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의 시간

by 김상래
KakaoTalk_20241121_074022226_01.jpg François Duquesnoy-Ferez/Barque sur la grève/19세기 말–20세기 초/캔버스에 유채

한적한 바닷가에 배 한 척이 기울어진 채로 모래 위에 서 있다. 물은 빠져 있고, 배는 그저 바람과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배를 보다가 문득 내 모습이 겹쳐졌다.

요즘의 나는 저 배처럼 혼자 정박해 있다.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던 때와 달리 지금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있다.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는 시간들. 글을 쓰고 지우고 또 쓰면서 내 안으로 자꾸만 들어가고 있다. 미련할 만큼 한 문장에 매달리다가도 어느 순간 가지가 뻗듯 글이 이어진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끓는 물처럼 열정이 이글거린다.

나는 충분한 내 시간이 있어야 숨이 트이는 사람이다. 약속이 많고 말이 많은 하루는 나를 쉽게 지치게 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대신 조용함 속에서 내 안의 열정이 충분히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린다. 서두르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로. 지금은 그런 상태.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상태.

물론 이 시간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3월이 되면 여러 강의가 시작된다. 강의마다의 주제도 모두 다르다. 강의나 강연 여럿을 정중히 거절했다. 예전 같으면 욕심이 났을지 모르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루 스물네 시간도 모자라 나는 가끔 내가 다섯 명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글을 쓸 때는 오직 글만, 강의를 할 때는 오직 그 일만 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러니 신랑은 늘 날보고 곰이라고.

2월까지는 이 리듬을 깨고 싶지 않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이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바닷가에 정박한 배가 햇빛을 충분히 머금은 뒤에야 다시 물 위로 나아가듯, 나도 지금은 문장 속에서 힘을 모으는 중이다.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문장이 떠오르면 뛰어가 노트북에 몇 줄을 남긴다. 그렇게 글을 이어간다. 그러다 문장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가 있다. 머리가 하얘지고, 방금 쓴 문장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럴 땐 억지로 붙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만화책을 꺼내 앉는다. 종이 냄새를 맡으며 몇 장을 넘기다 보면 오래전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를 읽던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가끔은 두툼한 미술책을 펼쳐 그림을 뒤적인다. 누군가 한때 온 힘을 다해 남겨 둔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다시 쓸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잠시 쉬어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쓰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

그리고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나는 오늘도 다시 한 줄을 쓴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만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쓰고 있는 지금의 내가,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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