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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01. 2021

두고 온 것은 청춘의 소리

2002년 낭시 프랑스 Nancy France

2002년 2월 1일.

뼈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의 Nancy 작은 스튜디오.

절벽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봉쥬르(bonjour) 한마디를 익히고 떠나온 곳.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 6일 밤낮 없는 근무로 만신창이 돼가고 있는 몸과 그로 인해 피폐해지는 정신.

그만두지 않고는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던 찰나.

(그만두지 않고 다녔으면 용산역 고려빌딩 디자인 부서 한자리는 내 담당이 되었을까?)


쉼이 필요했다.


3단 이민 가방을 짐칸으로 보내고도 온갖 최신 내장을 장착한 컴퓨터 본체와 트라이포드, 캠코더를 한 짐 짊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들의 배웅. 뒤 돌아본 순간, 그들의 울음에도 나는 무감각했다.

처절하게 아무도 없이 조용하게 혼자이고 싶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시끄러운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가 무음인 곳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었던 시간들.


낭시. 내가 다니던 대학 부설 어학원/쁘낙

'낭시'엔 6개월가량 머물렀다.

한국에서 12시간을 '에어프랑스'를 타고 도착한 파리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2시간 반을 걸려 도착한 교육의 도시라는 '낭시'는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요양을 원하는 사람들이나 나처럼 묵언수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바로 그곳.


낭시 2 대학과 쁘낙.

낭시 2 대학에서 어학을 하며 다양한 나라의 어린 친구들과 한 반에서 수업을 했다.

2002년 강남역 6번 출구 앞엔 모든 이들이 만나는 장소인 '타워 레코드'가 있었던 것처럼

집 앞에서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오면 내가 즐겨 가던 곳인 쁘낙(fnac)이 '타워 레코드'인양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르게 내뱉는 프랑스어에 기가 죽어 있던 프랑스 초기.

음악을 듣고 책장을 넘기며 말 한마디 할 자신감 없이 그저 한참을 그곳에서 구경하다 돌아오는 길엔 주머니에 꼬깃하게 넣어두었던 보물지도를 들고 트램이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곳에서,

"demi baguette, s'il vous plaît(드미 바게트, 씰부쁠레: 바게트 절반만 주세요)" 하면,

혼자 먹기엔 너무 큰 바게트 빵을 절반만 잘라서 종이에 포장해 주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뜯어먹던 겉바속촉 바게트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이 기억을 소환해 내는 일.

당시 교정기를 착용한 채로 프랑스행이었기 때문에 내 치아 위엔 철사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낭시 시내에 용하다는 치과를 찾아 교정치료를 받기 위해 갔다. 프랑스어로 소통이 어려우니 영어까지 섞어가며 불라불라 외쳐댔지만 채 끝나지도 않은 교정기를 아무런 제거액 없이 떼어냈다.

한국에선 분명 더 치료를 해야 하니까 프랑스 가서도 치료 잘 받으라던 치과 의사 선생님의 조언도 있었건만 프랑스에선 이 정도면 끝난 거라고 허락도 없이 마구마구 철사들을 걷어냈다.

눈물이 흐를 만큼 아팠던 시간, 억울함을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교정기가 사라져 버렸다.


애써 빵빵하게 불어넣었던 풍선 속 바람이 한순간에 '빵'하고 터지는 허. 탈. 함. 

허공 중에 무게 없이 날아가고 있는 종이 인형 같은 존재의 가벼움.

바네사 파라디

그땐 몰랐다.

프랑스는 개성의 나라.

단점이 장점이 되는 나라.

바네사 파라디가 사랑받는 나라였던 것이다.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울어봐야 소용없고 뭉툭하고 어리바리한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를 탓할 밖에, 교정기는 자취를 감췄고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실연한 여자처럼 꺼이꺼이~ 울며 시내를 거쳐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울고 있는 '광년이' 그 자체였다.


그 시절 한국에서 내 별명. 광년이

갑자기 나를 보내며 울고 있던 가족들이 보고 싶어 졌다.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아는 이 없이 어찌 지내려냐고 만류하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곤조곤 항상 내 편 들어주며 같이 수다 떨던 엄마의 편안하고 따뜻한 품이 그리워졌다.

나 보다 키 큰 여동생들 바지 입고 나갔다가 키작녀의 잇템인 하이힐 뒷 굽에 늘 구멍 난 바지를 만들어 오던 나를 그래도 언니라고 불러주던 착한 동생들이 생각났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지도를 펼쳤다. 지도만 봐도 한국과 프랑스는 왜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 붙어 있는 건지 마음먹으면 바로 돌아갈 거리가 아니었다.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세계지도

부잣집 딸처럼 등 떠밀려 온 유학이 아니었다. 북적거리는 집에서 혼자 있을 시간이라곤 없던 환경, 잠만 자고 일어나 씻고 다시 출근하던 그 길이 눈물방울에 맺혔다.


"광년아, 정신 차리자. 네가 온 거야."

