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먹이는 하늘

퍼시픽림 국립공원 - 그린포인트 캠핑장 #4 (2019년 9월 14일)

by 그래도 캠핑

넷째 날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급한 화장실의 부름 때문에 4시에 깼다. 밤새 트레일러 천정을 두들기던 빗줄기는 조금이라도 잦아들 줄을 모른다. 날씨 예보를 보았더니 9시까지는 계속 이 모양일 듯. 어쩔 수 없이 위아래 비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간단한 거야 깊숙한 숲에 들어가 몰래 실례해서 빗물에 씻겨 내려보낸다 하더라도, 어제 하루 종일 버터의 향연을 겪었더니 뱃속도 부글부글 소리를 낸다. 우비에 우산을 들고 라이트를 비춰가면서 가더라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온몸이 젖어가는 걸 느낀다. 다음에 캠핑 사이트를 예약할 땐 반드시 화장실 가까운 곳으로 정하리라 또 다짐을 한다. 아내 역시 밤새 두들기는 빗소리에 잠을 설친 모양. 꿈속에서 계속 드럼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고 한다. 예전에 차박으로 캠핑을 다녔을 때는 비가 와도 그렇게 시끄럽지가 않았었다. 아무래도 차체가 차음재로 방음처리가 되어있기 때문이리라. 파이버글라스로 되어 있는 이 캠핑 트레일러 지붕에는 뭘 붙여야 소음이 차단될지 등 고민을 하다가, 일단 잘 수 있는 만큼 더 자 보자고 하면서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어제 전기난로가 고장이 나서 축축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전기장판 위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이 빗소리도 아늑하게 느껴진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을 먹으러 나서 본다. 오늘 가 볼 곳은 토피노 타운에 있는 '소보 (Sobo)'라는 레스토랑으로, 첫날 갔던 '쿠마 (Kuma)'와 함께 이 지역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식당이라 한다. 뜨끈한 국물이 땡기던 차에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좋다는 해물 차우더와 '폴랜터 (Polenta)' 튀김 (옥수수 가루를 빚어서 튀겨 만든 도넛)으로 간단히 속을 달랬다. 그러고는 로컬 버섯 피자와 타이식 그릴드 치킨을 주문했는데, 로컬 버섯 피자는... 와 정말, 웬만한 피자집 피자보다 훠얼씬 맛있었다. 로컬 버섯이라더니, 신라면 건더기 수프에 있던 버섯향이 난다. 그리고 타이식 그릴드 치킨은 기름을 뺀 닭다리를 껍질째 각종 야채와 땅콩 소스와 함께 또띠야에 싸서 먹는 요리였는데, 타이식이라기보다는 (땅콩 소스만 빼면) 북경오리 요리와 같은 느낌이었다. 요리 하나하나 매우 창의적인 소스와 야채의 조합이 인상적이었고, 하나같이 맛도 좋아서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였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다 먹진 못하고 나머지를 포장해 왔다. 그래도 이 식당을 대표하는 디저트인 키라임파이를 맛보는 건까진 잊지 않았지만..





그 후 다운타운을 산책하면서.. 아내와 "이상하다. 그냥 먹고 놀고 있는데... 왜 이리 피곤한 거지.. "하면서 의아해했는데, 이 피로의 정체가 끊임없는 과식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소화 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는데, 이렇게 계속 처먹고 있으니 몸의 에너지가 음식 소화에 너무 많이 소모되는 것이다. 먹거리 여행도 나이가 젊을 때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근데 어릴 땐 먹고 싶은 걸 다 사 먹을 돈이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인 거지.. 따위의 쓸데없는 만담을 하면서 토피노 다운타운 거리를 다녀본다.


