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시작된 4300킬로미터
강연이 끝난 뒤, 근처 숙소로 걸어가던 밤이었다. 아이에게 아빠와 함께 뭐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 강연하는 동안 도서관 열람실을 천천히 돌아다녔어. 거기서 책 한 권을 발견했지. 휴대폰으로 〈4300킬로미터〉 검색해 봐.”
표지 제목을 말할 때,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엄마, 나도 이걸 해야겠어.”
며칠 뒤, 남편 휴대폰으로 어머님께 전화가 걸려 왔다.
“필요한 책 있니? 읽고 싶은 거 있으면 책 제목 알려줘.”
책 좋아하는 가족답게, 이렇게 책을 보내주시는 일이 종종 있다. 제일 먼저 아이가 말했던 그 책, 4300킬로미터를 적었다. 그 아래에는 남편이 읽고 싶은 양자역학 관련 책, ‘이번 겨울에는 꼭 읽어야지’ 마음먹고 있던 내 책까지 차례대로 더해 어머님께 리스트를 보냈다.
얼마 후, 묵직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맨 위에 4300킬로미터가 놓여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책을 건네자, 마치 우동 한 그릇 후루룩 먹어 치우듯 침대에 누워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장을 덮은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 미국 트레킹 가자.”
그 한마디가 집 안 공기를 살짝 흔들었다. 이미 1년쯤 뒤 미국 국립공원을 가 보자고 남편과 ‘언젠가’의 계획을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우선 한국의 국립공원부터 하나씩 걸어보자고, 방 문에 붙여둔 지도를 보며 서로 약속을 나누고 있던 때였다.
걷는 아이가 그려주는 가족의 지도
요즘 같은 때에 걷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산에 가자고 먼저 묻는 아이가 또 있을까. 아이와 함께 처음 큰 산을 오른 건 초등 3학년 때였다. 새벽 다섯 시, 제주 숙소에서 출발해 한라산 백록담을 찍고 내려오니 밖은 이미 깜깜한 밤. 몸은 다 풀려 있었지만, 숙소 근처 흑돼지 집에서 허기를 달래며 먹던 따끈한 고기의 맛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 지도에는, ‘산’이라고 적힌 작은 점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행은 아이의 세계를 뻗어나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를 따라, 남편과 나의 세계도 함께 확장된다. 아이의 관심이 향하는 쪽으로 우리는 함께 더 큰 지도를 그려 나가며 ‘언젠가’가 아니라 ‘어떻게’의 계획을 세운다. 결국 그 계획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를 정해 준다.
푸른 점들로 만든 우리만의 우주
최근에 본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별이 있는 풍경, 1905~1908년경⟫ 작품 앞에서도 나는 아이의 4300킬로미터를 떠올렸다. 화면 위쪽을 가득 채운 건 잎사귀인지 별빛인지 모를 푸른 점과 조각들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흩어진 물감 조각일 뿐인데,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하나의 하늘이 된다.
푸른 조각 하나하나가 마치 우리가 찍어 온 발자국 같다. 아래로 내려오면 짙은 수평선처럼 나무들이 낮게 누워 있다. 그 위로 노란 점들이 총총 박혀 있다. 푸른 하늘과 노란빛이 서로 스며들어 중간에는 부드러운 초록빛이 만들어진다. 섞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색을 지킨 채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방식. 마치 서로 다른 별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모습 같다.
돌아보면 우리의 하루도 그렇다. 그때그때는 특별할 것 없는 조각인 줄 알았던 날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장면이 되어 떠오른다. 푸른 하늘 가장자리마다 박힌 노란 점처럼, 아이와 함께 걸었던 작은 산길, 강연 끝나고 늦은 밤에 먹었던 편의점 과자 ‘무뚝뚝’ 하나까지. 모두가 우리 가족만의 색으로 남는다. 아이의 “나도 하고 싶다”는 한마디도 그 조각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엄마 강연을 따라온 하루, 도서관 열람실을 천천히 걷다가 우연히 집어 든 책,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나서 꺼낸 한 문장. 그 조각이 붙고 또 다른 조각이 붙어 아이는 더 넓은 세상을 ‘막연한 꿈’이 아니라 ‘조금씩 준비해 가는 계획’으로 바꾸고 있다. 우리는 그 곁에서, 오늘 한 페이지를 읽고, 오늘 한 걸음을 더 걷고, 오늘 한 번의 용기를 내도록 작은 등을 떠밀어 줄 뿐이다.
언젠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파란 잎 사이로 노란빛이 끼어들어야 숲이 깊어지듯,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다양한 언어와 길과 풍경을 통과하며 비로소 자기 색을 알아가게 된다고. 한 번뿐인 삶은 ‘안전하게 보관’하기에는 너무 짧고, ‘조금씩 펼쳐 보아야’ 비로소 넓다는 걸 알게 된다고.
4300킬로미터는 멀리 놓인 숫자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찍는 작은 발자국들이 내일 어떤 풍경을 만들어낼지 알려주는, 미리 적어 둔 거리일 뿐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모여든 작은 조각들이 어느 날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한꺼번에 빛나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좋은 일들이 한 움큼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고.
그 길 위를, 아이와 함께 천천히 걸어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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