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가 여행에 미치는 영향

헛스윙의 하루 (2025년 10월 4일)

by 그래도 캠핑

1. 혈당 부족으로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2. 땀이 많이 나고 다리와 코어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3. 주변에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에 금방 반응합니다

4. 그냥 마냥 누워있고 싶어 집니다

5. 작은 소리에도 귀가 왕왕 울립니다

6. 식욕이 없어지고 목만 탑니다

7. 눈이 침침하고 시야가 좁아집니다







tempImagevvaZkH.heic 아침에 발견한 술병들. 하룻밤에 이렇게 마셨을리는 없고 친구들이 장난으로 어디서 구해왔나 봅니다. 아휴 참. 장난꾸러기들








이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온 아침이었다. 어떻게 잤는지 기억엔 없지만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씻지도 않고 누운 듯. 아놔... 이번 여행 준비하면서 그토록 과음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내가 일어난 기척이 보이자 옆에 있던 아내가 심하게 발길질을 한다. 아야, 촛대뼈를... 카프킥이란 게 누워서도 찰 수 있는 거였구나.


오늘은 민박집에서 나와 시내 호텔로 들어가는 날. 그리고 친구들과는 작별하는 날이다. 10시가 체크아웃이지만 친구들의 기차 시간에 맞춰 조금 일찍 준비한다. 오. 그러고 보니 어제 술 마시면서도 빨래니 옷이니 짐을 대충 싸놨던 것이 생각났다. 술 취하면 성실해지는 타입. 덕분에 오늘 아침은 마음 놓고 장청소를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겠군. 아침을 먹을 속이 도저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청소를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든 걸음을 옮길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 샌드위치, 숙취해소제 등을 사 왔는데 역시 별로 인기가 없더군. 컵라면 하나는 짐에 싸 넣기로.


냉장고를 비워야 하니 겸사겸사 재고 파악을 하는데 아직도 캔맥주가 있다. 핫핫핫. 어제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가뜩이나 무거운 짐인데 맥주까지 챙겨야 하겠네.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같이 술을 마셔줄 친구들이 아직 남았다는 게 내가 인생을 헛산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감상을... 하기보단, 그냥 잠시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있으려니 조금이라도 숙취가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친구가 우버 택시를 불렀다. 캐나다에서 공항택시라고 부르는 미니밴까지는 아니더라도, 네 명의 짐을 다 실을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크기였다. 형이 앞 좌석에 타요,라는 친구의 말이 고맙다. 속이 답답해서 뒷자리에 셋이 끼어 앉으려니 고충이 예상되었거든... 하면서 냉큼 앞자리에 앉았는데,


어라, 핸들이 있네?


1. 혈당부족으로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메구미 상의 "치가우요 (違うよ)!"라는 비명과 함께 뒤에선 그쪽이 아니라고 합창을 하고, 짐 싣는 걸 도와주던 기사님이 당황해하며 황급히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우핸들 운전석에 처음 앉아봤네요, 그래도.








삿포로 역에서 석별의 정을 나눈 후 일단 앉을자리를 찾았다. 왠지 엊그제 삿포로 역에 왔을 때에도 이렇게 숙취로 힘들었던 것 같은데.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오늘부터 신세질 호텔은 JR Inn. 말 그대로 JR (일본 철도 그룹)에서 전국적으로 운영하는 호텔인데, 삿포로 역 근처에도 여러 군데가 있다고 하고 우리가 가는 곳은 남쪽출구 근처에 있는 호텔이란다. 말이 근처지, 15분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고. 팔목 부상 때문에 캐리어가 아니라 배낭을 짊어지고 왔지만,




2. 땀이 많이 나고 다리와 코어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도무지 이 무게의 배낭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다행히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접이식 휴대용 카트를 단 다음 손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아이고. 삿포로 보도블록, 이거 어쩔 거야.



어찌나 개판인지 10미터 이동하는 와중에도 퉁퉁 튕겨서 가방이 이쪽저쪽으로 휙휙 돌았다. 당연히 손목도 휙휙 돌아가고. 그나마 온전한 왼손으로 끌고 가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라면 이것도 언제 고장 날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들쳐 매고 다닐 생각으로 무게 밸런스를 맞추느라 무거운 짐들을 배낭 위쪽에 쑤셔 넣었더니 더욱더 훼까닥거린다. 짐도 그렇고 몸 컨디션도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아서, 보행자 신호등 녹색 점멸을 무조건 빨리 뛰라고 해석하는 아내를 뒤쫓기 힘들었다. 조금만 천천히 가면 좋으련만. 게다가 역 근처엔 왜 이리 공사가 많은 건지. 결국 호텔에 도착한 게 10시 반 정도. 아놔. 삿포로 역에서부터 반나절은 걸어온 것 같은데. 일단 짐을 맡기지만 3시가 되어야 체크인할 수 있단다.



