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았던 쇼핑이야기 (2025년 10월 5일)
한계를 극복하려는 상상력에는 중독성이 있다.
한 푼 두 푼 알바비를 모아 오랫동안 갖고 싶던 비틀즈 화이트 앨범을 사던 순간, 커다란 LP를 가슴에 안고 이걸 듣기만 하면 나 역시 예술가가 될 거라고 상상을 하며 가슴 설레었었다. 슬램덩크의 발간일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서점 앞을 서성대던 그때도 그랬고, 꼭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2시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을 때도 그랬다. 작품감상에 내가 투자한 나의 성의가 오롯이 기쁨으로 보상받는 느낌. 반대로 풍요가 주는 권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넷플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는 정작 영화는 보질 않은 채 카탈로그만 뒤적거리느라 시간을 보낸다. 스트리밍 서비스 구독으로 음악을 듣게 되면서 노래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이 줄어들었다.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기보다는 예전 10대 20대 때의 추억만 주물럭거리기 십상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급적이면 음악은 한계 속에서, 불편하게 들으려고 노력한다. 내 선호도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유튜브에서 추천한 노래를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해서 듣기보다는, 음반도 중고가게에 가서 직접 고르고, 듣고 싶은 CD나 LP를 꺼내서 직접 바늘을 올려두거나 CD 플레이어를 작동시켜서 듣는다. 이 한 음반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창작인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주면서 들으려 한다. 물론.. 감수성이 메마른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수업시간에 한쪽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몰래 듣던 예전 그 느낌, 그 한계의 극복까지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손바닥만 한 음향기기. 그것도 나노미터 수준의 IC 집적회로가 아니라 트랜지스터와 저항, 콘덴서 부품들을 얽히고설키게 연결해 가면서 최고의 음질을 재현하려고 하는 80년대 기술자들의 노력이 감탄스러웠다. 소니, 파나소닉, 아이와 모두 각각 기계의 특성이 있고, 메탈 테이프, 크롬 테이프 등의 매체 역시 한계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상상력의 소산인데 단지 자기 테이프의 소재만으로 이렇게까지 음질이 달라지는 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본에 가면 중고 워크맨들을 무척 쉽게 좋은 가격에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가 컸는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에는, 적어도 홋카이도에서 중고 워크맨을 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근마켓과 같은 범용 중고거래 앱이 어떤 게 있는지도 몰랐고, Merkari 등을 검색한다고 해서 직접 만나 픽업을 하는 것은 여행객으로서는 쉽지 않았다. 2000년 초, DVD가 모든 영상저장 매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 Book Off와 같은 중고서적 매장에서는 중고 LD 플레이어와 LD 타이틀들을 최저가에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걸 도무지 찾기 힘들었던 것.
여하튼 일본에서의 7일 차는 자유시간. (고맙게도) 아내가 처제와 시간을 따로 보낼 수가 있었기에, 난 나대로 (결과적으로 헛발질이었던) 중고가전 매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Book-Off 삿포로 매장에 먼저 가본 다음, 다른 중고매장을 뒤져볼 계획으로 일단 민박집주인이었던 메구미 상에게 애플펜슬을 건네받은 다음부터 움직일 생각이었다. 숙소 앞 길을 건너면 세이코 마트 (여기선 그냥 '세이코마'라고 부른다)라고 하는 홋카이도 한정 편의점 매장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도내은행 계좌만 사용할 수 있고 해외계좌에서는 출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걸어가 훼미리마트에서 출금 (660엔 수수료)과 교통카드 충전, 그리고 아침거리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어제 아침에 속이 버거워서 못 먹고 챙긴 컵라면이 아직 숙소에 있으니, 간단하게 (?) 주먹밥 두 가지와 샌드위치 한 가지만 사들고 왔다. 여행인데.. 한참 걸어야 하는데 이 정도는 먹어줘야죵.
그런데.. 젓가락이 없네.
아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샀다면 젓가락이 필요한지 물어봐 줬을 텐데.. 어제 챙겨 온 컵라면이라 젓가락 생각을 못했다. 주전자의 물은 이미 다 끓었는데 잠시 멘붕에 빠졌다. 길 건너 세이코마에 가서 컵라면을 하나 더 사 올까? 그럼 내일 도야호수로 이동할 때 또 컵라면을 들고 가야 할 텐데... 거긴 아침도 저녁도 호텔뷔페더만, 컵라면 먹을 시간이 있으려나..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칫솔.
