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을 따라 걷는 마음

by 김상래
Richard Thorn_Summer Begins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은 수면 위에서 춤추는 파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다 안에 들어선 사람들, 물살을 가르며 걸어 나가는 작은 아이들, 그 옆에서 발끝으로 물결을 느끼며 한없이 걷고 서는 부모의 모습 때문이었다. 리처드 쏜의 그림 《Summer Begins》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바다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곧장 내게 반짝이는 한 시절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단연 반짝이는 보석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이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기분이다. 무언가를 처음 보는 듯한 눈빛, 처음 느끼는 감정, 낯설지만 설레는 표정들. 아이 덕분에 나는 내 삶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릴 적 아이와는 바닷가보다도 동네 분수대나 산, 도서관, 미술관을 더 자주 찾았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던 장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늘 작은 세상에서 커다란 기쁨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림 속에서 햇살이 물에 닿아 하얗게 반짝일 때, 나는 오키나와의 코우리 대교 아래 그 고운 바닷가를 떠올렸다. 신랑을 만나던 속초에서 시작된 내 바다의 기억은, 곧바로 오키나와로 이어졌다. 그곳은 조용하고 깨끗한 바다였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초등학생이 되기까지, 우리는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았다. 한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던 시절부터 어느새 한국인들로 붐비던 때까지,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도 바다는 여전히 반짝이는 평온함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모래 위에 서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바다에 살고 싶은 사람일까.

발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가 들어왔다 빠져나갈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태양 빛에 온몸이 데워지고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라도 바다가 좋았다.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 그 끝없음이 좋았다. 그런데 아이는 조금 달랐다. 낯선 모래의 촉감을 좋아하지 않았고, 조금 걷다 보면 팔을 내밀며 안아달라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아이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조차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다를 기억할 테니까.

시간이 흘러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세븐시스터즈의 하얀 절벽을 보고 싶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이 찡했다. 아이가 바다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 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보다는 특별한 절벽을 보고 싶어 했다. 얼마 전, 유럽 여행 중엔 결국 그 절벽을 보지 못했다. 런던의 복잡함과 빠듯한 일정 속에서 영국 남부까지 내려갈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그 풍경을 보여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그림 속의 바다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여행은 스위스에서 시작됐다.

호수와 산, 넉넉한 공기, 모두가 천천히 걸어가는 마을의 시간들이 좋았다. 신랑은 스위스를 가장 좋은 곳으로 꼽았고, 아이도 옥스퍼드와 스위스가 최고라고 했다. 그곳에선 모두 여유롭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바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호수와 들판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작은 골목을 걸으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음엔 어디를 가볼까 상상하던 시간들. 그것으로 충분히 반짝였고, 충분히 따뜻했다.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때로는 조급함이 되기도 한다. 아이는 바다를 몰라야 하는 것도, 모래를 좋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순간에 함께였다는 것,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기억은 감정의 이름이다. 때로는, 반짝이는 풍경보다 오래 남는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내내 바랐다. 우리의 바다도 언젠가, 이렇게 반짝이는 한 장면처럼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말이다. 기억 속 어느 여름날처럼, 따뜻하고 빛나게.

햇살은 물 위에서 부서졌고, 아이가 안아 달라고 양손을 내밀던 시절, 그때의 바람이, 지금도 가슴속 어딘가를 조용히 스치고 지나간다. 이제는 그때 그 바다로 다시 갈 수 없지만,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던 그 순간은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곳엔 우리가 함께 웃고 걸었던 시간이, 조용히, 끝없이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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