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림이야기

<사랑의 불시착>_마크 로스코 작품

by 김상래

드라마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드라마가 종영된 후 몰아서 보는 드라마들이 있긴 하다.

요새 신랑과 정주행으로 달리고 있는 '사랑의 불시착'.
신랑의 권유로 함께 보고 있는데 (현빈은 어느 순간 연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된 건가. 비주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심쿵' 하지만~) 아는 그림이 눈에 걸렸다.

구승준이 지내는 북한 숙소 거실 뒤편에 걸린 커다란 두 점? 세 점의 그림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어! 어디선 본 그림 같은데...'
"마크 로스코 작품 맞지?"
"맞아. 맞아."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기로 빠르게 찾았는데도 딱 내가 본 그 화면을 찾기가 어려워 부분 그림이라도 나온 장면을 찾아 캡처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렇게 눈물을 흘린다는 마크 로스코 작품들이 북한 저택에도 걸려 있을 수 있구나 싶었던 장면들.

아무리 찾아도 네이버엔 드라마에 출현한 마크 로스코 작품 정보는 없고 현빈과 손예진 정보만이 그득그득.
81년생 동갑내기 선남선녀의 열애에만 열을 올리고 말이지! 왜 이렇게 잘 어울리냐 말이지!

하. 지. 만!
시대의 희생양이 된 마크 로스코 아저씨도 기억해주자!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 Marcus Rothkowitz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쉬르레알리슴의 영향으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선보였다. ‘적, 다, 흑’처럼 구름같이 윤곽이 모호한 방형에 가까운 색면을 세로 배열한 화면은 색채의 미묘한 조화를 나타낸다. 벽화의 대표작으로는 그리스도의 수난 주제의 로드코 채플 벽화가 있다.

오직 예술에서 위안을 구했던 처절한 이방인

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열 살이던 1913년 “영어로 말할 수 없어요”라는 표찰을 목에 걸고 미국행 기차를 탔다. 그의 부모가 당시 러시아에 퍼지던 반유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이민을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스코의 아버지가 암으로 숨을 거뒀고, 로스코는 가난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마크 로스코 무제 시리즈


로스코는 치열한 공부로 월반을 거듭한 끝에 19세에 예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뜻밖의 좌절을 겪는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까지 퍼진 반유대주의로 인해 예일대학교가 로스코의 장학금을 돌연 취소해버린 것이다. 로스코는 결국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이방인이었던 그가 위안을 구한 곳은 오직 예술이었다. 그는 1923년 친구를 만나러 방문했던 한 미술기관에 등록해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나는 단지 기본적인 인간 감정들, 그러니까 비극, 황홀, 숙명 등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로스코는 서서히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쌓아 나갔다. 1935년에는 동료 화가들과 급진적인 예술가 집단 ‘더 텐(The Ten)’을 결성해 기성 미술계에 반기를 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그리스 비극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며 동시대인들에게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비극성을 인식시키려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 등의 근원적 감정을 전달하기를 원했고, 이를 특정 형상에서 벗어난 색채로 표현하는 작업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1946년, 로스코는 일명 ‘멀티폼(Multiform)’이라 불리는 양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기점을 맞았다. 다양한 색채가 캔버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 그림들은 그가 구상에 대한 의무감에서 더 자유로워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이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어떤 감동이나 드라마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로스코는 거듭된 탐구 끝에 1949년 드디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게 된다. 단 두세 개의 색채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로스코의 대표작이 이때부터 탄생한 것이다.

화려한 전성기, 그리고 비극적 죽음


거칠고 강렬한 색채로 완성된 로스코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정서적 동요를 일으켰고, 로스코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했고, 195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그림은 해마다 몇 배씩 높은 값에 팔려나갔다. 1961년 로스코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받았고, 같은 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까지 열었다. 그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거장이 되었다.

전성기의 작품(green-and-tangerine-on-red, 1956)

그러나 동시에 어려움도 찾아왔다. 동료 예술가들은 그의 세속적 성공을 비난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계는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열광했다. 어느덧 로스코는 구시대의 예술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 오랫동안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두 번째 아내 멜과의 관계도 나빠졌다. 우울과 불안에 빠진 로스코는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의 어두운 색채를 점점 더 많이 사용했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1964년 평생의 소원이던 예배당 벽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 뒤 몇 년 후인 1970년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살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아는 그림이 종종 눈에 걸린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내 작은 방에 담아 두고 적어보기로 했다.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자세하게 다루고 싶다.


#사랑의불시착 #현빈손예진 #마크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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