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라서가 아니라요
회사에 다니면 홍길동이 되는 사람이 많다. 부불호부(父不呼父).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한 많은 사연을 가진 바로 그 홍길동 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한 홍길동의 심정이 오죽했을까만은. 현대 사회에서도 홍길동 같은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 언제냐고? 바로 상사가 뻘소리를 할 때다.
상사가 뻘소리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실무를 잊어서일 수도 있고, 실무를 몰라서일 수도 있고, 실무보다 더 중요한 미션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자기도 자기 상사에게 까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결론은 같다는 것을.
프로젝트 팀원 모두가 속으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부장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팀원들 눈초리가 모두 한 사람에게 쏠린다.
"어? 제가 방금 입 밖으로 말했나요?"
... 같은 상황은 K-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설정이라 하겠다. 결국 모든 건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게 되니까.
뻘소리를 뻘소리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 대체 뭘까? 각 잡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가 쉽게 떠오른다.
1. 일의 결과를 내가 책임질 수 없으니까.
2. 바로 윗 선임 눈치가 보여서.
3. 내가 모르는 어떤 얘기가 이미 윗선에서 오고 간 것 같아서.
4. 지난번에 해 봤는데 나만 깨져서.
5.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6. 문제가 있었다면 누군가 얘기를 했을 거니까.
7. 그래도 부장님이 나보단 경험이 많을 테니까.
8. 귀찮아서.
9. 아직 로또 당첨번호를 확인 못해서.
10. 곧 그만둘 거라.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겠지만, 결론은 비슷하리라고 생각된다. 결국 자신이 입을 열어 봤자 좋은 꼴을 볼리가 없다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내가 사는 캐나다는 다를까? 안타깝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왜냐고? 윗사람의 뻘소리를 뻘소리라고 지적할 수 있으려면 건전한 회사 문화가 단단히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는 대체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윗사람의 헛소리를 헛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문화. 의견을 들은 상사가 그 의견 중 맞는 부분은 수긍할 것이라는 믿음. 일과 나를 분리시킬 수 있는 마음가짐. 이런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북미 HRD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심리적 안전감 교육이다 (Psychological Safety Training). 이 교육 프로그램의 특이점 중 하나는 리더용 교육의 존재다. 심리적 안전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리더용 교육이 따로 존재한다.
티모시 클락의 4 단계 심리적 안전감 모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소속감이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팀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갖는 단계다. 거꾸로 말하면, 온갖 차별로 인해 소속감조차 없다면 그다음 단계로 나가기는 힘들다는 소리다.
둘째는 배울 수 있는 환경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고, 물어봐도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해야 한다. 배움이란 스스로 하는 것도 있지만 동료나 선배에서 배우는 게 가장 크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 배우는 데 한계를 느낄 때,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성장할 수 있는 문화가 존재해야 한다. 배우는 과정에서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실험을 할 수 있고, 작은 실패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바로 2단계다. 실수를 인정하더라도 비난받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셋째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단계다. 두려움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건전하게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다.
넷째는 잘못된 의견이나, 기존에 관행처럼 하던 일에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경우 의견을 재시 할 수 있는 문화다. 즉, "부장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를 말한다. 4단계인 만큼 실제로 가장 도달하기 힘든 단계다.
4단계를 달성하기 위해선 앞의 세 단계를 모두 성공해야 한다. 그만큼 어려운 단계라는 소리다. 물론 심리적 안전감이 너무 높아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막말을 하는 문화를 만들어선 안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실천이다.
각 단계별 안전감을 이루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와 방법이 있지만, '아 이런 게 있구나'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드는 교육으로 남는 이상 백날 심리적 안전감 교육을 해 봤자 나아지는 게 없다.
우선 먼저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일과 나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에 누가 반대 의견을 내거나 자신이 공들여 쓴 서류에 빨간 줄이 그어져 오는 걸 자신 개인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해서 안되고, 상대방도 그런 마음으로 일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나는 나고, 일은 일이다. 둘째, 리더와 리더십팀의 역할이 중요하다. 위에서부터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못하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말에 버럭 화부터 낸다면 어느 누가 마음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심리적 안전감이 회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심리적 안전감이 없고서는 결국 다음과 같은 드라마가 반복될 뿐이다.
회사 경영목표와 부서 목표를 바탕으로 유관 부서와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프로젝트 계획안 결제를 받으러 올라 간 김 차장.
"이게 아니지. 이건 이렇게 써야지. 내가 이런 거까지 일일이 말로 해야 돼?"
.....
왜 까이는지 정확히 모른 채. 우리가 왜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설명할 틈도 없이. "네, 알겠습니다" 하고 상무실을 나온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다시 산으로 가는데...
위에서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 주지 않고 방향이 계속 흔들리면 결국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윗사람 변덕에 맞춰 수정에 수정만 하다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지 못한 채 일이 끝나고 만다.
"마감 기한을 봤을 때, 이 이상 수정 하는 것은 프로젝트 완성도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가 목표와 다르게 제안한 점이 있다면 그 점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런 대화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면, 좀 더 재밌는 회사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