 노을이구나. 그 숲에 그 바다고. 저런 장면을, 이 감동을 카메라로 재현해 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발악해 본다. 정말... 미칠 것 같은 하늘이라는 표현이, 딱 이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캠핑장에 돌아오니 8시부터 노천극장에서 ‘곰, 늑대, 쿠거(퓨마?)’라는 쇼를 한단다. 뭐.. 그냥.. 그저 그런 다큐멘터리겠거니… 했는데, 국립공원 직원이 나와서 곰, 늑대, 쿠거와 공존하는 법에 대해 실제 사례와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하하하. 국립공원 직원쯤 되려면 저렇게 스테이지 매너도 풍부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결론은, 야생동물과 공존하려면 절대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거. 그리고 캠핑장에 음식 냄새나는 건 다 치워두라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이트로 돌아오자 누군가가 (아마도 다람쥐) 우리 차에 들어와서 칼로리바를 뜯어먹은 흔적을 발견했다. 아마 환기를 위해 창을 조금 열어 둔 것이 이 사달을 만든 모양이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라서 모든 칼로리바 포장에 일일이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뭐.. 아내가 꼼꼼하게 합성첨가물 없는 걸로 고른 거라서 다람쥐한테 치명적인 해는 없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이렇게 죄다 파헤쳐 놓은 걸 보니 빡쳐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것들이 몸에 좋은 건 알아가지고... 이렇게 토피노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집으로 오는 길
오늘도 7시 반쯤 저절로 눈이 떠진다.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좀 걱정했었는데 아직까지는 하늘이 잔뜩 찌푸려졌을 뿐 빗방울 떨어지는 건 없다. 그래도 비 맞으면서 캠핑을 철수하는 것만큼 찝찝한 건 없으니 미리미리 집에 갈 준비를 하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커튼들 다 뜯어내고 습기를 다 닦아내는 등 대청소가 되어 버렸다. 뭐.. 이렇게 또 2년 만에 큰 청소 한 번씩 해주는 거지 머. 캠핑 철수 시 짐 싸는 요령은… 뭐 딱히 없다. 무조건 빈자리부터 채워 넣는 것. 캠핑 시작할 땐, 이것저것 금방 쓸 것은 쉽게 손이 닿는 곳에 두는 등 머리를 좀 써야 하지만 끝날 땐 무조건 채워 넣는 것이다. 우산 정도나 맨 나중에 얹어 두는 걸까나. 엊저녁을 푸짐하게 먹어서 아침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 아침은 마침 간만에 사발면을 먹기로 한 관계로 신이 나서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잔뜩 흐려 있고... 여기에 얼큰한 국물 한 모금과 뜨거운 국수를 후루루룩 밀어 넣으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진다. 아... 이걸로 이번 먹거리 여행의 화룡점정이 되는구나. 예전 조미료 광고에서 ‘고향의 맛’이라는 광고 카피를 사용했던 것이 대번에 이해가 갔다.
어느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캠핑장을 비워 줄 때가 되었다. BC 페리 특별 프로모션 스케줄로 와서 올 때 승선료를 50불가량 아꼈는데, 갈 때에도 그 혜택을 받으려면 저녁 5시 반 페리를 타야 한다. 그때까진 시간이 많이 비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50불이나 할인이 되니까 저녁까지 어떻게든 기다렸다가 타기로 하고 일단 출발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는 날씨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몇 군데 공사 구간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제법 원활하게 포트 알버니까지 왔다. '포트 알버니 (Port Alberni)'는 밴쿠버 섬을 종단하는 17번 고속도로에서 나와 토피노로 향하는 4번 국도를 타면 중간쯤 있는 도시로.. 나름대로 큰 공장도 있고 산업시설이 있어서 여기까진 도로 사정이 나쁜 편이 아니다. 그래서 반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트 알버니에 도착했다는 건 이제 어려운 운전은 끝이 났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토피노로 가는 길의 중간 휴양지라는 정체성도 있고 해서 커다란 RV 들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된다. 그러고 보니 2006년에 왔을 때에도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갔었구나. 금룡반점 (Golden Dragon Restaurant)도 그대로 있네… 추억여행 삼아 금룡반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아내가 사전조사를 한 바로는 얼마 전에 금룡반점의 주인이 바뀌었고, 그래서인지 더 이상 오믈렛과 샌드위치 조식이 메뉴에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막상 가보니, 창가 테이블과 의자는 그대로인데 이렇게나 넓었었나…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왔을 때가 13년 전이니, 그때 내 나이가… 아... 참 젊었구나. 아니. 내가 지금 많이 늙었구나… 생각이 든다. 그때보다 차도 커졌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다니지만, 더 행복하고 평온한 노후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다 보면 금방 100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득해진다. 새로운 금룡반점엔 뷔페 메뉴가 새로 생겼다. 이미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뷔페 트레이마다 그득하다 보니 주인이고 종원원이고 뷔페를 먹으라고 은근히 압박한다. 경험상 이런 시골 중국식당 요리가 그렇게 특별하게 맛있는 것이 없었고, 딱히 후딱 먹고 나가야 하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 뷔페 먹지 머…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얼마 전 인도식 뷔페에 가서 아내가 의외로 많이 먹는다는 사실도 알았고..
