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사회

그리고 쉬어가는 하루 (2025년 10월 6일)

by 그래도 캠핑


오늘로 삿포로를 중심으로 다녔던 이번 여행의 전반부가 끝나간다. 이후에는 하코다테와 오비히로로 옮겨서 놀 생각. 하코다테에 가기 전에 중간지점인 도야호수 온천마을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내가 그동안 돈 버느라 고생한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나. 전 객실이 호수뷰로 구성된 고급 온천 리조트에서 저녁과 아침 뷔페까지 포함되었다고 하니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고급숙소에서 묵은 건 신혼여행 이후 처음인 것도 같다. 어흑 이렇게 좋아하는데.. ㅠㅠㅠ 맨날 캠핑 트레일러에서만 재우고 ㅠㅠ


숙소 앞 세이코마에서 햄치즈야채 샌드위치와 야채 주먹밥, 야채주스와 강황으로 만든 숙취해소 음료를 사 왔다. 사실 숙소 앞에 24시간 편의점이 있다는 건 여행의 질을 무척 높여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덩그렁히 떨어져 있더라도 당장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까. 밥을 굶든 술을 굶든.


간단한 아침과 뜬뜬 유튜브를 보면서 짐을 마저 싼다. 어젯밤에 미리 싸두기는 했지만, 잠옷이나 충전기도 그렇고 막바지에 싸야 할 짐들이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뭘 또 빠뜨린 게 없나 하나하나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벌써 9시 반. JR Inn의 체크아웃 시간은 아침 10시여서 일단 짐을 맡기고 처제와 동서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방금 편의점에서 뭘 사 와서 먹지 않았냐구요? 그럼 이번에 가족들끼리 먹는 건 점심식사라고 하겠습니다. 아침 10시에 먹는 점심식사. 아카렌가 테라스 맞은편에는 일본 생명 삿포로 빌딩이 있는데 삿포로 역까지 연결되는 지하상가에 다양한 식당들이 있었다. 이날 점심은 '엔 (えん)'이라는 이름의 고기우동 / 다시차즈케 전문점으로, 말하자면 일식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다. 밥을 차에 말아먹는 걸 오차즈케라고 한다면 이 식당에서는 육수국물에 말아먹는 밥을 제공한다. 사실 10시에 여는 식당이 맥도널드와 이곳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숙취 때문에 뭔가 깔끔하고 시원한 식사를 하고 싶었던 심정도 있었다. 그래서 오픈런. 이곳 역시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한국어 메뉴 가능) 식사를 가져다주는 걸 기다리는 방식. 물은 셀프.


도미 다시차즈케 - 도미회를 계란 / 깨 / 간장 소스에 찍어 먹다가 육수를 부어 밥과 또 같이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소세이가와 공원을 지나 삿포로 팩토리에 가본다. 1876년 홋카이도 개척사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맥주 공장. 삿포로 맥주가 제조시설을 옮긴 후에도 그 부지와 옛 건물을 이용해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는 거대한 쇼핑몰을 만들었다. 곳곳에 맥주공장 시설을 남겨둬서 멋과 정체성을 다 살린 건물이지만... 홋카이도라는 지역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개척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지역이고, 삿포로 맥주 역시 개척 역사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지만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관광상품을 연관시켜 만드는 걸 보면 좀 지친다. 대도시를 잠시 떠나는 기념으로 큰 쇼핑몰에 들렀던 건데... 정말 살 게 없구나. 게다가 할인폭도 크지 않다. 워낙에 비싼 브랜드들이라서 그렇겠지. 스노우픽 아웃렛도, 몽벨, 아크테릭스, 레고 아웃렛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초기 삿포로 맥주공장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 삿포로 팩토리 소핑몰




도야호수의 '노노카제 (乃の風 칼바람?) 리조트'는 여행 초반에 들렀던 노보리베츠의 '세키스이테이 호텔'과 함께 홋카이도의 거대 리조트 회사 '노구치 그룹'산하 호텔 체인인데, 이 그룹의 특징 중 하나는 송영버스 (送迎バス : 마중과 배웅을 해주는 버스, 셔틀버스)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대중교통요금이 비싼 일본에서 ,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관광객에게 대단한 메리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오후 1시 반에 삿포로 북쪽 출구에서 픽업을 하는 걸로 되어 있어서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그래서 겸사겸사 삿포로 팩토리 근처의 커피숍에 들렀는데... 오오오. 미장원과 나눠 쓰는 작은 건물 2층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느긋한 재즈 선율 위로 드라마 작가 '쿠도 칸구로' 비슷하게 생긴 마스타가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고소한 커피 향이 확 올라왔다. 이름하여 '카타치 커피 (https://katachi-coffee.com)'.




