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림 국립공원 - 그린포인트 캠핑장 #2 (2019년 9월 14일)
세 번째로 토피노에 오게 되기까진 사실 많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애초 구상으로는 지난여름 캐네디언 록키 여행을 갈 때 구입해 둔 캐나다 국립공원 연간 패스가 있었던 터라, 그럼 본전을 뽑자라는 심정으로 국립공원 캠핑을 계획했던 것이었지만, 날이 슬슬 추워지면서 왠지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쉬다 오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곧바로 멕시코 7박 코스 베스트 딜을 여기저기서 찾아보다가 지쳐 잠들기도 하였으나 지난번 멕시코 여행 때 기름진 음식에 너무 쉽게 질려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번에는 밴쿠버 다운타운 내 호텔에서 호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포함해서, 휴가 일정은 한 달도 훨씬 전에 결정되었지만 구체적 일정은 출발 바로 이틀 전까지 오락가락했었다. 결국 토피노로 결정해 버린 건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린 느낌이었는데, 토피노 관광지 주변으로 관광객 평점이 높거나 최근 비평가들에게 주목받는 레스토랑들이 대거 생겨났다는 걸 발견했고, 우리 휴가 일정에 마치 맞춘 듯이 특정 일자 시간 대에 RV의 페리 승선료 할인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멕시코 및 중남미 해안에 태풍들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거기에... 온라인으로 여타의 여행상품 쇼핑을 계속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완전히 질려버렸다. 멕시코 여행이 '올인클루시브 (All inclusive. 식사, 음료, 주류, 쇼 등등이 숙박과 해안시설 사용에 다 포함되는 것)'라고 해서 언뜻 저렴하게 보이지만, 일인당 하루 가격이 최소 200불 이상, 둘이서 하루에 400불 이상 쓴다는 것도 저어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특별히 카리브 해안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거면 모를까… 사실 그 정도 비용을 쓴다면 밴쿠버에서도 웬만큼은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세 번째 토피노행이 결정되었고, 이번 캠핑의 콘셉트는 '멕시코!' - 최대한 가볍게 가서 가사노동은 최대한 절제하고 그 동네 식당들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기예보는 일주일간 비가 오는 걸로 되어 있었고, 바로 직전에 캠핑장 예약을 한 탓에 일정 내내 이 사이트에서 저 사이트로 계속 메뚜기를 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스스로 슈퍼 J라고 자인하는 아내에게, 놀러 가는 계획을 세우는 건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즐거웠다.
BC 페리의 RV 승선료 할인 혜택을 받기 위해선 늦어도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서야 했다. 엊저녁 퇴근하고 나서 이제부터 휴가라고 마음이 들떴는지 평소엔 하지도 않던 테이블 바비큐를 했더니 곧바로 엄청난 뒷감당(기름 청소, 새까맣게 타버린 그릴 설거지 등)을 해야 했는데, 여기에 장기캠핑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준비하다 보니 아주 늦게서야 잠에 들었다. 게다가 새벽에 짐을 옮기느라 4시 반에 일어났더니 잠이 너무 부족한 상태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늘 비가 많이 오기로 되어 있고 게다가 토피노로 가는 4번 고속도로는 (지형으로나 기후 변화로나)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 이 컨디션으로 운전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일단 예약이 된 페리를 잡으러 뛰쳐나가 본다.
17번 고속도로 덕에 델타 남쪽 '트와슨 페리 터미널 (Tsawwassen terminal)'로 가는 길은 매우 쾌적하다. 예전에 토피노로 갈 때는 웨스트 밴쿠버의 '호슈베이 터미널 (Horseshoe Bay Terminal)'을 주로 이용했었는데, 이곳과 페리로 연결되는 나나이모의 '디파쳐베이 터미널 (Departure Bay Terminal)'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구간에 회전과 차선 변경이 많아서 트레일러를 달고 운전하기에 무척 불편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트와슨 터미널'에서 출발해 나나이모 남쪽에 있는 '듀크포인트 터미널 (Duke Point Terminal)로 가보기로 한다. 트와슨 터미널에 줄 서 있는 차량들을 보니 놀러 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들이 즐비하다. 여름휴가 시즌이 끝나고 대부분의 학교는 개학을 했다. 가을로 들어가는 시절, 그리고 밴쿠버의 유명한 비 오는 겨울이 슬슬 시작되는 것 같은 이 시기에 굳이 우리처럼 휴가를 가는 사연들은 무엇일까?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무겁다. 지난밤 와인이 과했나..? 생각이 들었다가 대합실 화장실에서 뜨근한 물에 손과 얼굴을 씻으니 온몸이 시원해진다. "어이쿠.. 감기였구나.. 휴가 첫날 감기라니… 이번에도 완벽한 휴가가 되겠네".
