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도를 따라 걷는 그랜드 투어

#빈센트 반 고

by 김상래
빈센트반고흐.jpg 빈센트 반 고흐/꽃 피는 아몬드 나무 가지가 담긴 컵과 책 (Sprig of Flowering Almond in a Glass with a Book)/1888년 초/캔버스에 유채/


마음의 지도를 따라 걷는 그랜드 투어

오십 줄에 들어서니 선명해지는 풍경들이 있다.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유난히 빛나던 우리 집 파란 대문. 술기운 섞인 아빠의 목소리와 함께 가마솥 통닭 봉투가 마루에 놓이면, 우리 세 자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하고 나하고’를 합창해야 했다. 까칠한 아빠의 턱수염이 볼에 닿는 게 싫어 마지못해 몸을 비틀던 시절, 나는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줄로만 알았다.


사실 객관적인 지표로 보자면 그렇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우리 가족은 전세살이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부모님은 우리가 하고 싶다는 것, 갖고 싶다는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셨다. 부모가 되어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 마법 같은 풍요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자식의 결핍을 사랑으로 먼저 메워주려 했던 부모님의 ‘충만한 마음’이었다.


동양의 고전 ‘중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군자소기위이행, 불원호기외. 소부귀, 행호부귀; 소빈천, 행호빈천.“

(군자는 현재의 처지에 따라 행하고, 그 바깥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부귀한 처지에 있으면 부귀한 대로 행하고, 빈천한 처지에 있으면 빈천한 대로 행한다.)


단순히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밖으로 눈을 돌려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니 겉은 화려하게 치장해도 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을 만난다.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느라 정작 속은 텅 빈 채 허기져 하는 사람들. 반면 가진 것이 소박해도 매 순간 감사함을 찾는 이들은 그 마음의 그릇에 이미 ‘복’이 가득 차 있다. 마음이 단단하게 채워진 사람은 굳이 자신이 부자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좋은 것을 굳이 좋다고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에서 은은한 향기가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청춘 또한 그 ‘자발적 풍요’의 연장선이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넉넉한 형편에 떠난 유학길이 아니었다. 당시 IMF 외환 위기라는 파고까지 겹쳤기도 하고.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모은 돈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타국에서 민박집, 보험회사, 문화협회 등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지런을 떨었다. 동생의 결혼으로 귀국하며 학업을 마저 마치지 못한 ‘결핍’은 오히려 내 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작한 것을 끝내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나를 매일 깨어 있게 했고, ‘없으니까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긍정의 철학을 심어주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세상이 말하는 ‘객관적 부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지표로 따진다면 나는 단연코 거부(巨富)다. 성실한 신랑이 곁에 있고, 사춘기임에도 엄마와 밤새 수다를 떨며 깔깔거리는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있다. 매주 엄마와 동생들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이 일상이 나의 가장 큰 자산이다.


최근 나는 남편이 선물해 준 추억의 만화책을 읽으며 중학생 시절의 설렘을 되찾고, 몇 년간 공들여 쓴 책의 출간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를 준비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큰 비용을 들여 아이와 유럽 미술관을 다니고 여행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밖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아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경험’과 ‘배움’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내 스스로 천만 원을 모았을 때(아이와 유럽여행을 위해 천 만원 모으기가 1년의 목표였다), 좋은 차를 사는 대신 세계 여행을 선택해 가족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풍경을 심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마음 부자로 사는 법’이다.


이번에 출간될 책의 컨셉을 ‘내 방안에서 떠나는 그랜드 투어’로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이 많아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한정된 재화를 어디에 투자해 영혼을 풍요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아이에게 내가 물려줄 것이 무엇인가. 타인의 시선이나 유행하는 물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안의 단단한 뿌리에서 나오는 행복을 만끽할 줄 아는 아이. 결핍을 투정이 아닌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줄 아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

오십의 문턱에서 돌아본 나의 삶은 결국 ‘나만의 그랜드 투어’였다. 화려한 전리품은 없어도, 내 마음의 지도에는 사랑과 감사, 그리고 열정이라는 이름의 별들이 가득 차 있다. 이 충만한 마음을 강의실에서, 그리고 책 속에서 만날 이들에게 아낌없이 풀어놓고 싶다. 진정한 부자란,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그 평범한 진리.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삶이 거창해 보일지 모르나, 내가 선택한 길은 늘 심플했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그저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중용은 이를 ‘군자거이이후명(君子居易以俟命)’이라 했다. ‘군자는 평탄한 곳에 머물며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내게 ‘평탄한 곳’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는 평온한 일상이며, ‘천명을 기다림’이란 그저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한 번에 딱 하나씩 곰처럼 해나가는 성실함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걷다 보면, 나의 그랜드 투어는 매일 새로운 풍경을 내게 선물할 것이라 믿는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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