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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캠퍼스씨네이십일 Nov 24. 2016

낭만부를 모집했다

이십대 30명이 꼽은 낭만기

 SNS에 낭만 동아리 모집 

“낭만이 뭐라고 생각해요?”라고 뜬금 없이 물었을 때, 조금은 당황한 채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 대신에 <오늘의 낭만부>라는 네이버 웹툰이 생각난다는 사람이 있었다. 100화 정도 되는 분량을 그 날 다 읽었다. 무수한 스펙 쌓기와 시험들로만 점철된 캠퍼스에 낭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이, 우리는 낭만을 할 자격이 있다며 낭만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내용이다. 낭만을 외치는 주인공이 부러워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의 일주일을 꽉꽉 채울만큼 풍성한 추석 연휴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척들을 보러, 끝날 것 같지 않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데 계속 낭만부 생각이 났다. 낭만부는 나의 잃어버린 낭만과 연휴가 끝나가는 아쉬움을 모두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마음을 먹었다. SNS와 카카오톡 단체방에 ‘낭만 동아리’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취업이나 창업 동아리도 아니고 영어 스터디도 아니고 ‘낭만’을 가지고 동아리 활동을 한다니,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에게도 소식이 없어 혼자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연락을 받았다. 알고 지내던 사람, 모르던 사람, 얼굴만 아는 사람들. 그렇게 낭만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8명의 낭만부원들에게 9월17일 오후 6시15분 잠원 한강공원으로 모여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무박 2일 비밀 프로젝트
일단 저지르고 보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대학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놓치기 싫은 모임이라고 연락해준 사람도 있었고, 나와 안면이 없는데도 SNS를 통해 연락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낭만을 찾아 온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무박 2일 동안 진행될 기본 프로그램을 짜고, 각각 부원들의 낭만을 미리 물어봐서 모두 실현하기로 했다. 모두 비밀리에 혼자 짠 계획이라 부원들은 모르고 있었다. 깜짝 놀래켜주고 싶었다.
드디어 만나기로 한 날, 나는 내 이름을 벗고 ‘청매실’을 입었다. 꿀다, 맘모스빵, 민돌이, 바나나, 복실, 솔의눈, 이도령, 정구리.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기로 했다. 
오후 6시15분까지 모여 달라는 건 나의 음모였다. 왠지 다들 늦을 것 같아서 일찍 부른 것이다. 6시20분, 약속장소엔 청매실, 정구리, 바나나가 모였다. 많이 늦는 사람들은 다음 장소에 미리 가 있으라고 했다.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6시15분에 모여서 30분 정도 낭만부 포스터를 만드는 것이었으나 지금도 내가 준비해간 스케치북은 백지 상태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 대신에 주어진 해질녘의 한강공원을 여유롭게 바라본 시간은 정말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으로 나와 연을 날리고, 산책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돗자리를 깔고 즐기고 있었다. 편의점 앞에 앉은 사람들의 손엔 대부분 맥주 한 캔이 쥐어져있었다. 정구리와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고 얘기를 주고 받던 중에 가장 중요한 솔의눈이 도착했다. 
솔의눈의 낭만은 대학잡지의 표지모델을 해보는 것이다. 여러분이 방금 펼쳐본 특집, 첫 페이지 속의 인물이 바로 솔의눈이다. 특집 코너의 모델이지만 솔의눈은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뻐했다.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솔의눈은 다른 사람에게 이 페이지를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재빨리 솔의눈의 표지 사진을 찍고, 넷은 택시를 타고 다음 장소인 CGV 압구정으로 이동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 상영 시작 시간은 7시15분. 7시17분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영화관에 모여있던 다섯 명과 합류했다. 아홉 명이 모두 모였지만 서로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앉자마자 영화가 시작했다. 미국 국방부의 청을 받고 다른 나라들의 장점을 약탈하러 간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의 다큐멘터리는,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낭만부에게도 유효한 메세지를 주었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찾고자 한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이클 무어가 한국에 온다면 우리 낭만부를 약탈해 갈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 큐레이터의 해설도 다 듣고 나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얼굴들을 확인했다. 내가 말문을 열기 전까지 멀뚱멀뚱히 가벼운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다들 이후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동안 걸으면서 대화하기 
나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연애 초반에 미친 짓을 했던 기억이 있다. 새벽 한 시 즈음 조금 취한 채로, 경희대에서부터 광나루역까지 세 시간을 걸어간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탈 수 있었음에도 그 날은 걷고 걸으며 이야기 했다. 95%가 대화, 4%가 걷기로 이루어져있는 영화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의 현실 보급판 같았다. 아직도 그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세 시간은 아니더라도, 낭만부에게 함께하는 이틀 동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비슷한 임무를 주었다.
일단 남자들에게 익명으로 단어 하나씩을 말해달라고 했다. 어바웃타임, 펭귄, 봄날은간다, 스냅사진. 여자들은 하나씩 골랐고 그렇게 짝을 지었다. 그렇게 짝지어진 4쌍에게 1997년 심리학자 아서 아론이 연구한 ‘사랑에 빠지는 36가지 질문’을 주고는 걸어서 1시간 거리의 장소로 모이라고 말해주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한 가지 능력이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을 얻고 싶은가?’ ‘상대방과 절친이 된다면 그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라’와 같은 질문들이다. 한 시간 뒤 다들 서래공원에 모였다. 처음보다는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다들 웃고 있었다. 궁금해서 어땠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주어진 질문을 잠깐 주고받다가는 이내 그냥 자기들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 바다, 캠프파이어, 기타, 노래, 폭죽… 
우리는 각자의 낭만이 무엇인지 말하기 시작했다. 맘모스빵은 뜬금없이 바다 가는 것, 바나나는 또래가 운전하는 차 타보기, 꿀다는 차 타고 일탈하기, 정구리는 캠프파이어하기, 이도령은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 민돌이는 폭죽 터뜨리기.
나는 또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일탈해 뜬금없이 바다 가서 캠프파이어를 하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고 폭죽도 터뜨리기 위해서 미리 자동차를 렌트해두었다. 맘모스빵이 운전하는 12인승 자동차를 타고 우리는 밤 12시에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을왕리 해수욕장으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말을 섞었다. 미처 못한 질문들을 나누고 또 다른 질문들을 낳았다. 맘모스빵은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차 없는 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렸다.



