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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Nov 16. 2021

우리와 꼭 닮은 그곳, 오키나와

구스타프 클림트/캄머성 공원의 산책로 

구스타프 클림트/캄머성 공원의 산책로 Avenue in Schloss Kammer Park/1912

영화 ‘안경’

진정한 자아를 찾아 휴대폰 없이 낯선 마을로 인생길을 돌린 ‘타에코 교수’

아무것도 아니기로 마음먹고 떠난 여행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

메르시(Merci: 프랑스어로 ‘감사’) 체조.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만든 팥빙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독특한 계산법의 빙수 가게.

읽지도 않을 책은 여행길에 짐만 되고.

가장 정확한 지도.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2분 정도 더 참고 가면 거기서 오른쪽.

대사가 별로 없거나 카메라 움직임이 정적인 영화들을 즐겁게 보는 편이다. 전달되는 감정이 더 크다고 할까? 자우림의 김윤아를 닮은 ‘고바야시 사토미’의 매력과 모타이 마사코의 독특하게 마력 깊은 캐릭터를 따라가면, 카모메 식당, 수영장, 도쿄 오아시스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 깨알 같은 유머와 심리치유적 효과를 주는 영화를 주로 만든다.

최초 오키나와 여행은 날이 추워질 때면 여행에 불쏘시개 역할을 해주는 영화 ‘안경’으로 시작됐다. 내용 못지않게 엔딩 곡 마저, 슴슴한 내 취향을 그대로 닮은 영화 덕분에 세 번이나 찾았던 곳. 잘 정비되지 않은 나하 공항의 첫 느낌은 시골 동네를 마실 온 느낌이었다. 유한이가 만으로 두 살. 한국 나이로 세 살이던 겨울의 끝자락, 봄이 꽃을 피우기 전의 일이다. 가까운 거리 대비 항공료가 꽤 비쌌던 2013년도. 비행거리가 2시간으로 비교적 짧았고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선택한 우리만의 비밀기지 같은 곳. 동양이면서 이국적 정취를 품은 곳. 눈부신 바다를 가진 따뜻한 남쪽 섬. 괌이나 사이판을 찾는 사람이 많던 시절. 넘치는 활기참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그곳은 작은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시간을 선물하는, 우리와 닮은 여행지였다.

자색 고구마 파이. 우리나라의 해태와 비슷하고 마블리 마동석이 생각나는, 유쾌하게 생긴 시사. 그중 입을 다문 시사는 액운을 막고 들어온 복을 지키는 용도로, 입을 크게 한 시사는 복을 받아들이는 역할이라고 한다. 다니는 곳마다 시사의 느낌이 달라, 여지없이 기념품으로는 시사를 샀다. 우리나라의 해태상도 대중화시켜서 BTS가 홍보해 준다면 시사 부럽지 않을 텐데 제대로 상품화되지 못한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의 전통이 남아있다. 식탐이 별로 없는 가족에겐 이곳 음식이 참 단순하고 소박해서 좋다. 푸짐한 숙주와 삶은 돼지고기가 얹어진 특별할 것 없는 소바 한 그릇. 영화를 곱씹듯 낡은 식당 한쪽에서 음미하는 미니멀한 맛이란…. 그렇게 소바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날이 잔뜩 흐린 날, 해가 쨍한 날 상관없이 산책하러 갔다. 그럴 때면 난 재래시장에서 산 알록달록 염색된 나풀거리는 시원한 휴양지 셔츠를 입고, 꼭 맞는 사이즈가 없어 헐거덕 거리면서도 꼭 발가락 샌들만은 사서 신고 다녔다. 이건 일종의 내 자유성의 상징이자 작은 사치다. 날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나는 발가락 샌들을 포기할 수 없다.

‘비세 마을 후쿠기 가로수길’은 특별한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사람에게 숲 속의 비밀 문 뒤의 세상을 보여준다.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 문을 연 것처럼. 드넓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물로 숨겨둔 산책길은 아빠 신발처럼 헐거운 신발을 신고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너의 행복을 가장 잘 판단하는 사람은 너 자신인 거야.”