곧이어 페리가 도착하고 트레일러를 달고 다닌 탓에 늦게 탑승했더니 이미 선내 식당에는 길게 줄이 서있다. 그리고 그 줄은 쉽게 줄지 않는다. 북미에선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라 할지라도 아침식사를 주문할 땐 이것저것 추가하고 빼고 하는 등, 저마다 주문 과정이 장황하기 때문이다. 델타에서 밴쿠버 섬으로 가는 항해 시간은 약 2시간 남짓. 하지만 줄 서고 밥 먹고 하는데 1시간 반을 써버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한숨 자고 나서 밥을 먹을 걸 그랬다.
15분 정도 꿀잠을 자고 나서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듀크포인트 터미널'에서 토피노까지 200km 남짓. 하지만 악명 높은 4번 고속도로 탓에 한 3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다. 중간 지점인 '포트알버니 (Port Alberni)'를 지나치자 회전이 가파르고 낙차가 큰 도로가 슬슬 튀어나온다. 거기에 갑자기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이쿠.. 그래도 2006년에 차가 미끄러져서 벼랑에서 떨어질 뻔한 사고를 기억하면서 엉금엉금 기어간다. 군데군데 '금룡반점'이나 '써프정션'처럼 예전 여행의 추억이 담긴 곳을 보고 반가워하기도 하고...
마침내 도착한 그린포인트 캠핑장. RV 캠핑을 하다 보면 주행 중에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탱크를 비우고 오다가 캠핑장 입구에서 보통 물을 채우게 되는데 이것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캠핑장에 따라서 수압이 센 곳도 있고 골든 이어즈처럼 한번 물을 채우는데 30분가량 걸리는 곳도 있다. 체크인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캠핑장 호스트가 곰 두 마리가 발견되었었다고 하면서 '베어 캠핑 규칙 (Bare-Site policy https://www.pc.gc.ca/en/pn-np/mtn/ours-bears/securite-safety/camping-propre-bare-camp)'을 들먹인다. 저 놈의 곰 두 마리... 왜 모든 캠핑장의 곰은 항상 두 마리씩 나타나는 것인가. 안 그래도 캠핑 일정 내내 비가 하도 와서 트레일러 밖으로는 의자조차 꺼내놓지 못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토피노는 연평균 203일 비 오는 동네로 유명하다)
캐나다 서부 '퍼시픽림 국립공원 (Pacific Rim National Park)'에는 온 세상 써퍼들이 애정해 마지않는 '롱비치 (Long Beach)'라는 해변이 있는데, 롱비치 해변 근처 '그린포인트 해변 (Green Point Beach)'에 캠핑장을 만들어 두었다. 해안까지 접근이 쉽고, 화장실 시설이 완전 신삥이고, 국립공원이니 당근 전기 들어오고, 주립공원에 비해 예약비나 숙박비가 싸고…등등 아주 쾌적한 캠핑장이지만 예약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보통 직장 상황은 깡그리 무시한 채, 연초에 캠핑 계획을 일단 잡아 두고 나서 거기에 맞춰 일 년 휴가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에는 막판까지 갈팡질팡하느라 오늘 묵을 35번 사이트에선 하룻밤만 신세 지기로 했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비가 잠시 갠 상태였지만 어차피 밤새 비가 올 예정이고, 하루만 있다가 옮길 터이니 우천대책 같은 건 포기하고 간단하게 트레일러만 설치하기로 한다.
