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사는 게 편해지는 것 (2025년 10월 5일)
결코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 수준이지만, 일본어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90년대 초, 영화 단체에서는 주로 VHS 비디오 장비로 단편영화 제작을 하거나 영화제 상영작 준비를 했었는데, 당시에는 일본 내수품(주로 일본에서 만듦)과 수출품(중국, 말레이시아 혹은 다른 제조업 중심국가에서 만듦)에 어마어마한 품질차이가 있다는 괴소문이 돌던 때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했지만, 방송용 영상, 음향 제품에 있어서 일본 제품의 품질이 정점으로 치닫을 때이기도 했다. 때문에 세운상가나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영상기기를 살 때는 반드시 보따리 장사들이 들여온 내수품을 꼭 집어 골라 구매를 하곤 했었고, 당연하듯이 사용설명서뿐만 아니라 기기에 적혀있는 모든 단어 (재생, 녹화 등)나 화면에 뜨는 상태표시 ('카세트를 넣으시오' 등) 모두 일본어였다. 적지 않은 돈을 모아 구매한 기자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어 단어를 차용할 때 많이 쓰이는) 가타카나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 일을 하면서, 특히 일본 하청일을 할 때는 당연하게도 타임시트나 작화지에 적혀있는 원동화, 촬영 디렉션 정도는 알아야 했다. 이 역시 대개의 경우 가타카나로 적어줘서 읽는 것에는 크게 부담이 없었으나, 오히려 일본식 영어발음 / 표기에 더욱 당황했었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어 'スパ-'라고 적혀있는 건 당연히 '스파'라고 읽어야겠지만 이건 '과다노출 (Super Exposure)'을 하라는 촬영지시였고, WXP('따부라시'라고 말한다)를 보곤 응? 갑자기 영어?라고 의아해했지만 이중노출 (Double Exposure)'를 하라는 말이었다. 일본식의 영어 읽기 쓰기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지만 지금은 오히려 암호풀이와 같은 재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역시 일본인의 발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상상력의 일환일 테니까.
책을 읽고 감명받으면 작가의 이름과 출판사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으면 감독과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을 줄기차게 보게 되니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는 제작진의 이름 역시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감독 데뷔 전 '와타나베 신이치로 (渡辺信一郎)'나 '오키우라 히로유키 (沖浦啓之)', '마사유키 (摩砂雪)'의 애니메이션 연출을 눈여겨보면서 이름 한자도 기억하곤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이런 습관은 일본어 한자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일본어 한자를 읽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고, 원어민들에게도 생소한 발음의 경우엔 훈독 (읽는 발음)을 한자 위에 달아 두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 읽기만 적응을 하더라도 일본어 광고, 잡지 표지, 안내문 등을 읽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한국은 여전히 출판물 검열이 심하던 때, <기생수>도, <무한의 주인>도, <지뢰진>도,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까지 거대한 효과음과 모자이크, 화이트 칠까지 해 가면서 잔인한 장면이나 문제가 될 만한 장면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워져서 출간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본어 원서를 구해서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욕망만 있었고 실제로는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군대 말년 때 참고서를 들고 일본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답시고 했었다. 하지만 그냥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읽고 쓸 줄 아는 것에 그쳤고, 이마저도 몇 년이 지나자 완전히 잊게 되었다.
그러고는 일본어를 다시 공부해 보겠다는 욕심도, 그럴 필요성도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기분이 다시 들기 시작한 건 이민을 오고 나서였다. 여기서 일본인 유학생들을 만나 서로 초등생 수준의 저질 영어를 구사하면서 같이 노는 일이 많았는데, 그들로부터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는 일본어를 내가 의외로 알아듣고 있던 거였다. 심지어는 친구가 만화 <거인의 별 (巨神の星 쿄진노호시)>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쿄진노보우시 巨神の帽子 (거인의 모자)'라고 잘못 말하는 걸 알아듣고, 와, 그 모자는 정말 크겠는 걸, 이라고 맞장구를 치기까지 했었다.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근교 관광지인 '부차드가든'에는 멧돼지 동상이 있고, 일본인들 사이엔 그 코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이 있었는데, 이민 초기 어느 날, 부차드가든에 갔다가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멧돼지 동상이 어디 있냐고 일본어로 묻는 관광객을 만났다. 더 황당했던 건 그걸 알아듣고, "知らないですけど.. あ, あそこです" (잘 모르겠는데... 아, 저쪽이네요.")라고 명확하게 대답하고 있는 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어를 공부했던 게 6년 전이었는데... 내가 일본어를 이만큼 할 수 있었나, 깜짝 놀라기도 했다. 강시 한창 유행이던 일드를 꾸준히 봐서 그랬나? 어학이라는 건 노출이 될수록 콜레스테롤처럼 몸에 쌓이는 거였구나.
