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퍼시픽림 국립공원 - 그린포인트 캠핑장 #3 (2019년 9월 14일)

by 그래도 캠핑

둘째 날


일요일이다. 원래 어릴 적부터 TV에서 만화영화를 해주던 일요일 아침에는 새벽같이 눈이 떠지곤 했지만, 지난밤은 음주가 없었었서 그런지 더 일찍 눈이 떠진다. 하지만 감기 기운 때문에 몸이 좀 묵지룩해서 좀 더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워본다. 그 사이 아내가 일어나서 먼저 화장실에 간다. 밖에선 빗방울 소리가 여전히 들리고…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빗줄기가 더욱더 거칠어진다. 아... 아까 마누라 따라갔다 올 걸. 일기예보를 보니 9시가 넘어서야 비가 그친다는 정보다. 우산을 쓰고 일단 갔다가 와야겠다 싶다.


보통 캠핑을 할 땐, 조용한 숲에서 아침엔 새의 지저귐과 음악을 들으면서 핸드 그라이더로 원두를 갈고, 주전자로 끓는 물을 조심스럽게 부어서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만든 드립 커피를 마시면서, "우와… 난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라는 자족감에 취한 아침을 시작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 캠핑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콘셉트라서 아예 집에서 네스프레소 기계를 가지고 왔다. 부아아앙하고 10초 만에 만들어진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첨가한 아메리카노도 핸드드립 커피만큼 향이 좋았다. 어느새 빗줄기도 천천히 약해지고.. 스피커에선 퀸시존스의 ‘셉템브로 : 브라질리언 웨딩송 (Septembro : Brazillian Wedding Song)’ 이 흐르면서, 창문 밖 비가 막 그친 숲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자니 이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20190915_095339.jpg 흔한 RV 캠핑의 아침 (더러움 주의)



식사를 마치고 캠핑장 산책을 할 겸 오늘부터 사흘간 신세를 질 44번 사이트가 비었는지 구경을 갔다. 국립공원 캠퍼가 BC 주립공원 캠퍼와 다른 점이, (워낙 외지에서 많이들 와서) 길 가다가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잘 안 한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캠핑 사이트 철수도 아침부터 일찍 한다는 점도 다른 것 같았다. 아마도 마지막 날 집으로 가는 이동 일정이 주립공원에서 캠핑하는 동네 주민들에 비해서 더 빡빡해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44번 자리가 빈 걸 확인하고 나서 우리도 슬슬 짐 챙겨 트레일러를 옮긴다.


35번에 비해 44번은 전체적으로 협소하고, 진입로도 좁고, 화장실에서 먼 데다가, 국도변과 가까워서 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잘 들린다는 많은 단점이 있었으나, 우리가 처음 캠핑장을 예약할 때만 해도 이 사이트만 비어있었으니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그린포인트 캠핑장에서 베스트 사이트들 리스트를 쉽게 찾을 수는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쉽게 예약이 가능한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뭐... 여전히 그린포인트 해변엔 쉽게 갈 수 있으니 불만도 없다. 말 나온 김에 천천히 내려가서 맑은 날의 해변을 걸어 본다. 의자를 가지고 내려가 밀물이 들어올 때 그 위에 앉아있어 보고 싶다는 소원도 이루어 보고.. 어쩌면 이렇게 해변이 텅 비었나.. 완전 개인 해변을 전세 낸 듯싶다.


20190915_122412.jpg



새 사이트에 자리를 잡고 세팅을 마치자 날이 천천히 개기 시작한다. 점심 먹을 식당 검색을 해보다가 일단 '유클렐레 (Ucluelet, 이하 '유키 (Ukee)'로 표기)'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린포인트 캠핑장은 정확하게 토피노 다운타운과 유키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어디로 가든지 20분은 운전을 해야 한다. 토피노가 오랫동안 써퍼들의 성지로 추앙받고 관광도시로 성장하는 동안 유키는 어업과 일반 산업 중심으로 동네가 발전하였고, 시내에도 토피노보다 생활 밀착형 비즈니스가 많다. 최근 들어, 유키 해변의 아름다움이 재발견되어 주변에 리조트도 많이 생기고, 멋진 식당들도 많이 들어서고 있는 형편이다.