오늘 와 보니, 이 거리가 2016년에 비해서 또 완전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활기차졌다고 할까? 예전에 비해 백인 젊은이들이 확실히 눈에 더 많이 띈다. 그렇다고 원주민들이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닌데, 뭐라 할까… 최근의 '스쿼미시 (Squamish)'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시안 자본이나 대기업 자본에 밀려서 밴쿠버나 빅토리아 도심에선 밀려났지만,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해보고 싶은 젊은 사람들 (주로 백인 청년들)에게 기회의 땅이 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스쿼미시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벽등반 코스가 있는 것처럼 토피노에는 세계적인 써핑 해변이 있다 (이 둘 역시 백인 청년들 중심의 스포츠).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정비하고, 청년들 대상의 새로운 사업을 융성하면 그만큼 얼마든지 시장이 확대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작용도 뚜렷하게 눈에 보인다. 일단 도시 전체가 차분하지가 않고 붕 뜬 기분이다. 마치 경주나 설악산 국립공원의 어떤 주차장처럼 보인다. 아직 관광 시즌의 끝물이라서 그런가? 레스토랑마다 방대한 칵테일 메뉴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통행량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예전에 보였던 원주민 부락 중심의 공동체 느낌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눈에 띄는 원주민들은 밴쿠버 이스트 헤이스팅스 거리의 그들처럼 카트를 끌고 다닌다던가 대낮부터 취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 새로운 모습의 관광 도시에 적응을 못하는 걸로 보인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취업시장의 침체? 상업 부동산의 폭등? 모르겠다. 어쨌건 이런 도시의 변화를 쉽게 발전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만일 이것이 일상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라 한다면,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부푼 꿈을 안고 토피노에 정착한 저 젊은 백인 사업가들 역시 언제 밀려날지 모를 일이다.


토피노 타운의 횡단보도



쓰잘데기 없는 걱정들을 하면서 산책을 하는 데도 배가 꺼질 줄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토피노 브루어리에 구경을 가봐야지 했는데... 오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그랜빌 아일랜드보다 더 큰 것 같다. 아마도 직접 가 본 마이크로 브루어리 중에서 면적 면으로는 가장 넓은 곳이 아닐까 싶다. 다른 소규모 양조장들처럼 시음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펍처럼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또 그걸 덮을 정도로 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있고 그렇다. 일단 플라이트 (샘플러)로 주문했는데 우리 동네 마이크로 브루어리보다 플라이트 가격이 좋다. 5온스 잔으로 4개가 나오는데 세금 포함 7불, 20온스 글라스로 한 가지 맥주만 마셔도 세금 포함 7불(2019년 가을 가격으로 2022년에는 각각 12불, 8불로 바뀌었다)이니 아주 굿딜인 셈. 게다가 간만에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에 왔더니 이때구나 싶어 넷플릭스를 다운로드하기 시작하는데, 난데없이 '우두두두두두두...' 하고 굉음이 들린다. 뭐지? 내가 뭘 잘 못 다운로드하고 있나? 아니면 맥주 공장에서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밖에서 장대비가 쏟아진다. 입구의 양철 지붕 처마가 장대비에 맞아 비명을 지른다.




캠핑장으로 돌아오니 날이 완전히 개어서 해변으로 슬슬 내려가 본다. 아… 이건 도무지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하늘이구나. 하늘이 상기된 얼굴로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더니, 금세 하늘과 바다에 핏빛을 토해낸다. 온 세상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갯벌이 발자국을 남긴다. 먹먹한 마음으로 주변이 어둑해질 때까지 해변에 있다가 사이트로 돌아와 모닥불을 피우며 점심 먹다가 남은 피자와 맥주를 마셨다. 캠핑장에서 산 장작은 여전히 젖어 있어서 이건 장작을 쪼개는 건지 질긴 고기를 뜯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이 붙었다. 아.. 이번 캠핑은 날씨가 안 도와줘도.. 요리를 안 하니 이렇게 쾌적할 수 있구나.






덧 : Sobo는 2023년 9월에 식당을 폐점하고, 온라인 주문만 받는다고 합니다. 자세한 소식은 http://sobo.ca/ 를 참조하시길







다섯째 날


또 이삿날. 애초에 캠핑장 예약을 다 늦게서야 한 터라 이번 캠핑 동안에는 4개 사이트를 전전해야 하는데, 이번이 그 세 번째 사이트로 가는 날이다. 게다가 국립공원은 중간에 일정을 추가한다고 해서 예약비가 추가로 결제되지 않는다는 걸 예약 당시엔 알지 못해서, 앞으로의 3박은 내 이름으로 예약을 하는 바람에 새롭게 체크인을 해야 했다.


