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에나 있는 선셋 뜨는 해와 지는 해는 특별하지 않다. 그 특별하지 않은 날들이 연속되는 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선셋은 특별한 순간으로 각인된다. 어떤 날과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 속에 특별한 선셋이 있다.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은 내 눈을 원시적으로 물들인다. 여행을 갈 때면 어떻게든 새벽에 일어나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한다. 마치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은 여행에서의 새벽 산책은 게으른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닫힌 생각들을 열게 한다. 바닷가의 새벽은 세상의 틀에 맞춰진 내 의식을 깨우고 주홍빛과 보랏빛, 블루그린의 색상을 사방에 퍼트린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바다가 품고 바다에 비추인 하늘이 안아주고 나무가 나를 감싼다.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니게 된다. 이따금 바닷바람이 나를 스칠 때면 두 눈을 꼬옥 감고 내게 기꺼이 내어주는 그 온기를 느끼곤 한다. 신년, 해를 보러 떠나는 사람들 사람들은 신년이 되면 떠오르는 해를 보러 어디론가 떠난다. 어제도 있었고 그제도 있던 해를 오늘은 특별한 곳에서 더 잘 보겠노라고. 그곳에서 만난 해는 다른 날의 것과 다르게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새해엔 모든 것이 새 마음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자연에 나타난 형태를 빌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준다. 펠리스 발로통의 영혼을 통해 내 영혼의 상태를 적어간다. 이른 아침의 만물은 좋은 것을 담고 있다. 그 좋은 걸 찾아 신년이면 해를 보러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의 나는 더는 해를 찾아 떠나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순간은 오늘 안에 수도 없이 많다. 좋은 것을 담은 해는 우리 집 거실 창으로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더는 특별한 순간을 찾아, 더 좋은 해를 찾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일상의 순간들은 기록하는 즉시 특별함으로 남게 된다.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시간 새벽의 해를 보고 있자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렘브란트는 자화상만 100점 넘게 그렸다. 케테 콜비츠 역시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고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렸다. 새벽은 치열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렘브란트처럼 나의 자화상만을 남길 것인지 케테 콜비츠처럼 타인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고 연민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그 순간을 알아차리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펠리스 발로통의 그림처럼 색이 분명한 날들의 내가 있었다. 선명한 나여야 만족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그래야 나라고 느끼던 순간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한 것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있는 듯 없는 듯 스미듯 자연스러운 것들에 더 애정이 간다. 확실하게 각인될 미지의 곳에서의 일몰보다 어제와 오늘 만났던 내 집에서의 떠오르는 해에 충만함을 느낀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것들이 더 이상 심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의 생각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여정에 글과 그림을 만나 안정을 찾게 된 셈이다. 떠오르는 새로운 해를 찾아 더는 멀리 떠나지 않게 되었다. 발로통의 작품을 통해 내 안의 다행을 들여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