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있는 기업의 특강을 거절한 이유

서두르지 않는 계절

by 김상래


앙리 팡탱 라투르 (Henri Fantin-Latour, 1836–1904)/ 꽃과 찻잔 (Flowers and Cup of Tea)1865년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피츠윌리엄 박물관 (The Fitzwilliam Museum), 케임브리지 대학



앙리 팡탱 라투르의 그림 속 꽃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튤립과 아네모네, 들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풍요로우면서도 정갈해 보인다. 요즘 부쩍 주변에서 꽃망울이 틔었다는 사진들을 보내온다. 내게 봄은 아직 이른 듯 느껴지지만. 마음의 계절이 세상의 속도를 앞지를 필요는 없겠지.

올해 초반에 다짐한 바가 있다. 강연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 에너지를 나누기로 한 것. 본의 아니게 작년 후반부터 여러 강연 의뢰를 거절했다. 하루 세 개씩 이어지는 특강은 체력적으로 무리이다. 먼 거리를 이동하며 연달아 말을 뱉고 나면 목이 아플테니까. 현실적인 예우가 아쉬운 순간들도 있었다. 이름 있는 기업의 중책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이라면서 업체명도, 확정인지도 알려줄 수 없다는 의뢰를 받았을 때였다. 심지어 내가 안 된다면 낮은 예산으로 대신 강사를 추천해 줄 수 있느냐고. 준비 과정을 가볍게 여기는 제안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온전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자리를 신중히 선택하려 한다. 그것이 나를 기다린 분들에 대한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 선을 가볍게 여기면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 그럴 때면 스스로를 다독인다.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려나 보다’ 하고. 모든 일을 보상의 크기로만 재지는 않지만, 작가가 쏟은 시간과 마음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제안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고마운 인연들과는 언제든 새로운 예술적 작당을 꿈꾸고 있다. 기꺼이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내게는 소중한 가정이 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는 모토는 내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청춘처럼 앞만 보고 달릴 수는 없다. 가정을 돌보며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일 모두 그 균형 위에서 이루어진다. 진행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것엔 그런 차이가 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결의 차이다.

원고에 집중하다 보면 강연을 고사할 때도 있고, 체력이 고갈되는 저녁 시간 강연은 되도록 오전으로 바꾼다. 저녁에는 되도록 아이와 함께 있으려고.(이 시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슬프다) 물론 각자의 방에서 서로의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 간식이라도 챙겨줘야 할 나이기에 엄마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앙리 팡탱 라투르의 그림을 다시 본다. 그가 그린 꽃들은 화려함 이면에 차분한 질서를 품고 있다. 화면 상단에 솟은 붉은 무늬의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귀하게 대접받던 변이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 곁을 다정하게 채운 것은 자줏빛과 흰색이 선명한 시네라리아, 그리고 노란 금잔화와 장미들. 시네라리아의 꽃말은 '항상 즐거움', '마음의 평온'이다. 유리병 안에서 저마다의 모양과 색으로 어우러진 꽃들을 보며 생각한다. 튼튼한 씨앗만 있다면 꽃은 언제든 피어날 거라고. 일찍 피었다고 우쭐할 것도, 늦게 핀다고 서운해할 일도 아니다. 인생에는 저마다 꽃피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최근 연구센터를 오픈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밀린 설거지와 빨래를 마친 뒤 이곳으로 출근한다. 아직 짐을 다 옮기지 못해 어수선한 공간이지만, 한편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메일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명상 음악을 틀어두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이 고요함이 내게는 진정한 봄날의 행복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센터 주변의 잔디와 나무들이 초록색 옷을 입고 완연한 봄을 알리겠지. 나는 이곳에서 묵묵히 글을 쓰며 내 일을 할 예정이다. 3월보다 따뜻한 4월을 기다리며, 아이와 함께 우직하게 성장하는 나날을 기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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