일단 비가 안 오니 이번 캠핑 처음으로 바비큐를 꺼내서 피자를 굽는다. 아내가 백 선생 레시피를 참조해서 개발한 이 피자는 토마토소스 대신 그릭 요구르트를 발라 그 위에 양파, 토마토, 페퍼, 치즈 등을 얹어 굽는 것이 특징. 바비큐로 아래를 어느 정도 구운 후 토치로 윗부분의 치즈를 녹인 다음 아르굴라를 얹어서 먹는다. 이사 준비를 좀 하다가 햇볕에 나와 앉아 아침을 먹고 나니 슬슬 사이트를 비워줄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사이트는 15번. 화장실이 어제보다 많이 가까워졌구나. 마음껏 버터 가득 음식을 먹어주겠어. 다시 트레일러 설치하고 짐 다시 풀고... 하하하 이제 이사도 경력이 쌓이니 순식간이네. 새 사이트에는 햇볕도 잘 든다. 얼른 발매트며 의자며 그간 젖은 물품들을 가지고 나와 햇볕 좀 쐰다.


IMG_0264.jpg 이게 얼마 만의 햇빛이냐


캠핑장 입구에 가서 체크인을 하면서 관리인 할머니랑 수다를 좀 떨었는데, 밴쿠버 동쪽에서 살면서 여름 동안 여기로 배치되었단다. 우왓 부럽다고 했더니 여름엔 정신없이 바빴단다. 그렇지… 크리스마스도, 부처님 오신 날도 그쪽 종교 성직자들 입장에서는 그냥 미친 듯이 바쁜 날일테니, 다른 사람의 노동 환경을 쉽게 예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날이 좋으니 의자를 들고 해변가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린포인트 해변은 여기 캠퍼들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딱히 게스트 주차장이 없으니 다른 곳에서 어떻게 올 방법이 없긴 하다. 암튼 여름 성수기가 끝나서 그런지, 학생들 방학이 끝나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여기 캠퍼들은 이곳 해변을 그다지 인정을 안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멋진 해변을 거의 우리가 전세를 낸 기분이다. 간만에 화창한 날씨를 보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한참을 걷다가 적당한 곳에 의자를 펴고 앉아서 파도를 구경한다. 예전 꼬마 바이킹 비키’라는 만화영화 주제가 중에서 "멀리 있는 저 바다도 무섭지 않아~"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러고 보니 저 멀리에 있는 파도는 왠지 집채만 해 보인다. 그게 커다란 포말을 그리면서 부서져 내려오면 해안까지 멀리 밀려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평양 (太平洋)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좀 더 잔잔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저 커다란 파도도 써퍼들을 토피노로 유인하는 것들 중 하나겠지. 썰물인 줄 알았는데 파도가 점점 안으로 밀려들어오더니 급기야 카메라 삼각대 아래가 물에 잠기고 말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삼각대 다리가 접히는 부분마다 물과 흙이 잔뜩 들어있는 걸 발견한다. 아... 이렇게 또 일을 만드는구나. 앞으로 바다에선 항상 삼각대 맨 아래쪽 다리를 완전히 펴서 사용해야지


IMG_0266.jpg 흑흑 ㅠㅠ. 삼각대에 묻은 바닷물과 흙을 닦아 내고 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플루비오 (Pluvio)'라고 하는 유키에 있는 식당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토피노, 유키를 통틀어 가장 근사한 요리를 선보이는 것으로 알려진 식당으로 얼마 전 에어캐나다 항공사에서 선정한 캐나다 식당 베스트 10에도 선정된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번에 한번 지나가다가 슬쩍 본 적이 있는데, 외관상으론 전혀 으리뻔쩍하지 않은 것이 그냥 깔끔한 분식집 스타일이었다. 식당에서 같이 경영하는 숙소 역시 겉으로 보기엔 포천에 있는 펜션보다 초라했다. 뭐 그래도 겉으로만 봐선 모르는 것도 많으니까. 암튼 덕분에 점심은 간단하게 칼로리바로 때우기로... 요 며칠 과식을 했더니 속이 계속 더부룩한 것이 오늘 저녁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녁 5시 반에 예약이니까.. 근처에서 가볍게 산책이나 해보자고 한다. 유키에는 '와일드 퍼시픽 트레일 (Wild Pacific Trail)'이라고 해서, 아주 남단에 있는 등대를 주변으로 한 2.6km 정도 되는 환상 (loop) 산책로가 있고, 또 주상절리대로 이어진 남쪽 해변 따라 왕복 10km의 산책로 및 전망대를 만들어 두었다.


