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설렁, 언어 배우기 - 삿포로

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15

삿포로 아트파크 뷔페에서 든든하게 점심을 먹은 터라, 저녁은 간단하게 호텔 근처의 이자카야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서 몇 번을 놀랐는데, 첫째는 실내 흡연이 가능하다는 점이었고(다행히 테이블마다 천막으로 분리되어 있어 연기를 직접 맡진 않았다), 둘째는 맛이 그럭저럭임에도 평점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며, 셋째는 직원들이 엄청나게 밝고 활기차다는 점이다. 서비스도 빨라서 앱으로 맥주 주문 버튼을 누르자마자 몇 초 만에 잔이 눈앞에 도착했다. 그들의 에너지가 전염성이 있어 가게 전체가 즐거운 파티장 같았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 덕분에 평점이 높은 모양이다.

직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웃으며 한마디씩 건넸는데, 몇몇 분이 들려준 한국말도 무척 귀여웠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누군가 나의 언어를 연습해 말을 건넨다는 것은 소통하고 싶다는 따뜻함으로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어대는 습관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두고 ‘식탁 위에 읽을거리가 없으면 시리얼 박스 뒷면이라도 읽는다’고 하는데, 내가 딱 그런 아이였다. 다만 내 눈에 재미있는 것만 골라 읽었던 탓인지, 대부분의 친구들이 공부하던 ‘성문 종합 영어’ 같은 책은 몇 페이지 이상 넘겨본 적이 없다. 그나마 다행히 시험지조차 열심히 읽었는지 문법은 몰라도 독해에서 점수를 좀 만회할 수 있어서 영어 성적은 그럭저럭... 그런 ‘설렁설렁' 영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그럭저럭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각잡고 공부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따라 하는 것을 좋아해서, 귀에 꽂히는 표현이 있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써먹어 보곤 하면서 생존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딱 생존영어인 게, 직장에서는 영어를 써야 하지만, 퇴근 후에는 하루종일 쌓인 영어 디톡스를 위해 주로 한글을 읽고 듣는다. 글도 이렇게 한글로 쓰고 있고. 넷플릭스 일드도 영어 자막보다는 한국어 자막이 훨씬 감칠맛이 있더라고요.






일본 소설이나 드라마를 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배워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귀로 익힌 표현을 장난스럽게 따라 하는 정도였다. (‘이타다키마스(잘 먹겠습니다)'나 ‘고치소오사마데시타(잘 먹었습니다)’는 남편이 해준 밥을 먹을 때 유용하게 씁니다...) 한자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탓도 있고, 그나마 아는 글자가 있어도 발음이 제멋대로라 하니 지레 겁이 나서 그랬을지도. 그러다 몇 년 전, ‘듀오링고’라는 앱을 받아 이런 저런 언어들을 깔짝거려 보다가 어디 한번, 하는 마음으로 일본어를 시작했다. 조금 하다 보니 꽤 재밌어져서 한동안은 유료 결제까지 하며 열심히 했고, 이번 여행에서도 배운 말들을 몇 가지 써먹어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메구미 상이 '캐나다에서 왔는데 친구는 한국에서 오느냐'고 (추정되는) 질문을 하셨을 때,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한국인입니다), 에또... 반쿠바니 순데이마스(밴쿠버에 살고 있어요). 토모다치와 소우루니 순데이마스 (친구는 서울에 살고 있어요)" 정도로 대답하고는 엄청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 뒤로 쏟아지는 속사포 같은 일본어에 완벽하게 KO. (듀오링고로 배운 일본어 믿고 떠났다가 울면서 파파고 손을 잡고 돌아온다는 내용의 포스팅 을 보고 격하게 공감했다.)


여행 후 듀오링고에 매일 접속하던 습관도 슬그머니 놓아버렸는데, 올해는 정식으로 한 번 배워볼까 싶어 초급 일본어 강의에 등록해 보았다. (교재도 이미 사서 책꽂이에 모셔두었다. 성문 종합 영어 꼴은 나지 않기를...) 언제나 그랬듯 설렁설렁, 공부할 것 같지만 그래도 재미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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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며칠 전 구글이 실시간 오디오 통역 기술을 발표했던데... 과연 언어를 안 배워도 되는 미래는 올 것인가?






이자카야에서 즐거운 에너지를 잔뜩 담아 숙소로 돌아와 대욕장을 찍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매일 신나게 걷고 먹고 마시면서도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아침 저녁으로 빼먹지 않았던 목욕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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