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만 먹고 싶다
나는 깡촌이라 불리는 시골 태생이다. 내가 5살 때, 시내에서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소 달구지를 타고 이사를 갔다고 한다. 결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과 시골생활의 글감이 무궁무진하다.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웹에 한 권의 책을 내 보려는 소박한 꿈으로 출발했다. 브런치에서 웹에 브런치 북을 발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 치매를 걱정할 나이는 아니지만 치매에 걸려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할머니로 인해 일찍이 죽음 전에 '정체성과 기억'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한 편이다. 내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글을 열심히 쓴다면, 나의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담이 될 것이라 여긴다.
나의 블로그에 현재 잡다한 글이 1255개가 저장되어 있기에 초겨울 곶감 빼먹듯이 하나씩 꺼내어 새로운 요리로 식탁을 차리기도 한다.
초기에 브런치에는 '추억 요리'만을 주요 테마로 쓰려고 했다. 그 이유는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가족이나 친구의 이야기는 일체 화제로 삼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은 공감과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한 증거로 브런치에 글을 발행한 후, 라이킷이나 따뜻한 댓글을 발견하면,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의 현재 가치관을 서술해야 한다. 따라서 에세이의 모든 주제는 나의 삶과 연결된다. 자신의 직업관, 가깝거나 먼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등이 글감이 된다.
직업 이외에 다양한 취미생활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중 '만 시간의 법칙'에 해당되는 것이 '그림과 영어'다. 그림과 영어는 10년이 넘도록 취미로 해 왔다. 그러다가 영어는 석사과정을 통해 영어교사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세 과목의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나의 전공 영역의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다른 전공과목을 이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그 과목마저 이수과정이 줄어들었다. 그 후 다시 다른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이수과정이었다. 평소 관심 영역이었던 영어 대학원에 등록한 후 한참을 망설였지만, 어찌어찌 과정을 마치고 영어교육 석사를 취득했다. 미술 교육과를 지원할까 영어를 할까 대학원을 갈 때 많이 망설였다. 그때 미술을 했다면 지금 미술 선생님을 하고 있었을 텐데 아쉽다. 미술에 대해서는 항시 마음속 깊이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화실을 간다고 하거나 대학원을 간다고 하면 뭘 또 배울 것이 있냐고 말렸다. 조금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들은 현재 나의 수더분한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영어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심사숙고 끝에 포기했다. 고등학교에서 할 일이 아니다. 고등학교 현장의 영어 선생님들을 보면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그렇게 영어교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순간 이수시간 부족으로 중학교 순회를 다니게 되었다. 하루에 두 학교를 출근하는 형식이었다. 그 일로 중학교가 어떤 곳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남학생을 가르치면서 여학생과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저녁 작가인가, 아침작가인가. 나는 저녁과 아침에 글을 쓴다. 남들보다 최소 40분 전에 먼저 출근해서 글을 쓰고, 퇴근해서 글을 쓴다. 나의 현장이 학교이고, 한 학년이 300명 가까이 된다. 나는 하루에 세 반 혹은 네 반의 학생들을 만난다. 즉, 90명에서 120명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만난다. 강의식 수업보다 실습 위주의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 나를 찾아와서 개별 상담을 하는 학생까지 포함하면 나는 하루면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을 만난다. 또한 많은 동료들을 대면하게 된다. 그러니 글감이 넘쳐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글감이 넘치는 다섯 번째 글감은 정작 글감으로 사용하기가 아주 조심스럽다.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젠가 더 나이 들어서 쓸 글감의 재료가 된다. 잊기 전에 요약을 해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서랍'에 고이 넣어 두게 된다. 그 글들이 세상에 나오게 될 날이 있을지는 확신이 없지만 말이다.
'작가의 서랍의 글을 엮어 브런치 북을 발행해 보세요.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림 한장은 한 회의 글과 맞먹는 시간이 들기에 그림 에세이가 포함된 글을 네 달만에 이만큼 썼다는 점에서 나 스스로 다독이며 대견하게 여긴다. 어떤 시 한 구절이 떠 오른다.
인간만이 자신을 가여워한다
브런치에 책 초판을 발행한 후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글쓰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매일 열심히 쓰고 있다. 퇴근 후에 건강을 위해 컴퓨터를 끄고 운동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다든지, 책도 읽고 싶다. 하루는 눈 딱 감고 하고 싶은 것을 해 보기로 한다. 그러나 다시 또 앉아서 글을 쓰게 된다. 글감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이다.
나도 써줘 내 것도!
신기한 현상은 글을 쓰면 조회 숫자가 가끔씩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라이킷이나 댓글도 없는 조회수의 상승. 브런치 북 초판의 발행을 누르는 순간 폭발적인 조회 숫자가 기록되기 시작해서 나의 특정 글은 며칠 사이 5만 가까이 되었고, 현재 브런치 전체 조회수는 6만이 넘었다. 이제는 발행 글에 이틀 사이 2천의 숫자가 기록되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높은 조회수가 말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가 훑기라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주 발견한 댓글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예명 자체에 'ㅆㅂ'이 포함된 어떤 분의 글에 깜짝 놀랐다.
브런치 독자 예명에 욕설이 섞여 있다니, 충격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욕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브런치만큼은 잘 걸러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랐던 것 같다. 전체 공개글의 의미는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역시 잊고 있던 것이었다.
댓글 내용은 직접적인 욕설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신과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반대 의견을 이상한 방식으로 약간은 모욕적인 느낌으로 댓글에 남겨 놓으셨다. 내면에 분노가 많으신 분 같았다. 내가 심리 상담가도 아니니 어찌 위로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웠다. 안타깝지만 예명 자체가 욕설이 포함되어 있어, 보기 불편하니 댓글은 삭제했다.
댓글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그 방법이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고맙다는 측과 그렇게 정리할 시간에 한 글자라도 공부 더 하는 게 낫다는 측이 팽팽히 맞서면서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심지어 '저런 애는 공부도 못할 거라는 둥'의 더 심한 댓글도 많았다. 메인에 떴기 때문에 글이 가족들에게도 노출되었고, 댓글을 읽게 되었다. 큰딸과 나는 그것을 읽고 흥분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가 그냥 너 공부 잘한다고 말해라. 너를 비방하는 글도 많이 있잖아. 그 글을 올렸을 당시 작은 딸은 아주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 중 가장 멘털이 강한 편이었다. 딸아이는 엄마의 상관하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했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 가족은 서로의 페이스북, 인스타, 블로그 등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지는.
언젠가부터 딸들에 관한 글을 쓰고, 나의 육아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아이들에게 엄마 글의 링크를 보내거나 딸아이 글을 싣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근 사진 출처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