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나를 '불곰'이라 부르는 이유

(a.k.a. 집념의 글쓰기)

by 김상래
에바 알머슨(Eva Armisén)

좌:<불(Fuego)>(2021)a veces por fuera fría como el hielo (때로는 겉모습이 얼음처럼 차갑더라도)

우:<능력(Capaz)>(2021) capaz de cualquier cosa para protegerte(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신랑은 나를 두고 늘 ‘곰’이라 부른다. 그것도 ‘불곰’. 왜 하필 여우도 아니고 곰이냐고. 곰은 둔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힘이 세고 빠르단다. 그렇게 어느 날부턴가 나는 ‘곰’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그 일에만 한없이 빠져들어 간다. 주문처럼 말하는 '선택과 몰입'. 그렇게 나는 그에게 어느 별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외계인이었다가 이제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곰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고집 센 불곰 말이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불곰의 실체!

육중한 체구 때문에 느릿해 보이지만 위급하거나 사냥할 때는 시속 50km/h 이상의 속도로 질주할 수 있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속도로 짧은 거리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어깨 부위의 툭 튀어나온 혹(Hump)은 순수한 근육 덩어리다. 땅을 파거나 무거운 바위를 뒤집고 사냥감을 제압할 때 필요한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된다. (내 다리가 좀 그렇다)

불곰은 실제로 후각이 매우 발달했다. 개보다 약 7배 이상 뛰어난 후각을 이용해 수 킬로미터 밖의 먹잇감 냄새를 정확히 감지한다.

불곰은 도구를 사용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지능이 높다. 특히 자신이 먹이를 구했던 장소나 이동 경로를 수년 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는 공간 기억력이 뛰어나다.


에바 알머슨의 그림 속 메시지처럼 불곰은 새끼를 지키려는 모성애가 매우 강하다. 나도 상당히 그런 편이다. 평소에는 온순하다가도 소중한 것을 보호해야 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용맹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나는 불곰이 맞았다! 신랑 말이 맞았다!


오랜 시간 곰처럼 앉아서 원고를 써 내려갔다. 1 교지와 2교지를 꼼꼼하게 확인하고서야 이제 곧 출간이다. 글쓰기와 책 쓰기는다른 영역이다. 글쓰기는 그저 마음껏 즐겁게 쓸 수 있다. 책쓰기는 효율로만 치면 사실 이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 사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쓰다 보니 내가 이토록 방대한 양의 원고를 쓰게 될 줄도 몰랐다. 게다가 이미 썼던 글을 계속해서 줄이고 청소년용으로 바꾸는 과정은 또 다른 고비였다. 어려운 용어를 최대한 덜어내고 미술사 지식 역시 참고문헌을 찾아 정확하게, 그러면서 쉽게 읽히도록 고치는 단계가 절대 쉽지 않았다. 이건 논문도 아니고 내 개인적인 서사가 개입되어서도 안 되는 책이다 보니,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일이 태반이었다.


책을 쓰는 일은 인생과 참 닮았다. 나이가 들수록 비우고 덜어내는 미니멀의 과정처럼, 책 쓰기 역시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심플하면서도 깊이는 있게 다듬고 다듬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흔히들 책을 내면 넉넉한 인세 수입과 명성이 따를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 책을 쓰겠거니. 그게 아니라면 왜 그런 육체적 소모를 자처하느냐고 말이다. 자원봉사 도슨트의 수입이 제로인 것처럼 작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운이 좋아 1쇄가 다 팔리면 책값의 10%를 세금 떼고 인세로 받게 되는데 100만 원 남짓. 그것조차 운이 아주 좋아야 가능한 일. 고로 대부분의 작가는 책이 세상에 나온다는 그 자체에 의의를 둔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묻는다. 왜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 책을 쓰느냐고. 그러니까 말이다! 나도 그게 의문이긴 하다. 대체 왜 책을 쓴다고 했을까! 왜 쉬지도 못하고 몇 달이고 종일 앉아 활동량 부족으로 살은 찌우고 있는 걸까. 뻐근한 허리와 골반을 손으로 두드려 가며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모니터 앞에 앉아, 가뜩이나 노안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들을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


