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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캠퍼스씨네이십일 Oct 31. 2016

적당히 해도 괜찮다는 말

<걷기왕> 백승화 감독


 
‘좋아하는 일을 해라, 꿈을 찾아라’가 폭력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매진하라고 남들은 쉽게도 말한다. 심지어 청춘을 위로하는 영화에서조차 꿈이 있는 청춘이라면 좋지 아니하느냐고 손쉽게 위무한다. <걷기왕>은 ‘꿈 예찬론자들’이 본다면 고개를 갸웃할 영화다. 꿈 따윈 없이 적당히 좀 살아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느릿느릿 되묻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의 백승화 감독은 첫 장편 극 영화 <걷기왕>에서 어른들이 강요하는 패기, 열정, 노력과 같은 단어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를 짚는다. 주인공 만복(심은경)은 수업 시간엔 누워서 자고, 쉬는 시간에는 떡볶이나 먹으러 신나게 달려나가는 무사태평한 고등학생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공부 욕심 같은 건 조금도 없다. 학생들의 꿈 찾아주기가 취미인 열혈 담임교사는 선천성 멀미 증후군 때문에 왕복 4시간을 걸어서 통학하는 만복이에게 경보를 권하고 만복은 처음으로 목표라는 걸 가져본다. 아무도 대단한 재능이라고 생각지 않는 ‘걷기’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경쟁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까. 무기력하게 살다 꿈을 찾은 청춘이 전속력으로 달려 멋지게 골인하는 세레모니는 이 영화에 없다. 다만 그냥 그대로도 괜찮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걷기왕>은 첫 장편 극영화다. 제작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배급을 했던 인디스토리에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다행히 제작까지 진행이 됐다. 인디스토리에서는 농담처럼 “시나리오 쓰면 같이 해보자.” 한 것 같은데 내가 진짜 써서 보냈다.(웃음) 시나리오 모니터 받을 때 많은 분들이 ‘만복’ 역에 심은경 배우를 추천했다. 그런데 현실이 되었다. 


심은경 배우가 ‘만복’을 한다고 해서 놀랐나. 
상업적으로 검증이 된 배우가 아닌가. 우리는 독립영화이고. 놀라서 첫 미팅 때 ‘왜 한다고 했냐’고 물었다.(웃음)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언젠가 해보고 싶었고, 너무 무겁지 않은 재미있는 영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더라. <걷기왕> 시나리오가 본인이 평소 해오던 생각과 잘 맞았던 것 같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나루토 아저씨’의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나. 우린 안 될거야, 아마?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은 그런 식의 냉소적인 태도들이 무엇을 정말 비관하기 위해 쓰이는 건지 잘 모르겠다. 패배주의 짙은 말이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지금 그거밖에 할 게 없는 건 아닌가 싶다. 누가 자기 삶을 비관하고 싶어서 비관하겠나. 낙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그런 말들이 사용되는 것 같다. 


<걷기왕>



‘기성세대가 청춘에게 강요하는 열정이 무책임하다고 느꼈고, 꿈이 없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부터 일관되게 가져오는 태도인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주제를 가지고 써야지 하고 시나리오를 쓴 건 아니다. 그런데 만들다 보면 ‘어딘가 모자란 면도 있고 잘 미끄러지기도 하는 잉여’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소위 말해 루저라고 불리는 사람들, 모자라고 부족해보이지만 그 사람들이 만드는 사소한 이야기가 좋다. <걷기왕> 전에는 볼링, 오목 두는 소재도 준비했었다. <걷기왕>은 쓸데없는 것을 잘하는 친구가 경쟁의 세계에 들어가서 겪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청년세대를 위로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3년 정도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보조 작가였던 남순아 작가랑 내가 9살 차이인데, 청년세대에 대한 생각이 그 친구와 나 사이에도 갭이 있더라. 학창시절에 나에게 가장 큰 압박은 공부였는데, 요즘 친구들은 학창시절에 꿈을 찾고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큰 것 같았다. 강연하는 방송을 보면 열정, 패기 그런 단어들을 자주 쓰더라. 꿈이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칼퇴하고 맥주 한 잔 하는 게 행복인 사람도 있다.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요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복은 어른이 볼 때는 한심할 수 있는 캐릭터다. 꿈도 없고 열정도 없다. 이런 태평함이 과잉 열정보다 낫다고 보는 건가. 
뭐가 낫다는 건 아니다. ‘열심히’의 반대가 ‘꿈이 없어도 되고 집에 누워서 TV나 보겠어’는 아니다. 다만 주변에서 “니가 뭘하고 싶은지 얼른 찾아서 그걸 당장 준비”하라고 강요하는 게 이상하다는 거다. 목표를 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자격증 따고 끊임없이 준비하는 게 과연 행복일까. 더구나 내가 평생 할 일을 열 몇 살에 결정하는 것도 너무 웃기다. 왜 그런 것을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지,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꿈도 없던 만복이 어느 순간에는 “이거(경보)라도 안 하면 무서워서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를 성장이라 볼 수 있을까. 
성장이라기보다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중간에 한 번 해보고 달라진 거다. ‘어? 나 뭔가 하고 있네? 나 할 게 생겼네?’ 그래서 신났다가 그만뒀을 때 더 불안감이 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앞서 나가는데 난 뭘 해야 할지 비교하게 되고. 
 