제인 오스틴이 말하던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아날로그적 감성을 한껏 품은 '슬로 라이프'의 섬. 북적일 일이 없던 오키나와. 별생각 없이 어슬렁거려도 괜찮은 곳. 특히나,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가 있는 곳이라 측은지심이 작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유일 지상전이 있었던 곳. 3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주민 9만 4천여 명이 사망했고 27년간 미군에 의해 군정 통치를 받기도 했다. ‘아메리칸 빌리지’에 가면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곳에선 밤에 불 쇼를 보고 대관람차를 타기도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밤의 아메리칸 빌리지를 고공 창밖으로 내다보는 일 따위가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고 대관람차가 땅으로 가까워지길 바라면서 듣는 신랑의 웃음소리란. 세 번의 여행 중 대관람차를 탄 건 첫 여행뿐이었다. 신랑은 이따금 유한이게 그때의 나를 설명한다.

“유한아, 엄마가 대관람차 탔을 때 얼마나 무서워한 줄 알아? 고개도 못 들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웃겨 죽겠어. 사진이 어디에 있더라?”

“그만 좀 하지?”

그때는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프로젝트 한 달 수입이 오백쯤 됐다. 여럿 겹쳐 있던 때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도 한때 잘 나가는 웹디자이너였다고!) 신혼집으로 방이 두 개 딸린 오피스텔에 전세를 살고 있을 때라 돈을 버는 족족 여행을 다녔다. (내 집을 마련하는 건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지던 시절) 그것도 1년에 한두 번씩 꼭 해외여행으로 말이다. 국내 여행도 물론 자주 다녔다. 젊을 때 남는 건 여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빚지고 사는 일이 세상 날벼락을 맞는 일쯤으로 여기며 사시던 부모님 덕에 성인이 되는 동안 우리 집엔 그 흔한 자가용이 없었다. 내가 면허를 따며 우리 집에 첫차가 생겼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울퉁불퉁한 도로 따윈 아랑곳없이 다니는 버스를 타고 자주 여행을 다녔다. 그땐 차만 타면 멀미가 심해 여행이란 게 도무지 귀찮기만 했던 시절이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을 우리 세 자매가 그대로 물려받았더라. 사람들은 이걸 ‘역마살’이라 부른다.

세 자매를 할머니께 맡기고 두 분이 여행을 다니셨던 얘기를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때때로 방학을 맞아 막내 고모네 가는 일 말고는 우리 곁엔 늘 부모님이 계셨다고 생각했으니까. 삼겹살을 구우며 술 한잔 같이할 수 있는 때가 되어서야 아빠가 그런 얘길 하더라. 생각해보면 일에 치이고 자식에 치여 두 분만이 오붓하게 시간을 즐길 여유가 그때 아니면 언제였을까 싶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보니, 그 힘든 시절을 슬기롭게 사신 부모님이 존경스럽다. 지금도 부모님은 ‘홍도’ 여행 중에 계시다. 캠핑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부럽다.

봄이 오기 전에 한번, 날이 추워지고 두 번 더 찾았던 곳.

거실로 들어오는 빛은 따사로운데 역시나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

갈 수 없어 다시 '안경'을 틀었다.

갈 수 없어 보고 있는데 더 가고 싶어졌다.

오늘은 대략 망.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클림트의 화려한 그림 외에 풍경화를 기반으로 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클림트는 1897년 무렵부터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캄머성 공원의 산책로'는 '오키나와'의 '비세 마을 후쿠기 가로수길'을 떠올립니다. 물론 더 깊고 푸른 저 끝엔 바다가 보이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요. 클림트의 풍경화가 아무리 자연 속에 있다고 해도 그 관능미는 어딜 안 갑니다. 실제 오키나와의 가로수길은 관능미와는 거리가 멀어요. 고갱의 타이티처럼 원시적인 느낌이랄까요.

우리 가족의 휴가처럼 클림트도 쉬러 갔던 곳에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그의 주 수입원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그의 후기 풍경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관능적인 그만의 독특한 표현방법과 현실적인 모습을 묘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행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떠나고 싶어 지니 이건 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아아~그리운 오키나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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