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닦아낸 거울
판위량(潘玉良)의 삶을 다룬 텍스트들은 대개 소설 같은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기구한 삶’이라는 수식어는 그녀의 이름 뒤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에 의해 기생으로 팔려 가야 했던 유년, 극적인 구원을 통해 예술의 길로 들어선 서사는 그 자체로 극적인 드라마가 된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그녀의 일생은 일찍이 대중문화의 영감이 되었다. 장이모 감독 제작, 공리 주연의 영화 <화혼(畵魂)>으로도 잘 알려진 그녀의 서사는 연극과 드라마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이는 동양의 여성 화가가 짊어져야 했던 시대적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이 소설은 중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청명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 여성 화가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가장 사실적이고도 유려하게 묘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사랑과 예술, 그 어느 것에서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저릿해온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 내 안에 더 묵직하게 남은 것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로는 좋은 인연을 만나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 손길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삶을 밀고 나가는 힘찬 에너지를 스스로 끝까지 지켜냈다는 사실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내밀어 준 손길은 삶의 고비마다 큰 힘이 되어주곤 한다. 그 호의를 붙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서려는 의지가 더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성장을 마주하게 된다. 판위량은 타인의 배려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그 온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있는 순간에도 자신을 채우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구원을 넘어 스스로를 키워낸 그녀의 성장을 마주하며, 나는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판위량에게 예술은 타인이 닦아준 거울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손으로 어둠을 닦아내어 비로소 마주한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대신할 수 없는 곁
판위량의 생애 위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장이 겹쳤다. 자신의 역량이 단단해질 때 비로소 타인과 건강하게 연대하고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진정한 독립의 의미로 다가왔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모든 관계를 인내하며 이어가라는 뜻은 아니다.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흔들릴 만큼 누군가 내 삶의 영역을 침범해온다면, 그때는 나를 위해 과감한 단절을 선택해야 한다. 진정한 홀로서기는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힘인 동시에, 나를 해치는 관계로부터 나를 분리해낼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상황을 탓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만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믿음은 우리 삶에서 기분 좋게 빗겨나가곤 한다. 오히려 부족함 속에서 꽃피운 결실이 우리를 더 놀라게 하니까. 위대한 예술도, 빛나는 삶의 순간도 결핍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예상을 깨고 피어날 때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홍천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SKY 의대 3관왕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 고등학생의 성취가 유독 마음을 끌었던 것은, 단순한 성공담이라서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 있다면, 우리 삶의 공식은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핑계란, 제자리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달콤하고도 정교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힘겹게 일어서지 않아도 기댈 수 있는 누군가의 어깨나 상황이 있기에, 우리는 그 편안함 속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를 대신할 배우는 없다. 기어가는 법을 배우고, 걷다 넘어지며, 다시 일어서는 그 수많은 과정이 모여 오직 나라는 사람만의 유일한 무늬를 만들어간다. 곁에서 나를 일으켜 주는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 같은 축복일 것이다. 설령 그런 손길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영원히 주저앉아 있을 이유는 없다. 우리 안에는 자신을 다시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에너지가 충분히 있다.
다시, 쓰는 쪽으로
그 정직한 힘의 실체를 나는 그녀의 그림에서 발견한다. 판위량의 자화상 앞에서는 마음이 경건해진다. 치파오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화려한 화장으로도 다 가릴 수 없는 삶의 깊이를 보여준다. 인물 옆에 활짝 핀 꽃들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지만, 그 화려함조차 그녀가 지닌 존재의 무게를 앞서지는 못한다.
꽃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삶을 대신 보상해 줄 수는 없다. 꽃은 삶의 ‘대신’이 아니라 ‘곁’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초연한 표정이 말해준다. 화사한 꽃들 사이에서도 결코 빛바래지 않는 그녀의 당당함. 삶의 본질이 외부의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단단함에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세상은 나를 기생이라 불렀으나, 나는 나를 화가라 불렀다. 내 붓끝에서 피어난 꽃들은 내가 견딘 겨울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면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날들의 무게가 눈가와 입술의 단호한 선 위에 겹겹이 얹혀 있다. 그 처연한 단단함 앞에서 나는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녀를 향해 품게 된 ‘존경’이라는 마음은 결코 가벼운 수식어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단단한 사람은 없다. 단단함은 타고나는 성질이 아니라, 무수한 난관을 어떻게든 넘어보려 했던 경험의 총합이자 근육이다. 판위량은 그 생존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녀에게 그림은 예술이기 전에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판위량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지금의 내 마음을 보게 된다. 내 삶을 조금 더 소중하게 가꾸고 싶다는 욕망, 나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이 비등점을 넘는다. 어떤 생을 살든 그 자체로 살아낸다는 것은 숭고하다. 판위량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중학교 사서로 오래 계셨던 선생님이 “꼭 읽어보라"라며 건네주신 것이었다. 누군가가 건네준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보폭을 바꾸고, 멈춰 있던 자리에 다시 앉게 만든다.
요즘 나는 잠시 글쓰기를 멈춘 채 한 해를 갈무리하며 내년의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비워진 시간 속에서 판위량의 자화상을 마주했고, 그 눈빛에 이끌려 다시 펜을 잡아야 할 자리를 떠올렸다. 이제는 멈춰있던 자리에 다시 앉아, 계속해서 이어지는 하루 가운데 오직 나만의 날들을 묵묵히 기록해 보려 한다. 판위량이 붓을 놓지 않았듯, 나 역시 계속되는 삶의 페이지마다 나의 마음을 차곡차곡 채워가야겠다.
삶에 핑계를 대기보다 하루의 진심을 기록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보고 싶다. 때로 휘청거릴지라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나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고 내가 다시 글을 쓰는, 그 다정한 길을 꾸준히 걷고 싶다. 판위량이 그랬듯, 나 또한 나의 노트 위에 나만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비록 화려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냈다는 증거만큼은 가장 명확한 문장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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