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야기
'소영이'는 어쩐지 다소곳하고 분위기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 나는 자라면서 내 어릴 적 이름에 대한 향수가 무척 컸다. 아버지에게 다시 이름을 돌려달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다. 사춘기 시절에는 책을 읽으면서 멋있는 이름들을 찾아 친구들에게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적도 많다. 이도 저도 안되어 싸인이라도 멋지게 만들어 볼 요량으로 싸인 연습에 연습장을 가득 메운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성장을 하면서 '나'라는 사람은 '나의 이름'과 함께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쯤 되면 글을 읽는 이는 '이 사람 이름은 특이한가?'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아주 평범한 이름이다. 평범할 뿐 아니라 예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름은 자신을 나타내고 책임을 지는 대명사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서도 본명을 쓰지 않고 '루씨'를 쓴다. 점원분이 한번 더 나를 쳐다보며 '다른 나라에서 왔나?' 하는 표정을 짓는 것만 빼면 만족스럽다.
프로이트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평을 받는 자크 라캉은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결핍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상상계에서는 엄마가 곧 나이고 나는 아무런 결핍이 없다. 그러다가 언어를 시작하고 엄마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곧 결핍을 느끼며,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한 욕구들이 모여 욕망하게 하고, 자신이 찾은 것은 왜곡된 것이었기에 죽을 때까지 인간은 결핍의 고리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에서 '언어'는 아주 중요한 인간 탐구의 역할을 하는데, 인간은 무의식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했다. 이때 '언어'는 말만이 아니라 기호적인 면에서 글을 포함한다. 라캉의 언어는 곧 이데올로기이다. 언어를 공부하다 보니 이름에 더욱 예민해진 면도 있다. 로맹가리는 오죽하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냈을까.
어렸을 때 한글을 처음 배우면서 '나' , '너' , '우리'를 소리 내어 먼저 배웠다. '나'는 너와 다르지만 '우리'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조건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할 때 가능한 것이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것은 흑백논리다. 회색이 뭐 어때서...... 살면서 항상 선택에 시달린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10년 넘도록 영어 공부를 하면서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려 보게 되었다. 재스민(Jasmine)이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영어 친구들은 나의 나이와 사생활을 질문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첫 질문이 "몇 살이죠? 직업은 뭔가요?"로 시작된다. 그러나 외국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너의 취미는 뭐야? 너는 이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다. 그런 사고의 방식이 참 좋았다. 다양한 인종 속에 거주한 친구들이 많았고, 가족관계 역시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세계 여행을 한 경우가 많았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만난 한국인들도 열린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의 영어 이름도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좀 더 나의 뿌리에 근접한 대화명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루씨'다. 여권의 성씨로 만든 이름이다. 나의 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씨는 류 씨지만 '루씨'가 되어 영문명으로 쓴다.'루씨(LUcee)’라고.
나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한 번씩 여권을 들춰 보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내가 갔던 곳 입국증이 찍힌 것들을 보는 낙이 있다. 그런데 나의 여권에 대한 불만은 여권의 영문에서 나의 성씨(last name)가 잘못 나와 있는 점이다. 나의 성이 버들 류(유)씨인데 영문 성씨가 루(LU)다. 내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다지만 아버지가 물려주신 뿌리를 바꾸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여권을 처음 만든 시점은 내가 영어를 잘 몰랐던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 여권을 다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여권 갱신 파트 직원이 성씨는 우리나라 여권 법규상 고칠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류'와 '루'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 생각에는 어차피 외국 어니까, 내가 지나치게 민감한 탓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이니 말이다. 본명을 밝히기 싫은데 다른 영문명도 싫을 때, 나는 '루씨'가 되어 '우리'로 이 사회를 살아간다.
'나의 식탁' 글이니 애주가인 루씨가 여름날 와인 음료 샹그리아를 만들어 본다.
샹그리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인 음료다. 여러 가지 상큼한 과일과 톡 쏘는 맛의 사이다 또는 탄산수, 그리고 멜롯같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종류의 레드와인으로 만드는 데 특히 와인이 주가 된다. 달달한 콩코드 와인이나 마트에서 시판되는 샹그리아나 모스까도 다스티 같은 달달한 화이트 와인 등을 사용해도 된다. 달고 시원한 맛으로 계속 마시면 취하니 주의해야 한다. 얼음과 탄산수 등이 있어 묽어지기는 했지만 분명히 와인이고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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