애초에 가려고 했던 ‘레이븐 레이디 (Raven Lady)’라는 굴튀김 전문 푸드트럭이 여름 시즌을 마치고 휴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유키 남쪽 해안에 있는 '블랙락 리조트 (Black Rock Resort)'에 있는 '페치 (Fetch)'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가보기로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기왕이면 경치 좋은 곳에서 먹어야지. 리조트는 유키의 '와일드 퍼시픽 트레일 (Wild Pacific Trail)' 근처에 있고 주상절리대 해안가 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레스토랑은 바로 그 최전방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경치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피시엔칩스와 함께 마신 스타우트와 라거 맥주는 각각 최고로 적합한 온도로 서빙되어 인상적이었다 (라거는 섭씨 5도 이하, 스타우트는 10도 내외에서 최상의 맛을 낸다고 한다). 또한 홍합 와인찜 역시 정갈하게 손질된 홍합이 나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런데.. 파티오 테이블에는 모기가 너무 많았다. 처음 아내가 모기한테 물렸다고 할 때만 해도.. 캠핑 오면 모기한테 좀 물리고 그러는 거지 머.. 하고 너그러웠는데, 내 다리에 여섯 방 이상 물리자, 식사 내내 보이는 처절한 응징이 진행되었다.




예전 2006년에 놀러 왔을 때만 해도 밴쿠버 레스토랑이나 식도락가들에게 가장 쿤 화두는 유기농 (Organic)이었는데, 최근 5,6년 사이에 관심사가 '서스테이너빌리티 (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 '로컬푸드 (Local Foods, 그 지역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요리)'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지구온난화가 가속되면서 사람들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 것일 텐데, 나 하나 건강하게 먹는 식품에서 전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식품을 선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토피노나 유키에서 잘 나가는 식당에서는 로컬 식자재를 사용한다든지 (근해에서 잡은 참치 등등), 자사 홈페이지에는 해변에서 미역을 따는 셰프의 사진을 올려 둔다든지 하는 홍보에 한창이다. 뭐 어차피 다 유행이고 마케팅이겠지만 이런 걸 보면 결국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좋게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도 든다.


식사를 마치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주상절리대 위에서 사진도 좀 찍어 보고, 타운 건너편 반대쪽 해안 (선착장)까지 걷기로 한다. 이 지역 예술가 디자인 샵 등 새로 생긴 비즈니스를 구경하다가 '피시풀띵킹 (fishful thinking)'이라는 생선가게에 들렀는데… 오.. 근해에서 낚시로 잡았다는 참치가 무지 싸다. 비록 냉동이긴 해도.. 저 정도 크기의 참치라면 밴쿠버에 가면 원양에서 잡은 걸 두 배 넘는 가격에 팔고 있다. 일단 참치를 얼른 집고 나니 가게 주인 청년이 조개관자도 회로 먹을 수 있는 품질이라고 귀띔한다. 이렇게 저녁 찬거리와 안주거리를 잔뜩 사들고 천천히 항구 – 선착장 주변을 산책하다가 캠핑장으로 돌아온다.




오늘 밤은 비가 안 올 듯싶어서 돌아오는 길에 캠핑장 입구에서 장작 4 묶음을 사 들고 왔다. 이곳은 다른 산악지역 국립공원처럼 캠프 파이어 퍼밋을 예약 시 미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립공원처럼 땔감을 현장에서 판매한다. 하지만 타 지역에서 가지고 온 장작을 사용하는 건 절대 엄금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전염병 때문일 것이다. 2011년에 처음 밴프 국립공원 터미널 캠핑장이나 자스퍼 국립공원 위슬러 캠핑장에 갔을 땐, 현장에 장작용 나무뭉치들을 쌓아두고 있었고, 그래서 큰 덩치의 나무 덩어리를 작게 쪼개기 위해서 커다란 도끼도 따로 장만해야 했었다. 그런데 여기선 또 캠프 파이어 퍼밋 필요 없이 장작을 그때그때 구매해서 모닥불을 필 수 있다니, 왜 같은 국립공원이면서 이렇게 다들 다른 방식으로 운용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그런 운용권은 각 공원 운영팀장의 직권으로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2016년에 왔을 땐, 이 캠핑장에선 아예 장작이 없다고 했었으니 토피노 지역이 록키 지역 국립공원보다 벌목량이 적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해보다가 너무나 순진하게 "어이구 나무가 보기보다 묵직하네." 하며 장작을 들고 왔는데... 살다 살다 이렇게 젖은 장작은 처음이다. 모닥불 피우기 시작하면서 한 시간 반 동안 별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엔 성공을 하긴 했지만, 이런 나무를 돈 받고 팔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양심적으로, 응?