호텔 어매니티의 하나로 일회용 칫솔이 방에 있었는데 캐나다에서 전동칫솔을 가지고 온 우리로서는 일회용 칫솔을 그냥 안 쓰고 남겨뒀던 것. 아이 참.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 와중에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플라스틱에서 환경 호르몬이 누출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국물을 충분히 식힌 다음 젓가락 질을 최소한으로 해서 후루룩 먹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칫솔 라면을 먹은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니 메구미 상이 분실물을 들고 직접 찾아와 주셨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말이지 수많은 고마운 일들을 겪게 되는구나. 일주일 후에 한국 관광을 떠나는 메구미 상은 서울 어딘가 커피숍에서 이름을 새겨주는 텀블러를 구입해 올 예정이란다. 자기 친구의 이름을 한글로 쓰는 방법을 물어왔는데, 한국에서는 된소리 (경음)보다는 거센소리 (격음)로 일본 단어를 발음하는 걸 선호한다는 걸 - 예를 들어 '아끼라'가 아니라 '아키라'라고 발음하는 걸 선호한다는 걸 설명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결국 그냥 내가 대신 써주는 걸로 갈음하고.
슬슬 짐을 정리해서 나섰다. 맨 처음 간 곳은 도큐 백화점 9층 갓차 플라자. 피크민 갓차 재고가 어제 도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제 오전에 왔을 때는 아직 없었다. 숙취 때문에 놓친 게 아니라 두 개의 갓차 머신이 텅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하하하. 오늘은 들어왔네. 서둘러 동전을 바꾼 다음에 돌렸더니 (1회 300엔) 시커먼 바위 피크민이 먼저 나온다. 어쩌면 이렇게 성의 없이 생겼을까. 왠지 같은 기계를 또 돌리면 같은 놈이 또 나올 것만 같은 기분에 옆 기계를 돌렸는데, 시커먼 바위 또 당첨. 엉엉. 이번엔 같은 기계 다시 도전... 아, 이번엔 제대로 된 게임 캐릭터가 나왔다.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더니 다행히 자신이 제일 애정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 다음 6층으로 내려와 소니 렌즈 구경을 한다. 아주 느긋하게. 며칠 전 다누키코지 소니매장에서 새로 나온 100mm Macro GM 렌즈가 전시되어 있는 걸 처음 봤었다. 우와아아아아... 이렇다고? 마침 렌즈 바로 옆에 시골역과 주변 풍경의 디오라마를 같이 전시해두고 있었는데, 그 작은 소품들, 철로, 간판, 전신주 등에 한 땀 한 땀 순차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얕은 심도로 칼날처럼 날카롭게 촬영할 수 있다니. 이 렌즈만 있으면 나도 스탑모션 애니메이션 한 편 뚝딱?
그런데 싸지가 않다. GM 렌즈니까 비싼 게 당연하다 하더라도, 환율적용, 10% 면세혜택까지 포함해도 캐나다 출시 가격 (+ 세금)과 비교하면 100불 정도 차이밖에 안 난다. 이 놈들이 환율 고려하고 엔화가격을 높게 책정했네. 여기서 산 제품이 캐나다에서 무상수리가 안 되는 걸 고려한다고 하면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10년 넘은 90mm G렌즈는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이렇게 오래된 모델은 차라리 캐나다 중고 마켓에서 사는 게 낫다 싶다. 마음을 못 정하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만 있는데 마침 10월 14일까지 제공한다는 10000엔 추가 캐시백 광고 문구가 들어왔다. 추가로 100불 더. 이 정도면 품질 보증 없어도 괜찮은 딜 아닌가 싶어 서둘러 직원을 불러 이게 무슨 뜻이냐고 더듬더듬 물어봤더니 쩌렁쩌렁 우렁차게 답을 해주었다.
고레와 자파니스 오니!!
넘 칼 같네. 외국인들은 면세 혜택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잘못한 일도 없는데 괜히 야단맞은 느낌이라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지만, 그 뒤로도 100mm Macro GM 렌즈 생각은 계속 났다. 얕은 심도와 선예도를 둘 다 갖추기 쉽지 않은데, 그 힘든 길을 걷네, 그 렌즈는 참. 결국 삿포로 마지막 날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소니 매장에 다시 찾아가게 된다. 이럴 때 한 번 최고급 렌즈 하나 장만하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이 있었던가? 마치 헤어진 연인을 못 잊어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훔쳐보고 싶었던 심정이었나. 그래서 또 만지작만지작 하고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한숨을 내쉬며 직원을 부르려고 했는데, 진열대 옆에 쓰여있는 문구가 그제서야 들어왔다.
