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이정표
직장과 집은 차로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그 짧은 길을 가는데 신호등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가끔 신호등 앞에서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신호등은 우리 인생의 이정표다.
신호등의 색은 규칙이다. 차를 운전하면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신호등의 불빛에 신경을 써서 잘 지켜야 한다. 파란불, 빨간불, 노란불, 그리고 비보호가 있다.
네 인생에 파란불만 켜 지길 기도할게
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바쁜 출근 시간에는 특히나 파란불이 계속 켜지기를 고대한다. 바쁘고 늦은 시간에 유독 빨간 불이 자주 켜져서 10분이면 갈 거리가 20분이 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것을 두고 머피의 법칙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2020년에 브런치를 시작 한 후로 직장의 일과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도착하거나 최소 30분 전에 도착했다. 아마 직장을 다니는 누구라도 이해할 것이다. 10분 빨리 출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렇게 출근을 빨리 하니 신호등이 무슨 색이든 별로 초조하지 않았다.
언제나 파란불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혹시 경험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운전 중 핸드폰 조작은 정말 위험하다. 그러니 가급적 문자는 삼가야 하겠다. 그렇지만 때로 아주 긴급한 문자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다. 또는 옆에 있는 다른 것을 집어야 한다든지 정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필 계속 직진 신호등이다. 참 난감하다. 도로 한복판에서 어디 차를 세울 곳도 없는데 말이다.
가끔 그런 때면 빨간 신호등이 반갑다. '정지'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서 오늘까지 직장을 다녔다. 정지란 모든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을 하게 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일 년 정도 고생한 적이 있다. 어찌어찌 낫게 되었다. 그때 나의 인생에 빨간 불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인생을 즐겁게 살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었다.
너는 아파야 집에 있구나
결혼 전 오빠가 한 말이다. 결혼 전이나 후나 아프지 않은 경우 가만히 눕거나 앉아 있지 않는 성격이다.
에너지가 방전되는 때가 있다. 겨울이면 독감에 자주 걸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한 약을 먹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던 그때 멍하니 누워서 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팠을 때 책을 읽기도 한다. 브런치 이웃 작가님께서 암에 걸리셨다. 나라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았다. 나는 모든 것이 정지된 그 상태에서 그분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의지가 충만할 수 있을까. 경험하지 않았기에 알 수가 없다. 그분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긍정의 힘에 깊은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빨간 신호등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허들 경기를 보면 장애물을 잘 넘어서 경주에 일등을 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상금도 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장애물에 대한 걱정을 지니고 산다. 나에게는 인생의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런 심리로 인해 타인이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에 위안을 얻고 힘이 나며 더욱 기쁜지도 모르겠다.
빨간 신호등만 계속 켜져 있다면 우울하고 힘들 것이다. 교통 신호등 불빛은 시간 단위로 바뀐다. 우리는 바뀐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기본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 정지가 반가운 것이다. 모든 것이 올 스톱된 완벽한 정지를 반길 사람은 없다. 인생에 장애물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는 장애물을 현명하게 극복하려면 첫째가 나의 의지이고, 둘째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따뜻한 가족과 지인의 관계가 중요 요소가 된다. 아무도 없다면 반려동물도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늘 강조하는 것으로 애완이 아닌 함께 인생을 함께 헤쳐나갈 반려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빨강으로 바뀌기 전에 노란 불이 들어온다. 어떤 이는 이를 얼른 통과해 버리라는 의미로 여긴단다. 당신은 어떠한가. 나는 되도록 멈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때로 교통의 흐름상 가야 하는 때가 있다. 꼬리물기를 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야기다. 동료 중 한 명은 신호등 앞에서 멈췄을 때 두 번이나 사고가 있었다. 그분은 멈췄지만 뒤에서 들이받은 경우다. 그쯤 되면 신호등 앞에서 멈춰있는 것이 불안하기도 할 것 같다.