여전히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산만하게 펼쳐져 있는 나에게 있어서 일본어 공부는 한참 순위가 밀린다. 여행을 앞두고 다시 공부를 해보려고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참고서를 구매하기도 했으나 어찌 된 건지 나와는 궁합이 안 맞아서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어설프게 아는 건 오히려 새로운 말에 흥미를 갖는 걸 방해한다. 그래도 예전에 파리의 지하철 역에 처음 가면서 'EXIT'라는 단어가 안 보여서 당황했던 기억 때문에 여행용 일본어라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다른 일에 밀렸다. 어학에 재능이 있는 아내를 쫓아다니면 되겠지.. 하는 방만함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 간판과 표지판을 약간이나마 (퍼즐 풀듯이) 읽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까지 여행을 쾌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전히 더듬더듬 눈치빨이 반이지만, 그리고 조금 길다 싶으면 여지없이 파파고 앱으로 읽게 되지만, 그래도 가타카나나 한자로만 구성된 간단한 표지판만 읽을 수 있어도, 순간순간에도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유여행의 성격상 무척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년에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어학공부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디로 여행을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Book Off를 나와보니 바로 앞에 맥도널드가 있다. 다른 나라에 갈 때마다 그 나라 맥도널드에만 있는 메뉴를 먹어보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스키야키 버거가 있네. 일요일 점심시간이다 보니 매장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응? 여긴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본 사회의 아날로그 사랑 때문인가? 카운터에 길게 줄을 늘어선 채 주문할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서 득의만만하게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키오스크 메뉴의 언어가 영어임을 발견하고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유. 외국인이여유. 간장, 설탕 맛의 스키야키 버거의 맛은.. 뭐 그냥저냥.. 하지만 반숙계란과 치즈, 소스가 패티와 뒤섞이면서 아주 눅진한 질감을 주었다.
재수 좋게 2층 창가 근처에 난 자리를 냉큼 잡아 거리를 내려다보며 먹고 있는데, 오.. 여행 출발 전에 삿포로 중고전자제품을 검색하다가 봤던 이름이 보인다. '잔파라 じゃんぱら'. 오. 나, 나 저기 아는데. 입구 옆 작은 현수막에는 "스마호 スマホ"라고 가타카나로 쓰여있다. 일본에서 스마트폰을 부르는 말이다. 오케이. 함 가봐야겠다. 크게 기대는 안 하겠지만.
매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기 체류에 필요한 스마트폰을 구입하려고 하는 거겠지. 진열대의 대부분은 구형 스마트폰이고, 전자사전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 시대에 전자사전이라니. 역시 일본인가? 그렇담 어쩌면 워크맨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종업원에게 물어봤더니 고개를 갸우뚱 한 번 찾아보겠다면서 뒷문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한참 후에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고 나타난 종업원의 손에 들려 있던 건 디지털 음원을 재생하는 Hi-Res 워크맨이었다. 맞네. 내가 잘못 설명했네. 워크맨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걸, 그것도 고급 오디오 시장을 겨냥한 32bit 음원 재생기로 거듭났다는 걸 까먹고 있었네. 거듭 사과하고 나서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는 워크맨이 있냐고 물었더니 진심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이런 것도 진상짓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겠구나.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숙소 근처에도 잔파라 매장이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했다. 이번에는 꼼꼼하게 카세트테이프 워크맨이 있는지 물었더니 일언지하에 없다고 한다. 뭐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게 부정을 당하니 내 속은 편하구나. 다른 진열대에 전시된 카메라 렌즈를 구경했는데, 여기도 캐나다처럼 캐논이나 니콘 중고렌즈가 소니보다 훨씬 착한 가격이네. 워낙 오랜 기간 써 온 사람도 많고 중고품 공급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내가 어쩌자고 소니 기종으로 기변을 한 건지. 엉엉.
약간 피로가 몰려오고 목이 간질간질한 것 같아서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숙소를 향해 돌아가는 동안 삿포로의 랜드마크 관광지들을 좀 들러본다. 일단 '니조시장'. 와, 제일 많이 알려진 관광지답게 외국인들이 드글드글하다. 그것보다, 어라, 여긴 호객을 한다. 일본에서 호객을 하는 시장은 이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마치 얼마까지 보고 오셨냐고 묻는 그 시절 용산 전자상가 같다. 뭐 사실, 세상 어느 관광지에도 이런 곳은 있는 법이지만. 그에 비해 신선한 해산물이 잘 안 보인다. 건어물이나 2차 가공품들은 많이 보이지만, 아무래도 지역 식당을 상대로 하는 도매시장이 아니라 관광객을 상대하는 시장이 되어버린 터라, 장거리 배송이 가능한 상품들을 주로 갖다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한국의 어느 지방 수산시장에 가더라도 다 구할 수 있는 것들.