2016년에도 친구들과 같이 와서 보고 감탄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었다. 사슴은 물론이고, 물개나 수달 같은 해양동물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인간들은 어쩌자고 이런 걸 이렇게 잘 보존해 두는가? 세금을 많이 걷어서 그런 건가? 게다가 인구밀도가 적어서 그런 건지 산책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우 없이 쾌적하기 그지없다. 나이가 드니까 확실히 경치를 보고 감동하는 일이 생기는구나. 다음번에 한국에 가면 한번 태종대에 가볼까? 산책 처음에는 그렇게 전망대마다 가서 사진 찍고, 우와아아 감탄하고 그러다가, 시간을 보니.. 어이쿠.. 식당 예약까지 얼마 안 남았네, 하며 서둘러 나머지 산책로를 파워워킹으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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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도착하고 아직 오픈까지 몇 분 남아서 메뉴판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잠시 후 주인아줌마 '릴리'가 나와서 반갑게 맞아준다. 작은 건물 내부 면적의 반을 오픈형 주방 (그래도 유리창으로 가려져 있다)이 차지하고 있고, 막상 테이블은 몇 개 없는 것이, 아.. 이 사람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다. 주방에선 어떤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신중하게 뭔갈 세팅하는데.. '어.. 저 사람.. 홈페이지에서 미역 따는 사진에 있던 그 사람인데..' 등등 생각을 하면서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유리창은 뽀얗게 틴팅이 되어서 경치라곤 볼 수 없다. 물론 봐 봤자 그냥 찻길이겠지만.


아내는 이 집의 와인 테이스팅 메뉴. 나는 계속 속이 더부룩한 관계로 굴 요리와 링코드 (Lingcod 대구 과의 생선) 배추쌈 요리 두 가지에 이탈리안 레드 와인만 시킨다. 처음에 빵과 (사케를 첨가한) 수제 버터가 나오는데 띠요오오오옹.. 너무 맛있다!! 여기 요리사.. 완전 고수 중에 고수다. 버터 하나로 이렇게 놀라움을 주다니. 최근 거듭된 유지방 섭취로 속이 안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버터는 꼭 먹어야 해!! 아주 짙은 고소함이 있는데도 전혀 느끼하지 않다. 그리고 덩달아 나온 스낵 (시치미를 뿌린 방울토마토와 연어/파프리카) 역시 아주 상큼해서 앞으로의 식사에 대해 기대를 갖게 했다.