음식 수준은… 딱 기대한 만큼. 북미식 중국요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음식이 냉동식품을 그대로 데워 나온 것 같았다. ㅎㅎ 뭐.. 믹스커피도 사실은 대기업에서 최고의 바리스타들을 고용해 레시피를 만든 거라니까.. 냉동식품 역시 최고의 셰프들이 모여서 만든 걸지도.. 그나저나 지난 일주일간 결핍되었던 MSG를 오늘 하루 동안 단박에 보충하는구나. 그래서인지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한 시간 반 정도 더 운전하기 전에 찐한 에스프레소 한잔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곳은 아직도 비가 안 온다. 한 블록 정도 걷고 나니 '마운틴 뷰 베이커리 (Mountain View Bakery)'라는 빵집이 나왔다. 딱 보기에도 동네 사람들이 득실득실하고, 건강이라고는 전혀 연관되지 않아 보이는 하얀 밀가루 빵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다. 가게 실내에는 “몸무게를 늘리는 것이 유괴당할 확률을 낮추는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 케이크 먹일 것!”. “절대로 빼빼 마른 제빵사를 믿지 마라” 등의 재밌는 격언들이 즐비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구석에 편해 보이는 의자에 몸을 파묻어 잠을 청해 보았지만.. 졸린데 잠이 안 드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아.. 안 되겠다. 차로 가자. 차에 가서 잠깐 눈 붙인 다음 운전하자.. 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는데, 마침 차를 둔 주차장이 강변이라 원주민 동상이며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았다. 강에는 만만해 보이는 물고기들이 있는지, 아니면 강변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많이 남기고 가서 그런 건지, 갈매기들이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저공비행을 한다. 일단 차로 돌아와 눈을 붙이니 30분이 휙 지나가 버렸다. 아.. 이제 정말 집에 갈 시간이구나..
페리에 올라 타 식당에 가서 어제 남은 부리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은 후 뒷자리로 옮겼다. 어떻게 마지막 석양을 볼 욕심이었는데.. 날씨가 워낙 궂다 보니까 7시 20분까지 기다려도 하늘이 붉어질 요량이 안 보인다. 에이.. 포기하자 하고 차로 내려갔더니, 우리 차가 페리 맨 앞에 위치한 터라 오히려 여기서 보는 '트와슨 터미널 (Tsawwassen terminal)'의 야경이 더 볼만하다. 부둣가로 진입하는 페리가 마치 우주선 도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참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으니 왠지 데이빗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 (Space Oddity)'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캠핑 경험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겠지만, 뒷정리가 끝날 때까지 캠핑은 끝난 게 아니다. 짐을 다시 나르고, 설거지와 빨래를 돌리고, 아이스 박스를 비우고 음식들을 다시 냉장고로 밀어 넣고, 다람쥐의 공격을 받은 음식들을 골라내어 버리고, 그걸 보고 또 한 번 빡치고, 바닥에 흘린 것들을 닦아내고 청소하고… 등등을 하다 보니, 벌써 밤이 늦었다. 샤워 후 남은 맥주들은 마저 마시면서 사진들을 슬라이드 쇼로 쭉 본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이지만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시간들을 반추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여행에 대해 얘길 한다. 항상 이런 식이다. 뒷정리가 끝나기 전엔 캠핑이 끝나는 게 아닌데, 뒷정리가 끝나기 전에 이미 다음 캠핑을 준비한다. 어쩌면.. 13년 전 금룡반점에 있었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이런 무한반복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계속 반복되겠지. 우리 트레일러 뒤쪽엔 지난 캠핑들의 역사로 이렇게 한 줄이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