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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Nov 15. 2021

서른아홉의 여름

Sally Swatland(샐리 스왓랜드)/Early Afternoon

Sally Swatland(샐리 스왓랜드)/Early Afternoon at Todd's Point

“대상포진입니다. 많이 아팠을 텐데. 수포는 없는데 신경을 타고 와서 병원에 입원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아, 저 지금 되게 바쁜 시긴데요. 이번 달에 끝내야 할 프로젝트가 있어서 입원은 안 될 것 같아요.”

“이게 신경 타고 오면 죽을 수도 있어요. 상태도 안 좋아 보이는데 회사에 얘길 하고 입원하도록 해요.”

“제가 지금 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해서요. 그냥 약 처방만 해주세요. 입원은 힘들어요.”

“약을 먹으면 졸리거나 어지러울 수 있어요. 독한 약이에요. 그만큼 지금 많이 아픈 거고요.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처방하지만, 중간에라도 심해지면 바로 입원해요.”

“네.”

서른아홉의 여름. 나는 많이 아팠다. 왼쪽 눈은 퉁퉁 부어 실핏줄이 다 터지고 왼쪽 눈 위부터 귀 뒤, 어깨로 스치기만 해도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왼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태에 열이 펄펄 끓기도 했다. 인생 전반을 봤을 때는 참 설렁설렁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조금 들어와 보면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기도 한 게 나다. 눈물이 나면 머리가 깨질 지경인데 밤새 일을 하며 아파서 울었다. 독하다는 약을 입에 털어놓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눈을 뜨고 있어도 초점이 없어졌다.

그때 난,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 홈페이지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아 회사에서 점심 먹는 일을 제하고는 옆 사람과 작은 수다조차도 떨 시간이 없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일거리를 바리바리 싸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아이가 잠이 들 때를 기다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나고 보니 드는 생각인데 그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내가 디자인했다고 자부할 만큼 잘하고 싶은 생각은 가득한데 기한은 코앞이고 몸은 따라주지 않아 심장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프리랜서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취업해 제대로 된 디자인이란 걸 좀 해보자 하던 참이었다. 공공기관 디자인은 단가는 높았지만, 이력서에는 괜찮은 곳에서 일했다는 한 줄 빼곤 디자이너로 자랑할만한 게 못됐다. 작업한 결과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도 없는 구조기도 하고. (특히 농협이나 삼성 같은 곳이 그랬다) 에이전시 같은 경우는 일은 고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반영해 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뽑아내기에 좋은 곳이라 선택했던 것이, 인력이 부족하고 체계가 없다 보니 해도 해도 일이 줄지 않았다. 하나의 프로젝트 일이 줄면 다른 프로젝트가 바로 던져지는 구조였다. 그야말로 숨 쉴 틈도 없이 죽어라. 디자인 해야 하는 상황. 보통 웹디자이너는 디자이너만 하지 않는다. 코딩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작은 에이전시 같은 경우는 기획자가 있어도 기획도 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분신술을 하는 손오공도 아니고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빤히 정해져 있지 않나.

그런 일들로 스트레스와의 체력전에서 내가 진 모양이었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고열이 나던 첫날, 조퇴라는 걸 하고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얘길 하는 거다.

“이거 죽을 수도 있어요.”

약을 먹으면 졸리고 몽롱해지고 속이 뒤집히는 경험. ‘휘청휘청’ 일하다가 일어서면 어지러워 책상 한구석을 잡아야 했던 그때. 나는 책임감이라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시름시름 거리며 데드라인을 맞췄고 디자인 시안이 예쁘게 나왔다는 대학 측의 반응도 전해 들었다. 그곳에서 근무한 게 6개월쯤 되려나? 매번 그런 패턴으로 일을 하려니 이력서에 프로젝트는 다양하게 쌓여가는데 이러다가 정말 머지않아 죽겠다 싶었다.

그 무렵, (이 부분은 글을 쓰고 신랑에게 확인한 후 수정이 들어갈 수도 있겠다) 가족들 모두 어머님이 계시던 속초엘 내려갔다. 대상포진 처방전은 추가로 받아, 계속 복용하고 있었다. 먹고 나면 세상을 빙글빙글 돌게 만드는 독한 약을 털어 넣고 있으려니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유한이도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죽으면 어린것이 엄마 없이 어떻게 클까 두렵기도 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칼 같은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남들이 봤을 땐 잘도 취업하고 잘도 그만두는, 즐기면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게 빤하다. 실제로 일할 때도 특별히 심각하게 일을 하는 편은 아니다. 될 수 있으면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려는 편이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때는 꼭 열심히 집중하고 있을 때 찾아오는 법. 이 길을 계속 가야 할지 나를 선택해야 할지. 서른아홉의 난 그 길에 또 들어섰다. 죽을 수도 있다잖은가. 데드라인은 넘겼고 결과도 괜찮았다면 이제 나를 선택할 시간인가. 짧은 기간 다녔던 회사에 사표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출근하며 말해야지, 화요일은 꼭 말해야지.’ 그렇게 또 일주일을 또 다른 일에 매여 흘려보내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대상포진은 또 온다. 면역체계가 온전치 못하면 이번엔 실려 갈 수도 있다. 욕심을 버리자. 아직 죽기엔 이르지 않은가.

일주일을 꽉 채우고 나서야 나랑 동갑인 사장에게 가서 퇴사 의사를 밝혔다. 사장은 이유를 물었고 그간 있었던 일을 짧게 전하고 주말을 보내고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한 시간 맘 편하게 누워 노란빛의 수액을 맞았다. 한숨 잘까 싶어 누웠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나 이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9월 30일은 1차 코로나 백신을 맞는 날이다. 하지만 나는 예약해 둔 것을 취소했다. 잔여 백신을 찾아 맞는 일 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데도 나는 그렇게 했다. 내 몸 상태를 체크하는 일에 민감한 편인데 요즘의 나는 또 일이 많은 상태고 운동 부족으로 면역체계도 좋지 못한 듯싶어서다. 그래서 내린 결정.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유한이 임신 중에 독감 주사를 맞고 독감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해 타이레놀을 반쪽씩 나눠 먹으며 일주일을 끙끙 앓은 적이 있기도 하다. 여기저기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고 인증마크를 띄워 놓는 통에 올해가 가기 전에 나도 맞아야 할 텐데 혹여라도 죽으면 국가는 지병이 있다고 할 테고 억울한 죽음이 될 수도 있어 자꾸 미루다 결국 예약을 취소해버렸다. 올해는 중요하게 시작해야 할 일과 끝내야 할 일이 있으니 백신쯤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로 기약해 보려고.

내년 초엔 책이 나올 예정이라 또 바빠질까? 감기몸살처럼 앓고 마는 거라면 당장에라도 가서 맞고 오련만. 그간의 내 기록들로 혹시 모를 일이 생길까 몸을 사리고 있다. 다시는 크게 아프지 않고 싶다. 그리고 유한이랑 더 오래도록 재미나게 보내주고 싶다. 서른아홉의 여름을 호되게 보내고 나니 일상의 작은 시간이 참 소중하더라. 내 앞에 가만히 앉아 해리포터에 심취한 아이의 표정을 보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이 행복이 기~~ 일게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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