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닛카 요이치 증류소 (2025년 10월 2일)
아이고... 머리야
요이치에 있는 닛카 위스키 증류소에 가는 일정 때문에 설레어서인지 새벽 5시에 깨어버렸다. 이렇게 일찍 깨기엔 어제 많이 마시기도 했고 말도 많이 한 것 같은데.. 엉엉.
닛카 위스키 증류소가 있는 요이치 (余市)는 삿포로에서 오타루를 지나 오타루와 니세코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일본 최초로 스카치위스키를 만든 타케츠루 마사타카가 산토리 위스키에서 독립하면서 스코틀랜드와 가장 유사한 기후를 가진 지역을 찾아 스스로 증류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위스키의 경우 증류와 함께 장시간 숙성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건립 초기에는 회사 재정을 위해 한동안 사과주스를 만들어 팔았다고 하는데, 그때의 이름이 대일본 과즙 주식회사 (大日本果汁株式会社, Dai Nippon Kaju)였고, 여기서 앞글자를 따 닛카가 되었다. 위스키 원액을 시음하며 블렌딩 하는 할아버지를 마스코트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삿포로 스스키노에서 가장 유명한 닛카상이 바로 그분이 되시겠다. 예전에 만화 <바텐더>를 읽었을 때부터, 그리고 이후 <맛의 달인>에서 또 소개되었을 때에도, 일본에 가게 되면 꼭 한 번 찾아가고 싶었던 곳 1순위였다.
어제 넉넉하게 걸어서 그런지, 아침부터 또 북24가 역까지 걸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숙취도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은혜롭게도 친구가 우버를 부르겠다고 한다. 대충 천 엔 안팎으로 나온다고 하니, 넷이서 버스를 타는 비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삿포로에서 요이치에 가기 위해서는 삿포로 역에서 열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기차표 하나 제대로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나. 발권기 위에 그려진 노선도에서 오타루 방면에 있는 요이치 역 번호를 찾아 구매를 했더니, 하코다테선을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엥? 하코다테라뇨. 오타루 까지 가는 열차 노선에는 하코다테가 없는뎁쇼. 오타루는 이나호랑 아사리를 지나는 위쪽 노선이고, 하코다테는 노보리베쓰, 히가시무로란, 도야 등을 지나는 아래쪽 노선을 타야 하잖아요. 색깔도 빨간색, 파란색으로 전혀 다른 색인데요. 숙취로 머리는 아프고, 평일 출근 시간의 삿포로 역은 무척 번잡했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귀가 웅웅거려서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코다테라뇨. 표를 잘못 샀나 싶어서 어느 기둥에 붙어있는 열차 시각표를 봤는데, 오타루 방면의 열차 시간이 맞기는 하다. 그런데 하코다테 선을 타고 가라뇨. 그건 뭔 말인가요.
나중에 알았다.
오타루에 가려면 하코다테 없는 하코다테 선을 타고 가야 한다는 걸. 홍철 없는 홍철 팀처럼.
오타루 역에 내려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서 세 정거장 정도 더 가니 요이치 역이 나왔는데 증류소 투어 예약시간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둔한 세 명의 숙취자들을 위해 해장 솔루션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름하여 청어라면. 응? 청어라니? 내가 청어를 먹어본 적이 있나? 과메기가 청어던가? 꽁치가 아니던가? 한국에서 꽁치나 정어리를 먹어본 적은 있어도 청어를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말만 들어도 무척 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서 아직 숙취가 남아있는 이 상태에서 한 숟가락이라도 먹었다가는 당장 게워낼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지만, 왠지 '청어라면'이라는 음식은 이 세상에 이곳 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 아니고선 먹을 수 없는, 팔아선 안 되는 음식을 먹는 것 같은 배덕감이 나를 자극했다.
알고 보니, 과거 오타루라는 도시가 번성했던 것에는 탄광업과 함께 바로 청어잡이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897년에는 한 해 어획량이 100만 톤이었다는데, 봄철 3달의 매출만으로도 현재 가치로 25억 엔 정도였어서 이름바 청어갑부들이 오타루의 상업발전을 이끌었다. 대개 기름을 짜서 쓰거나 나머지는 비료로 사용해서 메이지 말기의 일본 농업의 디딤돌이 되기도 했단다 (만화 <골든 카무이>에서 재인용). 그런 역사가 있으니 오타루 옆 동네 요이치에서 청어라면을 만들 생각을 안 해봤겠냐고요.
요이치 역에서 길 건너에 바로 있는 집에 오픈런해서 들어갔는데, 입구에 식권을 뽑는 기계가 있어서.. 음.. 일반 라면집과 비슷한 분위기겠거니.. 했는데, 테이블이 하나다. 기다란 석재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벽을 보며 (참선하는) 먹는 구조였다. 음.. 이건 뭔가요? 알고 보니 예술하는 집이었네. 점점 더 불안해진다. 일반 대중 음식점이라면 적어도 청어 비린내를 빼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법한데... 이 집은 왠지 정면 승부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국물 한 숟갈 뜨자마자...
아...
입안에 청어 수십 마리가 팔딱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나쁜 의미로). 오오오오 대단하다. 청어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누가 먹더라도 이건 청어 에센스구나. 근데 내가 이런 걸 먹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아봤더라....
