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캐리어 7개와 아이 둘, 그리고 텅 빈 집에서 시작된 우리의 첫날.
벤쿠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와 만 6세, 만 2세 아이들은 3월에 먼저 입국하고 남편은 한 달 뒤인 4월에 합류하기로 했다.
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세 명이서 외국에 먼저 들어간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점심 무렵 벤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하자마자 immigration office로 향했다. 나는 워크퍼밋을, 첫째는 스터디 퍼밋을 받아야 했다.
아이들은 낯선 공항이 불안한지 계속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대기하는 동안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나는 혹시 그 사이에 내 이름이 호명될까 봐 계속 신경이 쓰였고, 아이들에게 자꾸 서두르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3년짜리 퍼밋을 받았다.
그 순간에야 겨우 숨을 한 번 돌린 기분이었다.
공항 주차장에서 미리 예약해둔 밴을 만나 집으로 이동했다. 집에는 리얼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 안을 함께 돌며 하자나 체크할 것들을 확인하고 리얼터는 돌아갔다.
그리고 남겨진 건 나와 아이들, 그리고 대형 수하물 일곱 개.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집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갑자기 막막해졌다.
일단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유모차를 끌고 900미터 떨어진 마트로 향했다.
Save-On-Foods에서 유명하다는 치킨과 아이들 간식, 우유를 샀다.
집에 돌아와 바닥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식탁도 없고 접시도 없어서 그냥 봉지째 먹었다.
왠지 모르게 조금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들은 바닥에서 먹는 게 재미있다며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한국에서 챙겨온 압축 토퍼를 바닥에 대충 펼쳐 깔았다.
그렇게 우리의 벤쿠버 첫날 밤이 지나갔다.
비행기에서 거의 못 잔 탓에 우리는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깊게 잠들었다.
둘째 날 오후 1시에는 둘째 아이 데이케어 상담과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준비를 했다.
아직 교통카드도 없었다.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가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트래블로그 체크카드로도 캐나다 대중교통을 탈 수 있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 카드 단말기에 조심스럽게 찍었다.
“띡.”
그 짧은 소리가 그렇게 안심이 될 줄은 몰랐다.
벤쿠버에 오기 전 ‘버스 유모차 탑승’을 검색해 봤을 때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 올라타니 어디에 유모차를 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버스 기사가 의자를 접고 유모차를 세우라고 말했지만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조용히 의자를 접어주며 공간을 만들어줬다.
“Thank you.”
그날 이후 나는 캐나다 버스에서 몇 번이나 작은 감동을 경험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 있으면 유모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먼저 타라고 양보해주는 사람들.
버스를 낮게 내려주는 기사.
유모차를 보면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뒤로 이동하며 공간을 만들어 주는 모습.
정말로 파도가 밀려가듯 사람들이 움직였다.
한국에서는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를 타면 괜히 눈치가 보였다.
나 때문에 버스 출발이 늦어질까 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도 조금씩 느긋해졌다.
데이케어 상담을 마친 뒤에는 ICBC에 들러 한국 운전면허를 캐나다 면허로 교환할 예정이었다.
2시 50분 예약까지 해 두었다.
그런데 그때 깨달았다.
운전 경력 증명서를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결국 예약을 취소했다.
그래도 하루를 그냥 보내기 싫어서 Service Canada로 향했다.
SIN 번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보통 오전 8시에 줄을 서서 오픈런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오늘은 안 되겠지…’
그런데 기적처럼 3시 45분, SIN 번호 발급 완료.
오늘 하루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Service Canada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대치를 낮추고 가서 그런지 오히려 모두 친절하게 느껴졌다.
둘째 아이의 반짝이는 신발을 보고 귀엽다며 칭찬도 해주었다.
아이들과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 타자마자 아이들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벨 누를래!”
한국처럼 버튼이 아니라 줄로 되어 있는 stop bell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첫째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동생이랑 같이 누르고 싶어.”
그러면 둘째는 유모차에서 벌떡 일어나 벨을 잡으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둘째를 번쩍 들어 올려야 한다.
솔직히 조금 힘들다.
그래도 하루 종일 재미없는 행정기관만 따라다녔는데
이거라도 재미있어하니 맞춰줘야지 싶다.
그래서 또 둘째를 번쩍 들어 올린다.
그리고 두 아이는 동시에 줄을 잡아당긴다.
“띵.”
벤쿠버에서의 두 번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