수지도, 만복이도 “무섭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 같다. 살면서 미래에 대한 '무서움'을 느낀 적이 있나.
물론이다.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 그런 게 있을 거다. 나는 20대를 애니메이션 전공하고, 밴드하면서 보냈다. 그래도 이때는 계속 뭔가 하고 있어서 그런 고민할 틈이 없었는데, 서른 넘어서 직장 다니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대화 나누다가 괴리감이 들었다. 한 친구가 전셋집 얻는 이야기를 하는데 통장에 6천만원이 있다는 거다. 당연히 대출 받은 줄 알았더니 이십대 중반에 취업해서 직장을 다니며 모은 돈이라고. 난 600만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 비교가 되고 무서운 생각도 들고 그러더라.  


스스로를 청년세대라고 여기나. 
적어도 내 이야기처럼 느끼고 찍은 것 같다. 물론 온전히 내 이야기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느낀 불안함이나 지금 20대 친구들이 느끼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게 달라졌을 뿐이지 언제나 청소년, 청년에 대한 압박은 있어왔으니까.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뭔가 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니 더 힘들어진 것 같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보면서는 비관주의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걷기왕>은 그때보다는 많이 희망적으로 변한 것 같다. 
원래 나는 약간 긍정적인 사람인데, <반드시 크게 들을 것>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고 찍었다(웃음). 그 영화는 반발심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음악하는 애들은 꿈만 먹고 살고, 가난하고 지질할거야’라며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다. 그게 불편해서 ‘우린 충분히 즐겁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도 꿈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있고, 우리끼리 충분히 좋다고. 근데 지금은 그때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내 안에도 생겼다. 이를테면 그때에는 솔직함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면 타인에게 무례함으로 다가갈 수도 있는 태도들. 그런 건 좀 달라진 것 같다. 


타바코쥬스의 드러머였다. 갤럭시 익스프레스를 주인공으로 음악 다큐멘터리도 찍었고. 이제 음악은 안 하나. 
밴드 해체하고, 음악도 다시 하고 싶어서 준비 했었다. 근데 밴드는 가족 같은 부분이 있어서 다시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다. 영화를 계속 찍는 것도 내가 뭐라도 하고 있다는 증명을 하고 싶어서, 일종의 불안함이 있는 것 같다. 음악은 당분간은 안 할 것 같다. 나는 드럼은 잘 못친다. 밴드가 좋아서 한 것 같다. 같이 하는 게 좋았다. 


“공무원 말고 꿈 없냐, 힘든 것도 꾹 참고 이루고 싶은 진짜 꿈”이라고 묻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지현이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아야 하는데요.”라고 응수하는 대사가 좋았다.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지현이 지금 하고 있구나 싶더라. 
선생님과 지현이의 면담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윤지원 배우에게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도와주는 중요한 장면’이라는 말을 했었다. 공무원은 꿈 취급을 안 해주는 어른들이 있지 않나. 물론 뭔가 가슴 뛰는 열정적인 일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지현이 만복이에게 “니가 경보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라고 말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중반까지는 만복이가 꿈을 찾은 것처럼 희망차게 그려지는데 어느 순간 영화가 배신을 하지 않나. 
내 생각에 만복이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고,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들뜬 상태였던 것 같다. 육상부를 그만뒀다가 다시 들어간 이유도 그래서이고. 지현이가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였다. 

김새벽 배우가 연기하는 담임 캐릭터가 참 해맑아 보이는데, 알고 보면 일종의 악역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어른을 대변하고 있다. “노력에는 끝이 없어”라고 만복이를 다그칠 때는 약간 무섭기도 하다. 

악역이긴 하지만, 담임도 아이들과 같이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임 선생님이라는 설정이었고, 그래서 에너지가 넘쳐서 아이들에게 열정과 꿈을 강조하는 거다. 아이들과의 면담을 통해 선생님도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알게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 품에 안고 다니는 책이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다. 가짜 책을 만들었는데 표지가 윤성호 감독이다. 원래 친한 사이인가. 
안 친하다.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표지에 넣었다. 감독님 작업할 때 몇 번 같이 했는데 나를 어려워하시더라.(웃음) 서로 어려워하는 사이다. 
 
만복이가 키우는 소, 소순이 목소리를 안재홍 배우가 맡았다. 잘 어울리더라. 
처음에는 소 목소리가 저음에 나이 많은 남자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성기 선배님 같은(웃음). 근데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심은경 배우가 안재홍 배우와 영화를 같이 했는데, 추천해줬다. 생각도 못했는데 젊은 배우들 중에서는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우직한 느낌이 있어서.(웃음)


캐릭터들이 커서 무엇이 되었는지를 엔딩크레딧에 담았다. 
영화가 동화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그래서 소순이가 영화를 열고 닫는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에 ‘이 사람은 무엇이 되었어요’를 넣었다. 만복이는 일부러 뺐다. 만복이의 미래는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걷기왕>은 희망을 주는 영화인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다. 웃기려고 만든 장면에서 관객이 안 웃으면 내가 힘들다(웃음)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가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능하다고 느끼거나 존재 가치를 못 찾는 분들에게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글 김송희 사진 최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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