교통 신호등의 노란 불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준다. 가야 할지 멈춰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노란불은 주의를 하고 속도를 멈추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우리 인생에도 노란 불이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2013년에 쓴 글이 있다. 내가 오래전부터 신호등 앞에서 생각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 2003/05/17 ] 신호등에 노란 불빛이 들어올 때
운전을 하다 보면 신호등 불이 노란불 빛으로 바뀔 때 우선 멈춰야 한다. 하지만 질주를 하다 보면 파란 신호등(녹색) 일 때부터 마음을 졸이게 된다. 언제 불빛이 바뀔지. 그러다가 노란 불빛인데도 가게 되어 심지어는 딱지를 뗀 적도 있다. 물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신호등 체계가 초보들에겐 딱 맞추기가 무척 어렵다. 간단한 방법은 같이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보아가며 눈치를 보라고 한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숫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 좌우 정면 후면 모두 잘 살피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또 자신이 베테랑 운전사임을 자랑할 일도 아니다. 언제 남의 차가 와서 받을지도 모를 일. 또 자신의 순간의 실수가 엄청난 사고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마치 운전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고 미래도 설계하고 주변도 살피고 또 노란불 빛이 들어올 때 휴식도 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죽음을 통제하기엔 너무도 미약한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그래도 사람에게 평균수명이란 게 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 이젠 나이 60은 청년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의 부모님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시다. 이젠 노란 불빛이 자주 들어오고 그때마다 난 놀란 토끼가 되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병원으로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마음까지 약해지신 부모님을 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퇴원하시면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살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건강하고 밝게 웃음 지으시는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한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엄마, 아빠 오래오래 건강하고 밝게 사세요. 퇴원하신 후, 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 농막에 가셔서 고추, 가지, 오이, 호박 등을 심으시며 꼼꼼하게 우리 아이들 교육용으로 글씨 팻말까지 박아 놓으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의 아빠와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이미 인생의 노란 불이 들어왔었다. 시아버님께서는 늘 혼자 버티시는 분이라서 아프셔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저 세상에 가신 것이었다. 남편은 그 당시 충격이 심해서 오랫동안 극복하기 힘들었다. 호상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부모님 만큼은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인생의 노란불에 잠시 멈춰 자신과 주변을 둘러본다면 좋겠다.
비보호 신호등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직진 신호에 불이 들어오면, 당신 혼자 알아서 조심해서 좌회전을 하라는 의미다. 때로는 좌회전 신호가 겸용으로 되어 있기도 한다. 비보호 신호등이 있는 이유는 교통량이 적은 곳이거나 교통 흐름에 필요한 경우다. 비보호 신호등에서는 정신을 차려서 가야 한다. 어떤 이는 노란 신호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위험한 곳이 비보호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비보호인 경우 어떠한가. 혼자 사는 친구가 엊그제 한밤 중에 쓰러져서 몇 시간을 꼼짝을 못 하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쓰러질 때 마비가 와서 움직 일 수가 없었다. 원래 좋지 않았던 허리도 쓰러지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핸드폰이 주변에 없어서 연락도 취할 상황이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혼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공포스럽다.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통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친구가 그 끔찍한 상황에서 기어서 거실의 핸드폰을 잡기까지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사실 누구나 혼자다. 부부나 가족도 매 순간 붙어 있을 수 없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방어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어떤 사건이 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인명은 제천." 그래서 비호보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사는 동안 즐겁게 살아야지 생각하게 된다.
우회전은 아무 때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보호 못지않게 주의를 요한다. 우회전을 할 때는 차량의 직진 신호등일 때 하면 좋다. 그런데 그때 바로 횡단보도 역시 파란 신호등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회전은 반드시 보행자가 없을 때 해야 한다. 안하무인 운전자 중에는 보행자를 사이를 두고 우회전을 해서 보행자를 불편하게 한다. 이런 경우는 물론 불법이다.
그래서 직진 신호를 제외하면 모두 불편한 신호등이다. 그러나 내가 멈춰야 다른 이가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 신호등의 규칙이다. 때로, 내가 멈춰주고 바라보면서 응원하는 배려심이 필요한 것 같다.
새해에는 신호등의 체계처럼 나의 인생도 파란 불로 이어지는 탄탄대로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가끔 멈춰서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며 격려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 본다. 또한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경고등이 깜빡이는지 살펴볼 것이다.
나의 글에 대한 댓글로 '신호등은 우리 인생의 이정표'와 같다는 말씀을 존경하는 이웃 작가님께서 해 주셨다. 나의 글의 핵심을 한 단어로 집약시켜주셨다. 그래서 부제로 차용한다. 브런치가 서로에게 공감과 격려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호등 불빛은 초록색인데 왜 파란불이라 부를까. 국립 국어원에서 한 답변을 보면 이해가 된다. 표기 자체가 파란불이라고 한다. '파랗다'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신호등의 초록불이 파란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의복의 오색을 중시 여겼다. 오방색이라 한다.
다섯 가지 색이란 황(노랑), 청(푸른색), 백(흰색), 적(붉은색), 흑(검정)이다. 오방색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뤄 보기로 한다. 우리 조상들은 본시 푸른 계열은 모두 파란색으로 집약시켰음을 알 수 있다. 신호등의 불빛도 이렇게 해서 푸른색 파란색이 된 것이다.
아래의 국립 국어원의 질의응답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