"11월 13일 출시예정. 예약주문 중"
이번 여행은 정말 여러모로 고마운 순간이 많네요. 이렇게 또 지갑을 지켜주다니.
지난 2001년 일본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 중 하나였던 Book-Off. 이렇게 중고 서점이 시스템화되어 있다니. 그것도 전국적으로 지점을 가지고 있고... 이 당시 한국에는 아직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전문화된 중고 매장이 아직 들어서기 전이어서, 괜찮은 중고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청계천까지 나가 발품을 판 후에 냉정한 감정 능력과 끈기 있는 가격네고 능력이 따라줘야 했다. 그런데, 일본은 책, 가전제품, 옷, 가구 등의 중고물품의 가치가 매장에서 전문적으로 측정이 되고 또 품질이 보증되는 판매를 일찌감치 하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Book Off였다. 그리고 밴쿠버 이민 첫해에, 밴쿠버에도 Book-Off 매장이 있는 걸 발견했다. 당시만 해도 캐나다 환율이 무척 낮아서 수많은 일본인 유학생들이 밴쿠버 다운타운에 깔려있었서 그랬던가? 그곳엔 비록 도서 - 그것도 일본어 책 위주 - 밖에 없었지만, 중고품 판매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륜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도큐 백화점에서 Book Off 까지는 1킬로 남짓 걸어야 했는데, 가는 도중도 시계탑 건물 (구 삿포로 농학교 연무장)이니 오도리 공원이니, 가마모토 홀이니, 삿포로 TV 타워 같은 랜드마크를 지나갔지만, 내 신경은 온통 적당한 중고품 가게들이 또 있는지만 살피면서 걸었는데, 안타깝게도 삿포로 시내의 중고품 가게들은 대부분 패션이나 고가 브랜드 액세서리들만을 주로 취급했고 중고 워크맨 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Book Off 삿포로 매장 가까이에 접근하니, 오오오오, 왠지 친근한 덕후들의 냄새가... 알고 보니 Book Off 매장 근처에는 애니메이션 관련 물품을 팔고 있는 'Animate'와 만화 / 인터넷 카페인 '@Place', 프라모델이나 빈티지 피규어를 취급하는 '정글', 코스프레 전문 물품을 파는 '라신방', 각종 카드게임 물품을 '카드라보' 등이 모여 있었다. 오호라, 어쩐지 백팩에 모자를 눌러쓴 인간들이 모여있더니만... 아..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백팩에 모자를 눌러썼구나. 십 년만 젊었어도 저들의 정글 속에 같이 들어가 애니메이션 굿즈들을 찾아보겠지만, 50대 중반의 몸으로, 이미 온갖 잡동사니로 채워지고 있는 손바닥만 한 집의 소유자로서, 그리고 안 그래도 들고 갈 짐이 점점 늘어나는 걸 걱정해야 할 여행객 입장에서, 득템놀이를 즐기기는 어려웠다. 결국 Book Off로 곧바로 직진.... 그런데, Book Off 건물의 1층 역시 애니메이션 굿즈 및 액션 피겨 중고품으로 가득가득, 그리고 4층에는 트레이딩 카드를 판매하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현재 일본의 수많은 소매업과 관광산업이 애니메이션 문화에 한 다리 걸치지 않으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이구나.. 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좋아하는 피크민 굿즈가 있는지 잠시 구경하고.
2층에는 일반서적, 3층에 만화책과 비디오, 음반들을 진열하고 있었는데, 엥? DVD 가격이 장난 아니네. 원래 일본의 비디오 매체 가격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중고품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상당히 비싸다. 일본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중고시장 거래가 활성화되어 가격이 높아진 건가? 아니면 반대로 이런 물리매체를 아직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면서 더 프리미엄이 붙는 건가? 알 수 없다. 아무튼 중고 DVD를 3천엔, 중고 블루레이를 5천엔 주고 살 수는 없었다. 대신 관광 기념품으로 음악 CD를 두 장 집는다. 하나는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두 번째 앨범, 다른 하나는 재즈싱어 케이 고바야시의 초기 앨범 (재발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