IMG_2333.HEIC JR Inn 삿포로 미나미 지점. 그리고 그 바로 앞 길은 공사중




3. 주변에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에 금방 반응합니다, 4. 그냥 마냥 누워있고 싶어 집니다.


몸을 좀 누울 곳을 찾아야 하는데, 아내가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검색해 찾아내었지만 바로 그 앞 길도 공사 중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공사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 빈번했으니 저길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빠꾸. 그래도 백화점이나 몰에 가면 몸을 기댈 곳이 어딘가에 하나는 있겠지 싶었다. 아내가 어제부터 찾아 헤맸던 피크민 갓챠가 도큐 백화점 9층 갓차월드에 입고되었는지 확인도 할 겸. 그런데, 짐이 없어도 여전히 다리가 천근이네. 공사 중인 지상도로를 포기하고 지하도에 들어왔더니 방향감각까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의자가 보인다.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아이고 좀 앉아야겠다. 계획 짜기 좋아하는 아내가 오후에 가 볼 식당을 체크하러 가는 동안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 이러다가 앞으로 쓰러지면 내일 아침 와이드쇼에 나오겠구나. 캐나다인 관광객 숙취로 쓰러져... 뭐 이런 식으로




5. 작은 소리에도 귀가 왕왕 울립니다


생각보다 가까왔던 도큐 백화점으로 올라가 보니 입구에서 인형탈을 쓰고 무슨 행사를 한다. 저건 '쿠마몬'인데. 일본 지자체의 마스코트들 중에서 압도적 인기 1위라는 쿠마모토 현의 쿠마몬. 쿠마모토에는 곰이 전혀 없지만 단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곰 캐릭터. 그나저나 저렇게 거다란 인형옷을 입고 액션을 하고 춤을 추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다. 그래도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다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조금만 조용히 해주면 더 좋을 텐데... 머리가 울려 오래 못 앉아있겠다.



인형옷도 수고가 많았지만 그 옆에서 사회 보는 사람 역시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실제 분위기를 이끄는 역할





6. 식욕이 없어지고 목만 탑니다



도큐 백화점 10 층에 있는 식당가에는 기다란 소파가 있었다. 헤헤. 이거거덩. 내가 그 먼 길을 식은땀 흘려가면서 걸어온 이유가. 일단 등을 기대앉으면서 3시까지 뭘 할지 생각을 해본다. 해장을 먼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떤 이는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피자나 햄버거로 해장을 한다는데, 지금 심정은 팥빙수였다. 수분과 당분으로 아세틸알데히드 분해를 가속화해야겠다 싶었다. 구글맵으로 검색을 해보니, 오 마침, 바로 옆에 디저트 가게가 있단다. 아, 그러네. 바로 여기 있네. 유리창에 있는 포스터에 크게 얼음 빙(氷)자가 쓰여있다. 어쩐 일이야, 이렇게 쿵짝이 잘 맞을 수가... 했는데


식사+디저트 세트가 인당 2300엔이랍니다.



그리고 음료를 추가하려면 400엔 추가




밴쿠버에서 둘이 외식을 하면 한 번에 50불을 쓰는 경우도 많으니 사실 무리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바가지다 싶었다. 역시 백화점이구나. 게다가 토스트나 와플 같은 건 도저히 속이 안 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기석도 만석이다. 아직 점심시간 아니지 않나?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적는데 가타카나로만 적으라고 쓰여있다. 그렇지. 한자로 쓰면 사실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고 외국인도 많이 올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렇게 대기 리스트에 이름 적을 상황에 대비해서 이름을 가타카나로 쓸 줄 알아야 하겠구나. 여기서 토스트나 샌드위치를 먹느니 차라리 조금 있다가 제대로 된 걸 먹으러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삿포로의 대표 음식 중 하나라고 하는 수프카레는 오기 전까지는 사실 전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수분이 많은 카레 국물 요리가 과대포장되었다고 멋대로 추측했었다), 지금은 어쩐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 Inktober라고 해서, 10월 한 달 동안 매일 달라지는 주제에 맞게 하루에 한 개씩 그림을 그려 올리는 온라인 행사가 있는데, 펜으로 색칠 없이 그리는 게 얼마나 걸리겠어? 하며 호기롭게 참가하기로 해버렸다. 미리 발표된 주제를 보고 어느 정도 미리 그려놓은 게 있긴 했지만 며칠 동안 놀고 마시느라 따라 잡혀버렸다. 어차피 놀러 다닐 체력도 안 되고 여기 소파에 앉아 그림이나 그리려고 아이패드를 꺼냈는데... 엥?? 애플펜슬이 어디 간 거지? 어제 술 마시면서도 숙제를 해야 한답시고 아이패드를 옆에 들고 있었던 것까지 기억나는데.. 아이고. 오늘 아침에 뭐 떨어진 거 없나 하고 두 번 세 번 확인했는데... 혹시 큰 배낭에 넣은 걸까? 그럴 확률은 거의 없지만 술김에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10월의 주제 (출처 : inktober.com).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도 많아서 더 힘들었다






