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무대>

샤갈의 <마술피리의 기억>을 보며

by 김상래
마르크 샤갈_마술피리의 기억, 1976 113.5 ×194.8 cm

삶이라는 무대 뒤편

마르크 샤갈의 〈마술피리의 기억〉을 처음 봤을 땐, 멀티플 세상 같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붉고 푸르고 군데군데 노란색들이 파스텔톤으로 연하게 깔려있지만 어쩐지 복잡해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단순한 삶을 생각하며 들여다본 그림은 마치 카오스처럼 나를 휘감았다. 모든 상황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유령의 도시 같이 느껴졌다. 샤갈의 일대기를 모른다는 가정하에 직관적으로 드는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 <마술피리>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내게는 음악보다도 삶의 뒤편, 무대가 아닌 ‘무대 뒤’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다 보니 그림 속의 그 혼란이 인간의 삶 같다. 언제나 분주하고, 누군가를 챙기느라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한 채 그저 안도감 하나로 버티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딘. 그림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곤 한다. 때로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떠밀리고, 그러다 스스로 멈춰 서곤 한다. 누군가는 내 곁에서 피리를 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내 곁에 그저 조용히 서 있는 그림으로 보였다. 그렇게 ‘내 안의 풍경’이 그림에 투영되었다.


헤맨 시간은 다 내 몫이다

젊을 땐 흔들릴 때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남들보다 늦는 것도, 확신 없이 걷는 것도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했다. 어느 방향이 맞는지 몰라 한참을 맴돌고, 가끔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때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별 필요 없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때로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지금은 안다. 그때 헤맨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고운 주름이 되었다는 것을.


샤갈의 〈마술피리의 기억〉을 오래 들여다보면, 복잡해 보이던 형상들이 차츰 감정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겹쳐진 색은 사람 마음의 겹 같고, 허공 중에 떠 있는 인물들은 우리 마음속 불안과 닮았다. 그림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다른 구석에선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삶이라는 무대가 꼭 그런 것만 같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사랑을 지키고 있는, 그런 하루하루가 겹겹이 이어진다.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헤맨 땅은 모두 내 땅이다." 돌고 돌아, 다시 돌아와 보니 그때 헤맨 길 위에 피어난 나만의 감정, 관계, 성장이 있었다. 혼자 견뎌야 했던 밤들, 참아낸 순간들,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몫이자 나의 뿌리가 되었다.


그림 앞에서 배운 것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울리는 건 화려한 장면이 아니다. 조용한 시선, 말없이 건네는 위로, 그리고 아무 설명 없이도 오래도록 남는 잔잔한 감정이다. 어느덧 샤갈의 그림은 형형색색의 소란 뒤에, 말없이 오래 남는 여운을 가진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편의 침묵처럼, 누군가의 말 없는 안부처럼.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아주 잘 알 것 같은 마음이 있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지쳤는지, 왜 그 사람과의 대화가 오래 마음에 남았는지. 시간은 많은 걸 흘려보내지만, 어떤 기억은 점점 또렷해져 내 안에 각인된다.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더없이 선명해지는 그게 진짜라는 걸 이제는 안다.


샤갈은 그런 걸 그렸던 것 같다. 기억 속의 불협화음마저도 결국 하나의 곡이 되고, 지나간 감정들마저도 지금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삶의 선율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랜 시간 다리지 못했던 감정들, 애써 무시하고 살았던 마음들이 그림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꽃은 흔들리며 핀다고. 돌고 돌아온 인생이지만 그 모든 게 나의 길이었다고. 그 자리에 더 넓은 나만의 길이 만들어져 뚜벅뚜벅 걷고 있으니 지나온 모든 과정이 다 괜찮았다고.


삶은 언제나 정리되지 않지만, 그 흐트러짐 속에서 우리는 나를 조금씩 찾아간다. 마르크 샤갈의 〈마술피리의 기억〉은 지나온 삶 앞에 조용히 놓인 거울 같다. 복잡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진실한 나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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