아마도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 같다. 부동산 투자가 재미있거나 TV 속 예능 프로그램이 즐거우면 참 좋을 텐데 나는 또 그렇지 못하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다르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억지로 세상의 속도에 맞춰야 할까? 물론 어느 정도는 그 속도를 인지하고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걸 안다. 마치 캐리비안 베이에서 튜브에 들어가 유영하듯 물살에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것처럼.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전개가 빠르고 화면이 화려한 것보다 장면과 장면 사이 충분한 여백이 있어야 숨 쉴 틈이 생긴다. 책이든 영상이든 내 속도로 충분히 생각하며 볼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아마도 기억력이 그리 좋지 못하고 세상의 속도보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내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조금 느린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느린 사람에게 글쓰기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싶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계속해서 어떤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것들을 글로 써서 덜어내야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다.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엔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이렇게 많은 양에 겁도 없이 손을 댔네” 하며 자책하다가도 나의 기록을 통해 내가 살아온 궤적을 확인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내 삶에서 조그만 희망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삶의 의미는 바로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책은 내가 도슨트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을 때(2023년 8월?) 계약된 책이다. 밤새 스크립트를 쓰곤 아이에게 동화책처럼 읽어주던 것이 책으로 연결된 셈이다. 사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라틴어가 듬뿍 들어간 전문적인 지식이 더 필요했겠지만(아이가 라틴어를 흥미 있어 한다.) 언제라도 쉽게 꺼내 읽으며 기본 상식 정도를 알 수 있는 책이길 바랐다. 때마침 아이가 미술 사조를 선택해 화가 한 명을 비평해야 하는 수행평가 과제를 받아 들고 왔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를 비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코로나 때 아이와 함께 집에서 교과서 미술 놀이로 시간을 보내던 기억들도 스쳐 지나갔다.


그런 모든 기억이 이 책을 쓰게 만든 동력이었다. 우리 아이처럼 청소년 아이들에게 많이 읽혀서 수행평가에도 도움이 되고 훗날 가족들과 미술관 여행을 가게 된다면 왜 다리 아프게 종일 미술관을 서성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찾는 데 보탬이 된다면 참 좋겠다.


우리가 여전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이의 작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글로 기록해 온 시간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아이는 종종 내가 쓴 글을 읽는다. 읽었다고 직접 티를 내진 않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내 글을 읽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도슨트가 된 이유. 이 책을 쓴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 아이가 좋아해서다.

아이는 금방 큰다. 아이가 클수록 내 시간은 과거와 다르게 더 빠르게 흐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비례 법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열네 살 아이에게 1년은 자기 인생의 약 7.1%를 차지하지만 50세 성인에게 1년은 인생의 2%에 불과하기에 심리적으로 훨씬 짧게 느껴진다. 또한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수록 뇌가 기억을 뭉뚱그려 처리하면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느낀다.


아이와 같은 속도로 자랄 순 없지만 노력하면 대화를 놓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순 있지 않을까. 아이가 커버렸을 때 내게 아이를 키우던 날들이 그저 텅 빈 여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 했던 풍부한 이야기들로 노년의 시간을 가꾸어 가고 싶다. 능소화 핀 한옥 마당에서 책을 쓰던 날들을 떠 올리고 함께 나눈 대화들을 회상하며 내 손때 묻은 책들을 하나둘 펼쳐보는 노년을 꿈꾼다.


셈에 빠르지 못한 편이라 부동산이나 주식에는 영 관심이 없다. 어느 날 삶을 뒤돌아봤을 때 “돈만 좇다가 이렇게 늙었네. 뭘 얻은 걸까?”라는 허망한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기에도 짧다. 그러니 가정의 가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세상에 조금씩이라도 보탬이 되며 살고 싶다.


덧. 불곰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린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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