후다닥 뛰어가 한국에서 챙겨 온 프랑스어 책들을 꺼내 병원 관련 용어들과 법적인 사항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휴지로 코 풀어 가며 노트에 눈물 뚝뚝 찍어 가며 한 통의 편지를 날을 새고 완성했다.

최신식 사양을 탑재한 무시무시한 크기의 본체를 한국에서 들고 왔건만 한국이 인터넷 강국으로 위상을 펼쳐가고 있을 당시 선진국 프랑스는 "삐삐~익 끼익"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인 추억의 통신장비를 쓰고 있었다.


첫 번째는 전화, 두 번째는 무조건 편지.

어쩌면 첫 번째가 편지, 두 번째가 전화인 나라.

전화는 미천한 내 프랑스어 실력으론 따질 엄두가 안 나고 편지로 미주알고주알 '법적 책임을 물을 테니 각오해라'

'다 죽어쓰~지져쓰~'

우체국을 들러 당당하게 편지를 투척하고 돌아오던 길은 기분 좋게 빵집에 들러 '드미 바게트'를 사서 한 입 베어 물고는 원래의 웃는 광년이가 되었다.


스물여섯 먹도록 나란 인간이 그랬다.

치매 할망구. 광년이.


독립운동가 마냥 그렇게 편지 한 통 달랑 우체국에 폭탄처럼 투척하고는 앞니에 부착했던 내 미모를 방해하던 교정기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해방감마저 느끼며 룰루랄라~해맑게 학교를, 낭시 거리를 활보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다.


낭시의 스타니슬라스광장

스타니슬라스 광장 Place Stanislas

광년이의 어학수업이 끝나고 시내에 유명하다는 금빛 광장 '스타니슬라스 광장'에도 들렀다.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맛도 모르면서 시킨 탕약 같은 에스프레소.

카페인에 취약한 바운스 바운스 심장을 가지고 집으로의 남은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2002년 2월의 '스타니슬라스 광장'은 너무나도 추웠고 같은 해, 월드컵이 한창이던 5~6월을 지나 여름까지 그곳을 몇 번 더 찾았다.


낭시는 왕국 없는 왕 스타니슬라스 레스친스키(Stanislas Leszczynski, 나중에 로렌 공작이 됨)의 임시 거주지였고 이곳은 계몽 군주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지은 근대도시의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사례라고 한다.
낭시는 1752년~1756년 사이에 건축가 에마뉘엘 에레(Emmanuel Héré)가 지휘한 건축 전문가들에 의해 건설하였다. 이 도시 계획 프로젝트는 왕권 강화와 함께 도시의 기능성에도 역점을 둔 수도였다. 


낭시에서 내가 지내던 스튜디오. 용케도 주소가 가물거려 구글을 돌려보니 기억이 난다.

작은 정원이 딸려 있는 낡은 6층 정도 건물에 4층에 살았던 것 같은데 새 건물로 바뀌었나 보다.


32 Rue Emile Zola, 54500 Vandœuvre-lès-Nancy, 프랑스


5시 반이면 문을 닫는 상점이 많았고 집 앞 모노프리(MONOPRIX. 우리나라 이마트?) 역시 예외는 없었다. 2002년 낭시 시내엔 ZARA와 H&M이 대 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싸고 짧게, 그리고 강렬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과 신발들이 있었기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유학생활 주로 그곳을 이용했다.


2002년의 낭시는 'Coup de Mond 월드컵'으로 한국이 급부상하는 시기였고 작은 브라운관이 귀여웠던 'Tomson tv'에선 연일 '빡지 성, 리용표, 솔기횬,샤두리,가 쉰 목소리의 앵커를 통해 뱉어졌다.

거리를 걷다가 만난 터키 친구들이 형제의 나라라며 기분 좋게 한국을 치켜세우던 때였다.

한국이 '월드컵'으로 난리법석인 그때 나는 도망 온 낭시에서 아주 조용하게, 튀겨낸 감자와 1664 맥주를 마시며 그저 방청객으로 그 시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월드컵'에 열광해 '싸이월드'를 응원과 술자리 사진들로 도배할 때 나는 근처 무덤가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싸이월드'투멤의 시절은 사진첩 왕중왕 전에서 우승을 하며 무덤 사진을 빛내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파워 블로거'들에게도 여러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VIP 티켓들이 제공되는 것처럼 한국으로 귀국한 후, '싸이월드'에서 여러 공연 티켓들을 무상으로 보내주곤 했다. 어쩌면 내가 프랑스에 있던 시기에도 그런 혜택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가족들이 전혀 언급이 없었으므로).

모든 게 당연하게 생각되던 스물여섯~스물아홉 꽃다운 청춘인 시기엔 내가 마냥 잘난 줄로만 알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잘난 스물여섯~스물아홉.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참고 견디는 시간, 인내와 끈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던 시간.

모든 주변의 소리들을 한국에 두고 그저 나만 홀로 떠나왔던 시간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리운 2002년 청춘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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