IMG_0242.jpg



활활 타는 장작을 보고 있자니 술 생각이 났고, 불 피우기 직전까지는 점심을 너무 든든히 먹어 저녁을 먹지 말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참치와 조개관자가 있는데 맹술만 심심하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개관자는 알루미늄 포일 석쇠에, 참치는 기다란 꼬챙이 세 개를 끼워 애벌구이를 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근사한 타타키 요리가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괜찮은 참치를 그 가격에 사다니.. 어떻게 좀 더 사서 퀄리티를 유지한 채 집으로 가져갈 방법이 있는지 한참을 갑론을박하면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








셋째 날


놀 땐 아침잠이 별로 없는 편인데, 어쩐지 이날은 화장실이 아주 완전히 급박해질 때까지 침낭 속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그래도 어젯밤엔 따끈하게 매우 잘 잤다. 덕분에 감기가 뚝 떨어진 느낌. 아내는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엊저녁을 문자 그대로 배 터질 때까지 먹다가 곧바로 잠에 든 터라 아직 시장기는 없는 것도 있지만.. (사실 허기를 못 느끼는 것이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다른 사이트로 옮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아침에 최대한 늦게까지 이불속에 있다가, 천천히 아침식사를 즐기러 가보기로 한다.


대충 의관을 정리하고 나서 향한 곳은 토피노 '롱비치 리조트 (Long Beach Resort)'에 있는 '그레이트 룸 (Great Room)' 식당. 참고로 롱비치 리조트는 '롱비치 (Long Beach)'에 없고 '콕스베이 해변 (Cox Bay Beach)'에 있다. 저녁에 가게 될 '위카닌니시 (Wickaninnish)' 리조트'포인트 (The Pointe)' 레스토랑 역시 위카닌니시 해변이나 위카닌니시 섬에 있는 게 아니라 '체스터맨 (Chesterman)' 해변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사실, 이 롱비치 리조트가 수십 년 전에 세워졌고 그 당시에는 써퍼들이 이 주변 해변을 죄다 롱비치라고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물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붙인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식당에 도착하니 웨이트리스가 창가 자리를 곧 치워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한눈에 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고맙다. 이 리조트는 써퍼들이 종종 묵는 것처럼 보이는데 (해변까지 곧바로 진입로가 있고 서핑 보드 수납장도 같이 있다), 리조트 바로 옆에도 공용 해변 진입로 (Public accessible beach)가 있어서 호텔 숙박객이 아닌 써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식당 아래층으로 내려와 해변 진입로 쪽으로 가보니 이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비치바 (beach bar 해변 주점)가 있다. 멕시코에선 사방에 이런 식의 비치바가 널려 있었는데 토피노에 와서 보고 있자니 반갑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 여름이 아직 완전히 간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영업은 2시부터.


DSC02599 (1).JPG 한 때 북미 브런치 시장을 강타했던 괴식. 프라이드치킨 와플



해변을 걷고 있자니 많은 써퍼들이 파도를 타려고 바닷물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런지 저 멀리에서 오는 파도는 시커먼 것이 제법 무섭다. 어릴 적, 개인적으로 무슨 일을 겪고 나면 왠지 드라마 비련의 주인공처럼 속초나 경포대 밤바다를 보러 가는 청승을 떨고는 했는데, 정작 가보면 바다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저렇게 시커먼 뭔가가 저 멀리서 쿠르릉 쿠르릉 울곤 했었다. 시끄럽고 너무너무 추웠다!!! 그 무서운 파도를 여기 청춘들은 잡아 타겠다고 저렇게 동동 떠있으니 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IMG_0248.jpg



이번엔 아내가 감기 기운이 있는 건지, 저녁 약속을 가기 전까지 숙소로 돌아가서 낮잠 좀 자자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주변 해안이나 볼거리에 잠깐씩 정차했는데, Kapyông Memorial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가평 메모리알? 에이 저 가평이 그 가평이겠어? 무슨 원주민 언어겠지, 생각하면서 올라가 봤는데... 이 가평이 그 가평 맞았다. 추모비에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이 처참한 패퇴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군 및 타국 군대들이 하나둘씩 후퇴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캐나다군은 가평에서 끝까지 분투했다고 적혀있다.


추모비 옆에는 한국의 한려해상 국립공원과 이곳 퍼시픽림 국립공원이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적혀있다.