니조시장 옆에 흐르는 '소세이가와 (創成川)' 공원 역시 빠질 수 없는 랜드마크. 삿포로 도심을 종단하는 하천으로, 오도리 공원이 삿포로 주소체계를 남과 북으로 나누는 기준점이라면, 여기 '소세이가와'가 삿포로 주소체계를 동과 서로 나누는 기준점이 되는 하천이 되겠다. 하천 지류를 따라 주변에 산책로를 만들어두었는데 이는 마치 서울의 청계천이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라서 특이할 건 없었지만, 여기서 보는 또 다른 랜드마크 - 삿포로 TV 타워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게리온>이니 <고질라> 등에서 왜 그리 전신주들을 때려 부쉈는지 알 것 같았다.
구 홋카이도 도청사 건물은 붉은 벽돌로 외장을 꾸며놓아 '아카렌가'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하코다테에도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예전 수산물 도매창고 건물들이 있는데, 거기도 카네모리 아카렌가), 아카렌가 광장과 정문 앞에서 북 3가로 이어지는 길목인 아카프라 (아카렌가 테라스 앞 플라자)에서는 종종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은 한국과 중국의 추석연휴라는 걸 의식했는지, '홋카이도 가을 대수확제'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농산물 직거래 시장 같은 걸 열고 있었다. 부스마다 주로 각 지역 농산물들, 혹은 2차 가공품들을 가지고 나와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승마 체험 (아이들을 위한 목마)이나 착유 체험 (이 역시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로 모형 소에 젖병을 달고 있었다) 등이 가장 인기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나를 홋카이도로 이끈 작품 중 하나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귀족> TV 애니메이션 새 시즌 방영에 대한 광고도 많았다. 전날 토요일에는 사인회도 했었던 모양.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다 보니 아내가 처제와의 관광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연히 곧바로 저녁 먹을 계획을 세우겠지. 피자를 먹을지, 소시지를 먹을지 중구난방 토론을 하더니 갑자기 숙소 근처의 이자카야로 가자고 한다. 구글평점이 높은 산지직송 집으로. 그리 배가 고프지 않으니 간단하게 생맥주와 안주만으로 저녁을 때우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외국인들 구글리뷰도 많은 걸로 봐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영어는 개뿔. 여전히 의사소통은 힘들다. 그래도 친절함의 스타일이 어제 갔던 집과 확연하게 다르다. 어제 갔던 식당 '코후지'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눈웃음을 짓는 친절함이었다면 이곳은 말 그대로 프렌들리 하다. 접객 스텝들은 모두 많아야 20대 중반 정도. 마치 북미의 펍에서 서버들이 해주는 것처럼 종종 테이블로 다가와 우리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체크를 한다. 의사소통이 어렵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말하면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도모다치? (友達 '친구사이니?')"라고 단어로 물어보니 "하이"하며 답을 하는 정도라도.
그런데, 이곳은 흡연이 가능하다. 흡연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테이블에서 연기를 뿜고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옆 테이블에서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테이블마다 재떨이가 있는 식당은 정말 오랜만이네. 야끼도리를 위주로 먹었는데 담배냄새 때문인지, 맛을 잘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 집 음식이 그냥 그저 그랬을지도. 그나마 우엉튀김 정도가 상당히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은 정도였다.
서버 중 한 명이 또 다가오더니 우리가 한국말을 하고 있는 걸 알아들었다고 한다. 자기도 한국을 무척 좋아하고 K드라마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가게 명함에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건네주었다. 구글리뷰를 꼭 남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아... 이래서 이곳이 구글평점이 그리 높았었구나. 관광식당은 관광식당 나름의 생존전략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식당에 가서 외식을 하는 것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뿐 아니라 종합적인 근사한 경험을 하기 위해 가는 거니까. 음식의 맛은 좀 까리하더라도 친절함이 그 식당의 수준을 높여줄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한다. 왜, 미슐렝 별 하나와 별 세개의 차이는 음식의 맛에 있지 않고 서비스에 있다고들 하지 않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업된 김에 그 자리에서 (구글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리뷰를 남기고 나왔다.
** 하지만 삿포로에 다시 가서 딱 한 끼의 저녁을 먹게 된다면, (욕을 또 먹더라도) 어제 갔던 코후지에 가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