을왕리 바닷가는 조금 쌀쌀했다.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밤새 우리는 밀려오는 파도에 자리를 세 번이나 옮겨야 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우리에게 밀물이 시계가 되어주었다. 하나씩 하나씩 낭만을 다 실현했다. 몇 명은 술과 음식을 사오고 몇 명은 자리를 만들었다. 폭죽도 샀고 번개탄도 샀다. 땔감용으로 여기저기 버려진 박스를 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름대로 이야기 주제를 준비해갔는데 소용없었다. 우리 이야기 하기에도 바빴다. 첫사랑 이야기, 인생 사는 이야기, 시덥잖은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 하루가 너무 짧았다. 사람들은 계속 건배를 했고, 나는 건배사를 했다. 매번 지어내느라 골치 아팠지만 “낭만은 소소한 것-우리 안에 있다”를 변형한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했다. 꿀다는 우리 부모님들이 정말 이렇게 살았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고. 그러다가 캠프파이어를 했다. 안 붙을 것 같던 불은 붙었고 정구리는 불이 참 예쁘다고 했다. 불은 밤새 추웠던 우리에게 따뜻함을 선물했다. 그러다가 폭죽을 터뜨렸다. 솔의눈은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꿀다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도 웃게 만들었다. 민돌이가 말할 때는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맘모스빵과 정구리는 엄청난 분위기메이커였다. 바나나는 술에 취해 혼잣말을 했다. 이도령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다가 해가 밝았다. 우리는 밤새 바다와 하늘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지켜봤다. 바다의 민낯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가능한한 꾹꾹 눌러 담아 롤링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나는 미리 인터넷 우표를 뽑아왔고 연필과 종이를 준비했다. 복실은 우정도 사랑이라고 말했고, 솔의눈은 사랑은 연필로 쓰는 거라고 했다. 각자의 시선을 편지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우표를 붙여 빨간 우체통에 넣었다. 다들 바로 뜯어보고 싶어했지만 우리는 며칠을 기다려야지만 편지를 받을 수 있다. 바로바로 소식을 받아볼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기다림에게 애증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출발했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졸다가 지하철을 몇 정거장 더 가고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한 것은 기억이 난다. 나는 이틀은 연속으로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녁 먹을 때쯤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보니 복실이가 한 사람당 세 곡씩 노래를 골라주었다. 복실이의 낭만은 친구에게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주는 것이다. M83의 <Wait>, 박새별의 <물망초>, Blur의 <Song2>. 내게 골라준 노래다. <물망초>는 내 사랑 이야기를 듣고 떠올랐다고 한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고 또 듣고 있다. 갑자기 어제의 일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말 만났고, 해변에 가서 노래를 부른 게 맞을까? 복실이가 골라준 노래를 들으며 내가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오늘 편지가 도착했다.


글 조은식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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