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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Jan 21. 2024

<라몬 카사스Ramon Casas>_무도회가 끝난 후A

번아웃에 관한 이야기

때마다 번아웃
놀이가 끝이 나면 어김없이 고꾸라진다. 이젠 쉬어야지. 이젠 일을 만들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또 무언가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결국, 아파야 쉬어진다. 나는 굉장히 몰입하는 성향이라 한번 그 몰입의 문을 열면 번아웃이 올 때까지 내 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건 초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부에 취미가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그 안에 흠뻑 빠져 있곤 했다.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 인형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판매하지 않는 종류의 옷들을 직접 그려 색칠해 입히면 그제야 만족감이 들었다. 표어나 포스터 과제를 할 때도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집중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공부하느라 밤을 새워 본 적은 없어도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느라 날을 세워 본 경험은 많았다. 그만하고 자야지. 보통,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학생 집안에서 들을 수 있는 말.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듣곤 했다.


번아웃은 웹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찾아왔다. 퇴근이랄 게 없는 삶이었다. 입원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S 대학 메인 홈페이지 디자인에만 몰두해 있었다. 디자인 결과는 좋았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의 혈관이 터지고 귀 뒤쪽부터 어깨까지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계속됐다. 머리를 돌릴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대상포진. 걸으면 휘청할 정도로 독한 약을 먹으면서 번아웃을 맞은 나를 자책했다. 생각처럼 온전히 따라주지 않는 몸을 원망했다. 마흔에 가까워진 나이. 다신 번아웃을 겪지 않으리라. 하나에 너무 몰입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되니 하는 동안 즐겁게 하자. 즐거운 놀이로 시작해 놀이로 매듭지을 수 있을 정도로만 하자. 그런 약속을 하고도 크고 작은 번아웃을 여러 차례 겪었다. 생각처럼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강사를 하게 된 이유
마흔일곱. 강사를 해야지 생각한 건 아빠와 남편의 상황을 잘 이해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한 회사에 삼십 년 이상을 몸담았던 아빠.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남편. 직장생활이란 내가 크게 마음먹지 않는 이상 안팎으로 성장을 가져올 일이 별로 없다. 퇴근 후 회사와 한 시간 거리로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자기 계발을 따로 하지 않는 이상 차곡차곡 쌓이는 쥐꼬리만 한 월급 외엔 자기 성장이 없는 삶.
 
내가 중학생이던 때 아빠는 회사에 다니며 일본어를 공부하셨다. 없는 시간을 쪼개 역사 시리즈물도 끊임없이 읽으셨다. 아빠만의 시간이 생기면 원하던 사진도 배우고 차를 개조해 세계여행을 다니실 줄 알았다. 퇴직 후, 아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소속과 역할이 없어진 아빠는 매일 티브이 방송으로 헛헛한 자신을 달래곤 했다. 그리곤 여러 산악회 대표를 맡았다. 산을 타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2023년, 일흔넷의 아빠는 몽골 여행을 몇 달 앞두고 담도암을 판정받았다. 그리곤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 한 번도 크게 아파본 적 없던 아빠. 자식들보다 체력이 더 좋던 아빠가 급하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군인 같은 남편. 직장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거나 옮길 생각이 없다. 남편이 정년이 오기 전에 내가 할 일을 찾아야만 했다. 왜인지 악의 구렁텅이에서 남편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정년과 관계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삶을 살기 원했다. 김형석 교수처럼 100세가 넘어도 꾸준히 책을 쓰고 강의하는 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는 것이 많아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낸 것을 듬뿍 나누는 강사로의 삶을 살기로. 2023년은 강사로의 첫발을 디딘 해였고 갑자기 암 판정받고 세상을 떠난 아빠를 보낸 해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어진 기회들과 뜻밖인 아빠의 죽음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쁜 해였다.

번아웃은 오지 않아
힘들 땐 조금 쉬어 가야지. 아빠 생각하며 목놓아 울어야지. 계획하니 여지없이 몸이 아팠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기침, 호흡이 힘들 정도여서 갈비뼈를 부여잡고 수그린 채 집안을 왔다 갔다 벌써 한 달째. 초기엔 객혈로 죽음을 앞둔 이상처럼 이따금 가래에 피도 섞여 나오곤 했다. 병원을 세 군데나 갔고 결과적으로 폐나 기관지엔 별다른 이상이 없음. 다만, 고양이 털과 집먼지진드기에 반응이 나왔으니 기침을 유발하는 것들을 멀리하는 게 좋다고. 기침이 한창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라몬 카사스의 <무도회가 끝난 후>를 보게 되었다. 새로 산 듯 보이는 세련된 구두. 더 이상 움직일 힘은 없어 보인다. 풀린 눈과 검은색 드레스는 현재 그녀의 상태. 그녀가 바라는 쉼의 원천은 소파가 품고 있는 자연. 오른손에 꼭 쥔 희망의 끈은 쉬는 중에도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쉬면서 원고를 쓰고 책을 읽는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기절 중인 상태. 자연과 태양을 품은 우리만의 능소화와 한옥(자세한 내용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읽어 보시길)을 꿈꾸는 지금의 내 모습을 라몬 카사스의 그림에 투영해본다.

번아웃은 오지 않았다. 아는 것을 듬뿍 나누기. 놀이처럼 즐기면서 하기. 가정과 일을 적절히 병행할 것. 다른 이의 계획에 끌려가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계획에 집중하기.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 이런 규칙들을 세우고 나니 번아웃은 오지 않았다. 아프면 쉬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괜찮아지면 다시 듬뿍 나누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지. 번아웃 안녕!

라몬 카사스ramon casas/After the ball 무도회가 끝나고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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