타국의 평화를 지킨다는 심정으로 이역만리 가난한 아시안 땅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인 젊은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 자식들을 그렇게 멀고 먼 사지로 보낸 부모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때만 해도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이 끝난 지가 얼마 안 된 때라서, 그리고 착한 나라들끼리 힘을 합쳐 파시즘을 무찌르고 정의와 평화를 지켜낸다라는 개념이 남아있을 때라 본인이나 자식의 용기를 자랑스러워했을까? 그렇게 목숨 바쳐 지킨 나라의 대통령이란 작자가, 사실 북한을 침공해서 북진통일을 하자고 매일 선동을 한 사람이며, 전쟁이 나자마자 시민들을 뒤로한 채 자기만 살려고 도망간 후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전후에는 거대한 부정축재를 해왔으며,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그걸 규탄하는 학생, 시민들에게 총질을 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얼마나 원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모비 말단에 끝까지 싸운 캐나다 중대의 용기가 (한국 대통령도 아니고 영국 여왕도 캐나다 총리도 아닌) 미국 대통령의 찬사를 받았다는 말이 적혀 있는 걸 보자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추모비가 저 멀리 태평양의 수평선까지 시야가 뻥 뚫린 곳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았다. 저 수평선 너머에 당신들이 싸워서 지켜낸 나라의 사람들은, 지금도 좀 더 나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


가평 메모리얼을 지나 롱비치 해변에도 잠깐 들른다. 보통 롱비치라 하면 여기 밴쿠버 섬 서부에 가장 길다는, 그린포인트 해변과 컴버스 해변 (Combers Beach), 위카닌니시 해변 (Wickaninnish Beach)을 다 포함하는 10km 정도 되는 이 해변 전체를 말할 때도 있지만, 사실 관광객들이나 써퍼들이 찾는 롱비치는 여기 '인시너레이터 바위 (Incinerator rock 소각로 바위?)''러브킨 바위 (Lovekin rock)'가 있는 이 해변이 되겠다. 여긴 4번 국도에서 그냥 휙 들어오면 되고, 주차 시설도 번듯하고, 무료 공용 화장실에 샤워 시설까지 으리번쩍하게 잘 되어 있다 (주차요금은 국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지만, 입장 패스가 없다면 별도로 주차요금을 내야 함). 뭣보다 주차장에서 해변까지 10여 미터 평지만 걸어가면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써핑 수트로 갈아입고 보드를 들고 바다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2006년에 왔을 땐 저렇게 번쩍이는 화장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그린포인트 캠핑장 화장실을 개보수하면서 덩달아한 듯싶다. 암튼 토피노의 롱비치에는 해변 진입로 및 주차장이 몇 군데 있는데, 여기 소각로 바위 주차장, 롱비치 주차장, 컴버스 해변, 위카닌니시 해변, 그리고 그린 포인트 캠핑장이 있고, 그중 그린포인트는 캠핑장 전용이다. 핫시즌이 끝나서인지 아니면 일 년 동안 여기저기 순환해서 개방 및 정비를 하는 건지 몰라도 접근이 폐쇄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2006년에 왔을 때에도, 2016년에 왔을 때에도 그랬었던 거 보면 아마도 순환정비가 맞는 듯. 이번엔 '슈너스코브 (Schooner’s cove)''그라이스베이 (Grice Bay)'를 닫아 두었다. 그러고 보면 '슈너스코브'는 지난번에 왔을 때에도 닫혀 있었던 것 같은데...


캠핑장에 돌아오니 햇빛이 난다. 해변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음.. 오늘은 잠깐 낮잠을 자기로. 사실 멕시코에 갔어도 이렇게 먹고 자고 바다 보고.. 그런 거의 연속이었을 테니까, 딱히 기념비적으로 놀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말했던 대로..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멕시코. 자명종까지 맞춰 놓고 아주 뿌듯하게 낮잠을 잔 후 일어나 슬슬 나갈 준비를 한다. 뭐 딱히 결혼기념일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위카닌니시 리조트의 '포인트 레스토랑'에는 예전에 한번 왔다가 가격표에 주눅이 들어 크랩케이크 두 쪽만 먹고 나온 슬픈 기억도 있고, 이번 가을 휴가 주제 중 하나가 멕시코 리조트에 가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이라,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이 식당에서 이번엔 좀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보고 싶었다. 요즘은 토피노니 유키니 젊은 세프들이 창의적인 요리를 하는 식당도 많아져서, 반드시 이 식당이 이 근방 최고의 식당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체스터 비치 주상절리대 위에 자리 잡고 360도 창을 통해서 해변과 노을을 같이 볼 수 있다는 점만큼은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워낙 유명하고 전통 있는 곳이라 서비스도 최고라고 하고, 그래서 결혼기념일 식사를 무리를 해서라도 여기서 하고 싶었다.


