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이방인

당신의 노래를 불러라.

by 김상래

어딘가에 소속이 되면 자연스레 생기게 되는 타이틀에 관한 생각.

세 자매 중 부모님의 첫 딸로 태어났다.

초, 중, 고, 대를 거치며 무슨 무슨 학교라는 타이틀이 내 앞에 붙고 나는 뒷전이다.

졸업 후 바로 취업해야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니 어느 회사 소속으로, 나라는 이름 앞에 나를 꾸며주는 수식어가 붙는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내 이름 뒤에도 꾸며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유학을 다녀오면 '유학파'라는 타이틀,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 '대표'라는 타이틀이 이름 앞에 붙게 되면서 자연스레 어깨도 으쓱 올라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가운데 끼인 채 세상을 살았다.

사람은 소속감이 없어질 때 우울감이 찾아온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실제로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인생의 몇 년을 살았다.

불안한 영혼을 어딘가에 가둬두고 마치 내가 그곳에서는 꼭 쓸모 있는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게 되는 일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자발적 이방인’

내가 바라는 나의 형태는 바로 그것인데 타인에 의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고독하기를 선택한 것.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

억지로 입혀지는 옷 말고 날것의 나, 원래의 나로 살기를 소망했다.

내 앞에 타이틀이 꼭 붙어야 한다면, 예를 들어 그림 설명하는 까뮤, 그림 그리는 까뮤, 글 쓰는 까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까뮤. 뭐 이런 식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남자들은 힘들 때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여자들도 그 동굴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 사실 누구나 그런 공간 속의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는 피난처, 안식처를 의미한다. 원래는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쉬는 곳을 뜻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 휴식처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나의 경우는 아이가 커서 시골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꼭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 물론 신랑에게도 서재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

지금의 경우는 거실 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을 나만의 작업실처럼 쓰고 있고, 이곳은 우리 가족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자발적 이방인으로 타이틀 없이 나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 가장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문제를 40과 50의 딱 가운데 지점에 멈춰, 점을 찍으며 생각하고 있다.


당신의 별을 보고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의 노래를 불러라.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고
어떤 경우에도 담담하게

-이하준

산만하게 시선들이 분산되는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 모두 자고 있는 새벽시간에 깨, 고동치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나의 의지. 결국은 담대하고 담담하게 나를 찾는 일을 나는 거르지 않고 하고 있는 이 시간이 행복하고 즐겁다.


나의 마음을 챙기고 존경하고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다른 사람도 껴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나로 서야 남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