당초 계획으로는 트레일러 설치 후 일단 눈 좀 붙이며 휴식을 취할 요량이었지만, 막상 잠깐이나마 비가 멎은 상태를 보니 이때다 싶어 계획해 둔 트레일러 정비를 시작한다. 캠핑 트레일러도 결국 살림인지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데, 우리 같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평소엔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두기 때문에 집에서는 관리가 어렵고 이렇게 한번 나와야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먼저 지난 2년간 열심히 일을 해준 정수기 필터부터 교체하고, 그리고.. CH741 열쇠… 북미에서 만든 RV의 60퍼센트 이상이 같은 수납함 열쇠를 사용한다니 믿어지는가? 말하자면 내 열쇠로 다른 사람 RV의 수납함을 쉽게 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열쇠야 그럼? 만일 당신의 사물함 열쇠에 CH741이라고 쓰여 있으면 당신도 잠재적 도난 피해자 당첨! 암튼 이 사실을 알고 당장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무려 수십 군데에서 CH741 열쇠 교체용 실린더 키트를 판매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나온 김에 트레일러의 모든 사물함 열쇠 실린더를 교체했고.. 이러다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부터 반바지 차림으로 설쳐댔더니 여전히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아파왔다. 자연스럽게 뜨끈한 국물이 땡긴다. 그래서 오늘 식당은 라면을 주종목으로 하는 일식당 '쿠마 (Kuma)'. 토피노 시내 다른 관광지 식당들에 비해 가격도 착하고 나름 정통 일식의 맛을 볼 수 있어서 동네 젊은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재수 좋게도 대기줄 서지 않고도 쉽게 갈 수 있었다. 4시까지는 "해피아워 (Happy Hour 보통 오후 3시에서 6시까지, 그리고 밤 10시 이후 시간으로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는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기 때문에 음료나 간단한 스낵을 좋은 가격에 제공한다. 미국 도심지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밴쿠버에선 2010년 이후에 도입되기 시작되었다)" 라면서 라면을 포함한 저녁 메뉴는 4시 이후에나 주문받을 수 있단다. 어쨌건 먼저 뜨끈하게 데운 사케를 해피아워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 (2022년 6월에 다시 방문했을 때엔 쿠마 식당이 폐점하고 그 자리에 퓨전한식 레스토랑인 제주 (Jeju)가 개업한 걸 발견했다. 이곳에서 시식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BTS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속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었는데 뜨거운 술이 들어가니 오장육부가 확 느슨해지는 걸 느낀다. 치킨 카라아게 역시 달콤한 유자향이 있는 소금으로 간을 해서 상당히 맛이 있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즐기고 있자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되었고 곧이어 관서풍의 오코노미야키와 샬롯 피클을 곁들인 로컬 참치 타르타르가 나왔다. 오코노미야키의 경우 (어쩌면 당연하게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거의 깍둑 썰기한 양배추와 함께 시카고 피자처럼 두툼하게 나와서 아주 신선한 경험이었다. 여기에 참치 타르타르까지 바게트에 얹어 꾸역꾸역 먹다 보니 애 목표였던 라면을 먹을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 비 오고 으슬으슬한 날엔 뜨끈한 라면 국물이 딱인데..
캠핑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술도 좀 깰 겸해서 식당 근처 동네를 돌아다녀 본다. 여기가 말하자면 토피노의 다운타운인 셈인데, 정작 선착장 주변으로는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후줄근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몇 블록 지나서 이래저래 새로운 식당이나 상업지구들이 생겨나 이제 제법 관광지스러워 보이긴 한다. 배 타고 나가는 온천투어, 해상 사파리 투어 같은 것도 문의해 보고, "아… 저기 가봤었지, 오.. 저 식당 그대로 있네" 등등 회상에 잠겨 보다가 캠핑장으로 돌아오니 아직 날이 밝다.
하늘은 아직 잔뜩 찌푸려 있어서 "노을을 보긴 어렵겠지만, 뭐 그래도 한번... "이란 식으로 해변에 내려가 보았는데... 오오오... 오히려 이렇게 구름 낀 하늘이 갯벌에 반사되는 풍경이 굉장히 근사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우니 소금 호수가 이런 모습 아니었던가.. 여기에 꽉 찬 구름 틈 사이에 붉은 노을빛이 삐죽 나오자 갯벌도 덩달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하하. 역시 캐나다 바다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어. 멕시코, 카리브해가 다 무어람. 우린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는 거였어.." 이런 자뻑에 잠긴 채로 해변을 서성이며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있었다.
이렇게 돌아오니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모닥불 피우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늘은 일찍 쉬기로 한다. 전기 캠핑장에서는 굳이 트레일러에 있는 가스 퍼니스를 사용하지 않고 전기난로를 쓸 수 있어서 여러 모로 이득이다. 후드득후드득 빗줄기가 거세게 트레일러 지붕을 때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