곧이어 나온 일일 해산물 전채도 놀라움의 연속. 광어와 대구살을 살짝 익힌 후 잘게 썰어서 세비체 형식으로 담았다. 레몬즙 베이스 소스에 멜론 같은 뭔가 다른 과일도 첨가해 넣은 듯싶었는데, 여느 타르타르 요리처럼 바게트나 프랫 브레드와 같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 집에서 만든 검은 칩과 같이 나왔다. 뭔지 물어봤더니 오징어 먹물을 넣었단다. 어쩐지 고소한 해산물 향이 나더라니. 여기에 페어링 된 와인은 펜틱턴 지역의 BC 와인 ‘판당고 Pandango. 식당 말로는 가능하면 로컬 해산물, 농산물과 로컬 와인을 쓰고자 한다는데, 너무 달콤하지 않으면서도 식욕을 돋우는 상큼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분명히 테이스팅 메뉴로 주문했는데 와인을 글라스에 가득 채워준다.. 어이쿠, 이렇게 많이 코스로 먹다간.. 아내가 끝에 가서 꽐라 되겠는데.. 싶었는데 나중에 웨이터가 와서는 실수로 너무 많이 채워줬다고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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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첫 번째 메인 요리로 내가 주문한 굴 요리와 아내의 광어 컨핏이 같이 나왔다. 굴 요리는 모토야키처럼 껍질째 구운 것이 아니라 따로 버터 팬프라이한 굴에 감자 무스를 얹은 것으로 부드럽지만 진한 굴 향이 살아있는 요리였다. 그 안에 수제 싸우전드 아일랜드 소스가 들었다 해서 의아했는데 머스터드 베이스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린내를 잡았다. 우와. 머스터드 베이스의 싸우전드 아일랜드 소스는 처음 봤다. 싸우전드 아일랜드 소스가 이렇게 깔끔할 수 있구나. 광어 컨핏은 광어의 부드러운 질감을 살린 채로 작은 케이크처럼 만들었는데, 잘게 다진 광어 세비체와 복숭아와 같이 나왔다. 페어링 와인은 Ava라는 BC 올리버 지역의 와인이라는데 백포도주임에도 묵직하고 스모키 한 맛이 광어 요리와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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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메인은 아내가 고른 안심 스테이크와 내가 고른 링코드. 에이이이이이.. 그렇다니까. 이게 안심 스테이크지. 엊그제 위카닌니시 식당에서 먹은 건 안심이 아니었어. 이렇게 부드럽게 칼이 쑥쑥 들어가야 안심이지. 하하하. 하며 즐거워했다. 어쩌면 이 식당에서는 이 작은 사이즈의 고기를 굽더라도 한 테이블 분량만큼 따로따로 구워서 이렇게 부드럽고, 포인트 레스토랑에선 같은 안심을 쓰더라도 좀 많은 양의 스테이크를 한 번에 구운 다음 테이블마다 잘라서 서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안심 스테이크만 먹었을 땐 음.. 소스에 좀 더 새콤함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는데, 페어링 된 남프랑스 레드 와인을 마시자마자 완벽한 조합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XO소스를 발라 바짝 구운 케일과 이 지역 야생버섯이 같이 나왔다. 링코드 요리 역시 참신함의 연속. XO소스를 발라 구운 절인 배추(백김치의 느낌)와 버터에 구운 링코드를 케일로 싸서 나왔는데, 여기에 말린 조개관자를 갈아서 뿌려 풍미를 배로 만들었다. 아하하… 이렇게 복잡한 요리가 이토록 직설적인 맛이 나다니. 프렌치인지 중화요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구운 생선을 김치에 싸 먹는 편안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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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얼마 안 다녀본 이른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은 모두 근사한 분위기와 멋진 요리의 향연이었지만, 글쎄.. 그 요리들이 과연 맛있었는지는 그렇게까지 기억에 나질 않았다. 위카닌니시의 포인트 레스토랑만 하더라도, 오.. 정말 사치스러운 경험, 근사한 여행지 파티에 다녀온 느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음식 경험 만으로 충격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파인 다이닝 -웨스트 코스트 혹은 프렌치- 식당에 다녀온 후에 꼭 동네 초밥집에 가본다던가 중국집에 가서 진정한 외식의 욕구를 채우곤 했는데, 이곳 플루비오는, 정말이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선입견을 깨 주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미 버터에 부대낀 속이었는데도 엄청나게 먹었다.


코스 메뉴의 디저트는 수제 자두 셔벗과 패스트리 / 무스가 나왔는데 2중으로 된 패스트리 안에는 칼다몬이라는 인도풍 향신료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때쯤 되자 배가 너무 불러서 (그리고 유지방으로 가득 차서) 나는 그냥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시었다. 요즘은 고소한 커피보다 신 커피가 유행이라더니, 뭐.. 덕분에 술이 확 깬 것 같아서 좋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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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외식 경험을 한 것 같아 아내나 나나 둘 다 아주 흥분해서 당장 다음날 예약을 또 잡을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그럴 거면 당일 아침에 전화하기로 하고 일단은 식당을 나섰다. 아이스 박스에 채울 얼음과 내일 아침 준비를 할 페스토 등등을 사서 (그리고 모닥불 쏘시개로 쓸 박스 종이를 좀 집어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자기 전에 와인을 한잔 더 하고 자려고 했는데.. 왠지 배가 너무 부글부글 해온다. 아.. 이제 한계구나. 배가 버터 유지방으로 가득 찼구나. 그동안 너무 즐겁게 잘 먹고 잘 놀았다. 이것으로 토피노 먹거리 탐방기를 마칩니다.


이어서 토피노 화장실 탐방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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