일본어로 '카타치 (形)'라고 하면 어떤 형태나 모양을 말하는 것 같던데, 삐죽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모양의 부드러운 커피를 추구한다고 한다. 와인도 그렇지만 커피 역시 어떤 사람들은 그 한 잔으로도 완전한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음식이나 분위기와 모나지 않게 잘 어울리는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집 쥔장의 철학을 분명하게 알 것만 같았다.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콜롬비아 산 커피를 골라보았는데 일본에 와서 그동안 쓴 맛이 강한 커피만 마시느라 좀 힘들다가 약배전의 은은한 커피를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가을 블랜드 '요나가 (夜長)', 그리고 이 집의 카페오레 역시 모두 수준급이었지만... 아.. 주문하고 받을 때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는 기억이다. 우리야 시간을 보낼 작정으로 이곳에 들렀어도 급하게 카페인 충전 딱 하러 올 만한 곳은 아니었던 셈.





乃の風







삿포로 역 북쪽 버스 승강장 어느 부분에 버스가 정차할 것인지 찾는데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약간 헤맸던 일을 제외하곤 그럭저럭 무탈히 송영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올여름 이상기후로 삿포로 역시 무척 더웠다고 들었는데 그 더위가 아직 남아있었던 건지 햇볕을 피해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좀 까다롭긴 했지만... 아무튼 버스에 자리를 잡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오호, 두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이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간다. 10분이면 화장실을 충분히 쓰고 나올 시간이지만, 어라, 이 휴게소가 나름 유명한 휴게소 (道の駅 미치노에키)였다. '보요나카야마(望羊中山)'.


삿포로와 도야 호수 중간에 있는'나카야마 (中山)' 고개 정상에 위치한 이 휴게소는 일단 '에조후지(蝦夷富士)'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요테이산(羊蹄山)'의 파노라마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 요테이산 납작 감자로 만드는 '아게이모(튀김이라는 뜻의 일본어 '아게揚げ'와 감자라는 뜻의 '자가이모ジゃガ芋'의 합성어)'라는 감자튀김 꼬치로 더 유명했다. 심지어 이 휴게소의 마스코트가 바로 이 아게이모일 정도로.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일드 <조금만 초능력자> 2화에도 휴게소 음식으로 잠깐 등장한다.



명성에 비해 휴게소 건물 자체는 무척 소박하다. 요테이 산 전망과 보요나카야마 외에도 홋카이도 서부에 있는 다른 휴게소를 소개하는 지도
연간 30만개가 팔린다는 아게이모. 속은 폭실폭실 겉은 바삭바삭. 아이마이쪙... 참고로 이 땐 이미 두 끼의 식사를 마친 상태. 화장실 입구에도 아게이모 캐릭터를 사용했다



분이 많은 감자를 삶은 후 한 번 으깬 것까지는 알 것 같았는데, 겉을 어쩌면 이렇게 바삭바삭 튀겼을까? 어쩌면 이 감자를 이용한 녹말가루를 한 번 입힌 걸지도 모르겠다.. 와 같은 별 의미 없는 궁리를 하다 보니 10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휴게소 앞 작은 천막에서는 원숭이를 데리고 무슨 약장사 쇼 같은 걸 하는 모양이던데, 느긋이 앉아서 볼 여유 같은 건 이미 없었다. 그래도 이런 길거리 음식을 먹으니 여행 느낌이 좀 나네.











'노노카제 리조트'에 도착하니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대로 내리라고 한다. 아하. 여긴 등급제구나. 마치 비행기 탑승을 할 때 비즈니스석 승객 먼저 탑승하는 것마냥. 나름 온천 마을인데 노보리베츠처럼 유황 냄새가 나지 않는다. 분지가 아니라 호수에 둘러싸인 마을이라 그런가? 검색해 보니 우스산 화산활동으로 데워진 지하수를 사용하는 도야 호수의 온천물은 유황보다 염분이 더 많은 온천수로 알려져 있었다. 유황대신 염분이라니요. 그럼 그냥 집에서 목욕소금 뿌려서 목욕하는 거랑 같은 건가요?


호텔로 들어가니까 체크인을 할 때 가족당 한 사람만 리셉션 카운터로 오라고 한다. 나머지는 로비에 여기저기 따로따로 배치된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게다가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서는 것도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의자에 앉아서 대기한다. 아놔. 이 호텔은 뭐 이리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게 많은가. 사람들이 한 줄로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기괴한 모습은 이전에 아무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마도 리셉션 카운터가 시끄러운 사람들로 드글거리지 않도록 하는 조치일 것 같았지만..


