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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Jul 30. 2021

도슨트(전시 해설사), 희망, 그리고 꿈

아이 덕분에 도슨트가 되었다.

아침에 블로그 알람이 떴다. 지난주 금요일까지였던 꼭 필요한 이벤트 신청을 놓쳤다.

아이들 키우고 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지금은 3권의 미술 관련 책을 내시고 인문학 강연을 다니시는 분이 계신다. 바쁜 일상의 주인공인 그분의 블로그를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아뿔싸! 그런데 요 며칠 복잡하지도 않은 일상이 아이 개학을 맞으며 잠시 분주했던 터라 이벤트를 놓쳤다. 내 하루 패턴은 저녁 9시, 아이와 잠들어 새벽 4시쯤 기상이 보통인데 늦은 시간 올라오는 글들을 놓칠 때가 있다. 그래서 주로 새벽 글을 올리시는 분들과 인사를 오가는가 싶기도 하다.


늦게 시작하는 인생 2막의 멘토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기웃해본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느지막이 시작해 기분 좋게 가고 계신 분들이 몇 계신다. 그분들의 글을 살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같은 꿈으로 물들여 보곤 한다. 이렇게 기회는 생각지도 못하게 왔다가 또 제멋대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 왠지 그분의 기운을 직접 전달받고 싶었던 까닭에 기다렸던 이벤트였는데 아쉽게 됐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니 서점을 찾아야겠다.(내 마음을 아셨는지 며칠 후 책을 따로 보내주셨다._'루이 비뱅, 화가가 된 파리의 우체부'의 화줌마님)


<나의 서평을 실어 주셨다>



희망.

2017년, 아이가 7살 때던가.


"엄마~~~ 나 ‘훈데르트바서’ 전시 가보고 싶어. 예술의 전당에서 한 대. "

"그래? 그게 누군데? "

"색채의 마법사래. 오스트리아 색채의 마법사. "

"그래, 엄마가 찾아볼게. "


방에서 TV 광고를 보던 아이가 거실에 있는 나에게 무슨 일이 난 것 마냥 던지던 대사였다. 찾아보니 훈데르트바서는 클림트, 에곤 쉴레와 함께 오스트리아 3대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스페인에 '가우디'가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훈데르트바서'가 있다고 할 만큼 유명하고, 작가이기 전에 굉장히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블로그에 '훈데르트바서'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티켓을 예매해두고 아이와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형형색색의 찬란함과 그가 품었던 자연에의 사랑이 전시장에 잔잔하게 깔렸다. '타닥타닥' 빗소리와 굉장히 잘 어우러진 전시였다. 아이는 늘 그렇듯 전시장을 찾으면 준비해 간 필기도구를 꺼내고 노트에 그때의 느낌들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아이가 그리고 쓰는 어떤 행위에도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뛰지 않는 예절과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기본 정도만 가르쳤고 외출할 땐 꼭 필기도구나 색연필, 사인펜 등을 챙기는 걸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습관이 든 아이는 전시 관람이 어색하지 않은 아이가 되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더 자유롭게 마음껏 끄적일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나면 작지만 기념이 될 만한 굿즈나 만들기를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 오곤 했다. 전시를 보고 도록을 사 오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나는 그날 ‘훈데르트바서’ 도록을 구매했다. 내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는지 그땐 몰랐다.


프랑스에는 박물관이 많다.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아트 패스’(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라고 해서 미술관, 박물관 등을 무료로 들어가게 해주는 카드인데 현재 우리나라에도 ‘예술인 카드’라고 해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증빙하면 비슷한 카드를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엔 나이가 지긋하신 도슨트(전시 해설사) 분들이 있었다. 루브르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 그 복잡한 곳에서 만났던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도슨트 분이 굉장히 매력 있게 다가왔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데 내게만 특별하게 보이는 딱 그 순간. 슬로모션으로 보이는 순간.



'나도 멋있게 나이 들고 싶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는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을 마음에 두고는 있었지만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 없었다. 아이가 초등 2학년이 되고서야 아이 말고 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 도슨트로 지원하게 되었다. 최소한의 동선에서 나도 아이도, 누구 하나 피해 없이 시작하고 싶었기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수원시립미술관을 선택했다. 도슨트 선발 과정에서 내가 선택한 작품은 아이가 좋아하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두 점이었다. 도슨트로의 지원동기, 전시장을 찾았던 때를 떠올리며 스크립트를 작성해 읽고 녹음하고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어려운 부분을 물어 쉽게 고쳐 다시 읽고 녹음했다. 예전엔 중학교 2학년 눈높이에 맞추면 됐었지만, 요즘은 초2만 돼도 수준이 생각보다 높다. 나는 우리 아이의 수준에 맞는 단어들을 선택해 스크립트를 작성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작품 설명을 했다. 운 좋게 합격했다.


백영수 선생님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그림들


2019년 양성과정을 거치고 선발 시험에 합격했다. 2020년부터 도슨트로 한 발 딛게 되는 계획이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나의 첫 번째 도슨트는 우리나라 신 사실파(김환기·유영국·장욱진·백영수·이중섭)의 한 분이셨던 백영수 선생님 전시였다. 이분은 수원 출생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셨기에 한국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분이셨다. 이 전시는 열심히 공부하고 스크립트만 짜 본 채로 도슨트 오픈이 되지 않았다. 두 번째 전시는 ‘내 나니 여자라’라 전시였는데 코로나가 잠시 괜찮아진 틈을 타 딱 한 번 전시장에 섰었다. 가장 첫 번째 관문을 웅장하게 채우고 있던 작품의 주인공이셨던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을 작가로 만나보는 영광을 가졌던 전시이기도 했다. 쓰다 보니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 수원시립미술관에서 함께 운영하는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도슨트로의 첫 길을 뺐다. 국·공립 미술관, 박물관의 도슨트 활동이 전면 중단이 되면서 오히려 광교 전시관 쪽에서 도슨트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직접 기록한 '내 나니 여자라' 전>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전으로 세계의 재미있는 작가들 작품을 만났다. 자료가 미미한 작가들의 히스토리를 구글링 하며 흥미로운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로 관람객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설명하는 작품에 끄덕끄덕 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질문을 하던 분들,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땐 PPT 발표도 해봤고 프리랜서를 할 때의 언변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작아진 나 자신을 사람들 앞에 세우는 게 쉽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는 아트스페이스 광교의 새로운 전시 오픈으로 도슨트 활동에 앞서 교육이 있고 스크립트 작성을 해야 한다. 내용 숙지의 시간이 마련되겠지만,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게 아직도 두렵고 떨리고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50대를 전후해 책을 쓰고 강연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군중 앞에 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만한 경험들을 쌓아야 하는 게 시급하다. 코로나로 인해 그게 어렵게 됐다. 무조건 많이 서고 많이 말해봐야 두려움도 멀리멀리 도망칠 텐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남은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고 특별히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하고 무어든 쓰고 있다. 지금 걷는 이 길이 머지않아 내 길이 될 것을 꿈꾸며...


<직접 기록한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전>



도슨트, 내 책, 강연, 아뜰리에, 2024

다이어리든 카톡 메인이든 이렇게 적혀있다. 글 쓰는 작가로의 길에 들어섰을 때 다시 그림을 그릴 거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나는 아티스트로 살아갈 날을 꿈꾼다. 적다 보니 나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싶다.


축구 선수 '박지성'은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다"


그래서,

"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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