상상의 도움을 위해서 덧붙인다면, 혹시 오메가 3 연질캡슐을 실수로 씹어먹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의 냄새. 등 푸른 생선의 기름이 입안에 흥건해지는 그 느낌. 기억의 소환조차 하고 싶지 않은 냄새였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는, 태어나서 라면 국물을 다섯 숟갈 이상 남긴 적이 없다. 배가 부르거나, 라면을 한 번에 세 봉지 이상 끓여 먹던 젊은 시절에도, 차라리 수프 양을 줄여 국물을 조절하더라도 국물을 안 먹고 버린 적은 없었다. 아까와서 그렇다기보다는, 왠지 얌체짓하는 느낌이어서 그랬다. 피자 가장자리는 안 먹는 것처럼. 물론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아니고 다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처음으로 국물을 남겼다. 도저히 못 먹겠더라구요. 엉엉엉. 이러니 잘 나가던 뉴웨이브 라멘 식당들이 망해가는 거 아녀요. (그래도 이번 홋카이도 여행 동안 별로 경험하지 못했던, 음식 냄새가 옷에 배지 않는 식당이었습니다. 이곳만큼은 환기 시설을 잘 갖춰야 한다는 걸 쥔장도 알았던 거죠)
전날 갔던 삿포로 맥주 박물관 투어가 '일본인', 특히 '홋카이도 개척자들'이 '서양 수준의 맥주'를 만들어 내는 것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얼마나 야마토 정신을 불태웠는지에 대한 찬양이었다면, 이곳 요이치 증류소의 투어는 타케츠루 마사타카 한 개인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가 스코틀랜드 유학을 무슨 경위로 갔는지, 그리고 돌아와서 어떤 식으로 위스키 증류소 설계를 했는지, 요이치 증류소 건설 초기에 아내 리타와 같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등을 설명해 주는데... 음... 국가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자신들 편의에 맞춰 재단한 역사를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존경심을 강요받는 것은 무척 지루한 일이다. 물론, 투어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자신들이 당연히 할 일이겠지만. 그렇더라도, 타케츠루가 야마자키 위스키 증류소를 세운 후 산토리와 어떤 연유로 헤어지게 된 건지 궁금했었는데, 그 당시 이야기는 증류소 설계도 청사진만 남아있었고, 그 이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 이곳에서의 위스키 증류공정에서 아직도 석탄을 손으로 퍼넣어 사용한다는 건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 직화증류 과정이 위스키 원액에 스모키 향을 좀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는 하는데,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닛카 위스키가 2000년 이후부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건 사실이니, 이런 맛과 향에 대한 그들의 세세한 집착이 결실로 돌아오는 걸 보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그리고, 투어에 참가한 사람도 알고 투어 가이드도 모두 알고 있는, 모든 양조장 투어의 백미는 시음회. 삿포로 맥주 투어도 마찬가지였지만, 투어 시작할 때부터 운전을 안 할 거라는 서명을 해야 하고, 시음회에서 술을 받기 직전까지도 운전을 할 것인지 질문을 받는다. 음주운전 처벌에 엄격한 일본 답다. 맥주 2잔의 시음이 포함되어 있는 삿포로 맥주 양조장의 프리미엄 투어는 인당 1000엔을 내야 했지만, 위스키 3잔 시음이 포함된 요이치 증류소의 투어는 무료였다. 물론 삿포로 시내가 아니라 요이치까지 기차 타고 오긴 해야 했지만, 그들의 대표작인 요이치 싱글몰트와 1963년 첫 출시된 대표적인 블렌디드 위스키인 슈퍼 닛카, 그리고 애플 와인을 1온스 정도씩 마실 수 있었는데, 각 음료를 마시는 추천법도 제공되면서, 탄산수나 얼음, 생수 같은 것도 카운터에서 직접 가져와서 각자 자신들 취향에 맞게 마실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요이치 싱글몰트는 역시 일본 위스키답게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복잡한 향을 잃지 않아서 입이 즐거웠다. 어쩌면 양조장 투어의 본질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창립자가 어떤 사람이든, 국가적으로 얼마나 노력을 했든지 술 자체가 꽝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게 우리가 만든 술입니다."하고 딱 보여주는 것. 술 자체로 자신들의 노력을 증명하는 것이 양조장 투어에서 할 일이 아닐지. (하지만 품질 우선을 모토로 경영했던 닛카 위스키는 재정난에 부딪혀 현재는 아사히 맥주 그룹 소유라고 합니다. 가이드 아저씨가 씁쓸한 얼굴로 "삿포로에서 오신 분들이 많겠지만 맥주는 아사히 맥주를 이용하시는 걸 부탁드립니다"라는 농담을 건네가도 했고요)
73년에 첫 출시한 '츠루 (鶴)'라는 이름의 블렌디드 위스키는 평론가들에게 받은 찬사와 더불어 극도의 희귀성 때문에 이곳 요이치 증류소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마침 재고가 있는 걸 발견했다. 가격도 아예 미친 가격은 아니었지만, 일단 내가 그 가치를 알 수 있을지 몰라서 유료 시음을 했는데, 음... 애매하다. 적어도 나는 잘 모르겠다. 워낙 귀한 술이라 술을 안 마셔도 되팔아서 수익을 얻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지런한 성격이 못 되기에, 일단 오늘은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