그러고 보니, 비단 이 호텔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가 무척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게 많은 것도 같다. 연초에 도쿄와 쿄토를 갔다 온 아내의 말도 그랬다. 전철 안에서 끊임없이 안내방송을 했었다고. 떠들지 말아라, 한 줄 서기 해라,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지 말아라 등등. 짧은 시간 홋카이도를 돌아다니던 도중에도 그런 식의 안내문은 수도 없이 만났다. 이렇게까지 꼼꼼한 매뉴얼을 제공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본다. 지난 20여 년간 살아온 캐나다 사회의 정책입안자들은 지켜야 할 규칙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지고, 서로 감시하게 되며, 분쟁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캐나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자주 듣는 표현은 Use your judgement, Use your compassion 등, 네가 잘 알아서 처신하라는 종류의 말이 많아서, 이민 초기에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정반대, 여기선 이렇게 하고 저기선 저렇게 하라는 식의 가이드가 세세하다. 지하도를 통해 삿포로 역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길에는 어느 부분에서는 좌측통행을 어디서는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며칠 전 사용했던 어느 쇼핑몰 공중 화장실에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변기 뒤에 "당신의 오른손 쪽에 있는 버튼을 사용해서 물을 내리시오"라고 쓰여있었는데, 몸을 돌려 변기에 앉으니 문에 또 다른 안내문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당신의 왼손 쪽에 있는 버튼을 사용해서 물을 내리시오." 아니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조목조목 지시를 한다고?


어쩌면 일본 사회에서는 규칙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적고 분쟁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모두가 규칙만 따르면 되는 거니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엘리트의 지시에 순응적이며, 타인에게 감시받을 수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조를 한 건가?










생각보다 넓은 방, 그리고 광활한 호수를 향해 뻥 뚫려있는 커다란 창에 잠시 감동하고 있다가 저녁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하하하 이미 식당 앞에 줄을 길게 서있다. 그리고, 무척 소란스럽다. 뒷사람이 내 귀에다 대고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일행과 대화를 한다. 아.. 이거였구나. 이렇게 소란스러운 사람들이 단체관광 오는 게 주 고객층이라면 나 같아도 체크인하는 곳에 최소한의 인원만 올 수 있도록 하겠다. 그래도 놀러 와서 괜히 관광객끼리 힘겨루기 하기 싫다. 귀마개를 가지고 올 걸.



호수 뷰로 창을 가득 채운 방


호텔 로비 역시 호수 뷰. 좌측은 처음 체크인 대기할 때 나눠주는 웰컴 드링크



'노보리베츠 세키스이테이'처럼 식당에서 정해주는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하지만 호수를 향하는 통창의 높이가 보통 건물의 2.5개 층높이였고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안쪽 자리 역시 바닥이 조금 높아서 호수는 충분히 잘 볼 수 있었다. 물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밖은 금세 어두컴컴해졌지만.


일단 삿포로 맥주의 프리미엄 브랜드 '소라치 1984'를 한 잔씩하고 나서, 처음에 왕소라 찜으로 시작해서.. 각종 해산물과 고기, 초밥, 사시미들을, 정말이지 숨이 찰 정도로 먹었다. 이렇게까지 뷔페에 진심이었나? 아니면 음식들이 하나같이 멈추지 못할 정도로 맛이 있었던가. 이렇게 먹다 보면 뜬금없이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임에도 순전히 입의 쾌락을 위해 쳐묵쳐묵 하다니.



식당도 호수뷰. 이 정도면 이 호텔이 호수뷰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객실로 돌아와 잠시 숨을 골랐다. 와. 이 럭셔리 리조트의 식당 역시 음식 냄새가 장난 아니게 배는 구나. 호텔에서 제공한 실내복을 입고 내려가서 다행이긴 한데, 이걸 방에 걸어두는 순간 방 전체 모든 것에 냄새가 밸 것만 같은 느낌이다. 호텔에 있는 방향제를 잔뜩 뿌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 같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주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천을 하러 나선다.


이곳의 노천욕장은 일반 대욕장 위층에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벌써 발이 시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우와와와와와. 심각하게 춥다. 나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사무이, 사무이'하는 비명이 들려온다. 바람도 장난 아니다. 이래서 호텔 이름이 '노노카제 (乃の風 칼바람)' 인가? 머리가 꽁꽁 어는 것처럼 추우니까 온천물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에라이. 어차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극기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실내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목욕을 마치고 나면 몸이 좀 후끈해진다. 이럴 때 맥주를 빼먹을 수 없지. 이 호텔 클럽 회원 전용 라운지에서는 온천 후 생맥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모양이지만, 객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캔맥주도 나쁘지 않다. 마침 일본 맥주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에비스' 맥주도 팔고 있었다. 어두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데, 어라, 아닌 밤 중에 웬 불꽃놀이? 알고 보니 이곳 도야호수 온천 관광협회에서 주관하는 불꽃놀이 행사가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매일 8시 45분에 시작한다고 한다. 호텔 숙박객 대상뿐만이 아니라, 도야 호수에 관광을 온 모든 사람들, 유람선 승객들이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이야아아아. 정말 이 사람들, 호수 하나를 가지고 얼마나 쪽쪽 빨아먹으려는 거냐. 예전에 애니메이션 일을 할 때,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이름의 머천다이징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 모범사례가 미국과 일본이었다. 만화 원작으로 시작해서 애니메이션, 특촬영화, 무대공연, 테마파크로 확장되는 머천다이징. 아니 누가 일본 아니랄까 봐, 이렇게 호수 하나로 계속 관광상품을 무럭무럭 이어나가고 있는 거구나.




조 앞에 살짝 보이는 작은 배에서 불꽃을 쏘아대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있던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