7. 눈이 침침하고 시야가 좁아집니다


그래도 당장 그려야 하니까, 그리고 혹시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좀 싼 스타일러스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곳 도큐 백화점 5층 6층에 있는 빅카메라에 내려갔는데, 포장에 깨알같이 적혀있는 일본어로는 이 스타일러스에 내가 원하는 기능이 다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듯이 안 되는 기능을 왜 굳이 포장에 적어두겠냐고. 모델명으로 언터넷에 검색을 해봐도... 참 일본 사람들은 인터넷 리뷰를 잘 안 쓰는 모양이구나. 눈도 침침하고 허리를 숙여가며 파파고를 돌려가면서 검색을 하다 보니 더욱 피곤해졌다.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다. 일단은 사고 나서 좀 더 검색을 해야겠다.



왠지 좋은 기억이 있는 엘레컴 브랜드








홋카이도 여행이 결정되면서 일본 여행 전문 유튜브를 많이 찾아보았는데 그중 코드가 맞았던 몇몇 채널 중에 일본 여행 가이드가 운영하는 '오다마 ODAMA (https://www.youtube.com/@dama)'가 있었다. 그가 말하길 아카렌가 테라스라는 쇼핑몰 푸드코트에 가면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은 수준의 수프카레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괜히 스타일러스를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 푸드코트에서도 테이블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온갖 음식 냄새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몇 바퀴를 돌다 보니 간신히 창가에 자리가 하나 나왔고.


아내가 음식을 고르는 동안 엘레컴 스타일러스의 사양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해봤더니.. 아, 역시, 싼 건 이유가 있구나. 필압감지가 안 된단다. 태블릿에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필압감지가 필수적인데, 다행히 포장을 아직 뜯지 않았다.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 이마트에서 샀던 물건이 호환이 되지 않아 환불을 받으려고 했더니 포장이 뜯긴 상품은 환불이 안 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포장을 안 뜯고 어떻게 호환이 되는지 알 수가 있나,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북미 소매점의 적극적인 환불정책에 버릇이 나빠져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조금 검색을 해보니 일본에서도 포장을 뜯은 상품은 환불을 잘 안 해준다고 한다.


그나저나... 수프카레.. 오우, 죽이는데? 해장에 적격이다. 아무래도 홋카이도가 러시아와 가까우니 해장요리가 발달한 걸까? 이렇게까지 맛날 줄 몰랐는데.. 게다가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코코넛 오일의 향기까지 나는데도, 몇 숟갈 먹었더니 속이 사르르 가라앉아서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고 말았다. 마지막엔 눈물을 흘리면서 마셔버렸다. 이럴 수가. 속에 안 받을 것 같아 밥도 작은 걸로 주문했는데 큰 걸로 시켜도 될 걸 그랬어. 역시 음식에는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였어.




눈물 젖은 수프카레




스타일러스를 반품하러 다시 빅카메라로 향한다. 다리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어우 이 정도면 한참 더 걸어도 될 듯요. 계산대에 있는 점원에게 물어보니 환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헤헤. 기왕 이렇게 된 거 애플 정품을 사야겠다 싶었다. 잃어버린 2세대 애플펜슬은 가격이 아직 비싸서 무리일지라도, 새로 나온 USB-C 모델 애플펜슬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살만하다 싶었다. 5천 엔이 넘어 외국인 대상 소비세 환급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2세대 애플펜슬의 반값이라니... 무선충전이 안되고 유선으로만 충전을 해야 해서 그런가? 어차피 오래 써서 배터리도 간당간당했는데, 배낭에서 나오더라도 이건 백업용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걸 지르기로 했다. 요즘은 그림도 많이 그리니까.





1. 혈당 부족으로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USB-C 모델도 필압감지가 안 되는 걸 발견했다. 이번엔 포장도 까고 한참 그리고 난 다음에.



결국 캐나다로 돌아와 중고거래로 팔아버린 애플펜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