어제 예약 전화를 하면서 창가 테이블로 부탁을 했는데, 특정 테이블 위치 예약은 호텔 숙박 손님만 가능하다고 한다. 결혼기념일까지 들먹이면서 좀 해달라고 땡깡을 부렸으나 (이게 아직 캐나다에선 잘 먹히긴 한다), 최선의 테이블로 안내하겠지만 그래도 호텔 규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줸장. 일단 갔다가 자리가 안 좋으면 그냥 나올까 등등을 고민하면서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근데.. 식당에 들어서자 식당 입구에서 우리를 환대하는 리셉셔니스트부터, 음식이 한 차례 서빙될 때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설 때까지 결혼기념일 축하한다고 계속 반복하는데 정말 귀에 딱지가 앉는 줄 알았다. 심지어 우리를 위해 새로 메뉴판을 만들어 커다랗게 '축. 결혼기념일 (Happy Anniversary)'라고 써놓기도 했다. 아이쿠.. 내가 정말 대단한 사실을 누설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지역 방송에 광고를 낼 걸. 뭐.. 덕분에 창가 자리를 획득하긴 했다.


IMG_0255.jpg
먼저 간 강아지의 발자국도 같이 왔다


모처럼 기분을 내러 온 것이니 식당에서 추천하는 와인 테이스팅 메뉴를 먹어보기로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레스토랑이 BC주에서 가장 큰 와인 셀러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글라스 와인 프로모션을 할 때 최고의 셀렉션으로 한다는데, 이 기회에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웨이터에게 와인을 이만큼 마셔도 운전할 수 있을까 물어보았더니, 6온즈 (200ml)로 5잔 정도 나오는 건데 원한다면 와인 한 코스를 2명 분으로 나눠서 서빙해주겠다고 한다. 식당에서 이런 작은 배려를 받을 때마다 왠지 그 식당의 클래스가 확 달라져 보인다. 북미에서는 소매업이나 식당처럼 고객 서비스를 하는 업종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담당자가 재량껏 할 수 있는 권한의 폭이 넓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상황을 겪게 되면, 아니 실제로 서비스를 받지 않더라도, "잠깐만.. 내가 뭘 해줄 수 있나 한번 찾아볼게"라는 립서비스 만으로도 쇼핑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무슨 아트웍 같은 조그만 요리들의 연속으로 이렇게까지 배가 불러질 줄은 몰랐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첫 번째 전채 와인으로 나온 리즐링은 매우 상큼한 향기가 확 피어 나와 입맛을 돌게 했고, 두 번째 보르도 산 화이트 (소비뇽 블랑 70% 세밀리옹 30%) 역시 훈제 오리고기 (거의 생햄과 같은 질감) 요리의 풍미를 도와주었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조합은 첫 번째 메인으로 나온 은대구 (sablefish) 요리와 피노누와의 조합이었는데, 엥? 생선요리에 적포도주..? 하며 처음부터 의아해했었고, 와인 자체가 너무 복잡한 향기를 품고 있어서 좀 걱정했었지만 요리와 같이 나온 허클베리 / 루밥 소스와 절묘한 배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메인 와인으로 나온 2012년 산 GSM은 100년 넘은 고목에서 만든 와인이라던데.. 처음엔.. 응? 너무 밍밍한데 싶었다가 안심 스테이크와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게 마리아주인가, 싶었다 (안심 스테이크는 좀 질겼지만).



20190916_171613.jpg
20190916_174551.jpg
20190916_190611.jpg



이렇게 3시간 동안 풀코스 식사를 마치자 창밖은 어둑어둑해졌고, 안타깝지만 날씨가 흐린 탓에 석양을 볼 순 없었다. 게다가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 마지막으로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면서 나온 초콜릿은 뭐 그래도 이해가 가더라도, 오늘 식사 메뉴판까지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로 주는 건.. 음 나름 이 식당의 프라이드라고 봐줘야 하는 건가? 아님 이 메뉴판을 보면서 일 년간 또 열심히 돈 벌란 얘긴가? 암튼 서비스 하나하나가 귀엽다. 생각해 보면 어떤 근사한 식당에서 멋진 요리를 먹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이벤트를, 어떤 테마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 밤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게끔 해주는 자상한 서비스가 너무 고마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길을, 더욱이 무시무시한 4번 국도의 커브길을 운전하려니 좀 피곤했는데, 막상 캠핑장에 도착하자 여긴 비가 온 흔적이 아예 없다. ㅎㅎㅎ 이 동네는 무슨 날씨가 이런가? 하긴 캠핑장에서 식당까지 20km 가까이 되니 밴쿠버 시랑 코퀴틀람 시의 거리라고 생각하면 광역 밴쿠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아.. 오늘도 물을 너무 안 마셨네… 하며 집에 오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더니 벌써부터 새벽에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