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부. 3G 삼국정립
2003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WCDMA가 상용화되기는 했으나 환경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거듭되는 통신 사업권 공모 ▲기업간 인수합병(M&A) ▲ 높아져만 가는 통신설비투자(CAPEX) 등 이동통신 사업의 복잡성이 높아질수록 각 사업자들의 이해관계도 엇갈리기 시작했다. CDMA2000의 순항과 미래 휴대인터넷(와이브로) 선정 준비에 따라 자연스럽게 3세대 통신(3G)을 대표한다는 WCDMA에 대한 투자는 후순위로 밀렸다. 사업자의 사정과는 달리 정책을 펼친 정보통신부는 지속적인 WCDMA 투자를 압박했으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 지킬리 만무했다. 사업자들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다.
결국 WCDMA 사업은 네탓공방만 계속된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통신사업자가 단말이 없다고 투덜대면, 제조사는 네트워크가 미비하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투자계획을 제대로 밝히라면서 두 진영을 중재하기는 커녕 둘 모두를 채찍질했다. 차선책으로 SK텔레콤과 KTF의 공동망 구축이 물망에 올랐으나 합의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다보니 국내 WCDMA는 통신사업자의 보수적 투자가 이어졌으며, 그에 따라 커버리지 확대도 어려웠다.
또한 WCDMA 휴대폰이라 하더라도 커버리지에 제약이 있으니 전국망을 구축한 CDMA2000가 차선책으로 연결돼야 했다. 하지만 단말기가 CDMA와 WCDMA를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내장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당시 기술상으로 두 통신기술을 받기 위해서는 각각 별도 칩이 내장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더 크고 무겁게 휴대폰을 제작해야 할뿐만 아니라 전력효율도 떨어졌다. 원칩의 경우 2006년에야 가능할 것으로 판단됐다. WCDMA 네트워크도 빈약한데 단말도 없어 고객의 불만이 끝간데 없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정통부의 압박에 따라 2004년 10월 13일 SK텔레콤과 KTF는 2006년까지 WCDMA에 3조원을 투자하기로 약속했다로.1) 바람을 이룬 정통부는 'WCDMA 사업자 투자계획'을 승인하면서 2005년말까지 SK텔레콤 20만명, KTF 5만명의 WCDMA 가입자를 모집하겠다는 분석을 받아 들였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이미 투자한 금액이 1조원이니 사실상 이후 2조원을 더 쏟겠다는 의도였다. 다만 듀얼밴드듀얼모드(DBDM) 단말 출시가 지연되면서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WCDMA의 초기 부진은 CDMA2000 1x EV-DO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성능이 동일한 상황에서 커버리지와 단말에서 밀리는 WCDMA가 선택받을 일은 없다. 즉, WCDMA는 이통사에게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EV-DO 기술이 진화발전하듯 WCDMA도 다음 진화 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차기 단계는 다운로드 속도를 크게 향상시킨 고속하향패킷전송(HSDPA) 버전이다. 기존 WCDMA가 하향 2Mbps라면 HSDPA는 10Mbps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통사 역시 차별화되지 않은 WCDMA 초기 기술을 끌고 가기보다는 한단계를 더 점프한 HSDPA로 빠르게 치고 나가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2005년초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상반기 중 HSDPA 장비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통사도 하반기부터 HSDPA 장비 설치에 나서겠다는 로드맵을 설계했다. 이미 투자를 약속한 비용도 HSDPA를 위해 조정됐다. 단말의 핵심인 칩셋의 경우 퀄컴이 3분기부터 HSDPA를 지원하는 MSM6280에 대한 샘플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퀄컴과 삼성전자, LG전자는 나란히 HSDPA 통화 시연에 성공하면서 HSDPA의 청신호가 켜졌다.
마침내 2006년 5월 16일. SK텔레콤이 HSDPA 지원 단말기 출시와 함께 세계 최초 HSDPA 상용화를 알렸다. 2) HSDPA는 같은 기간 상용화 절차를 밟은 와이브로와 함께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해 3.5G라 부르기도 했다. SK텔레콤은 HSDPA라는 기술 용어가 고객에게는 어렵게 다가갈 수 있다고 판단해 좀 더 쉬운 의미의 브랜드로 ‘3G+’를 출범시켰다.
HSDPA가 낼 수 있는 이론상 다운로드 속도는 14.4Mbps이지만 당시 단말 기술 상 한계가 있어 1.8Mbps 속도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단계적 진화를 거쳐 2008년이면 본래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SK텔레콤은 CDMA 2000 1x EV-DO를 바탕으로 더 빠른 속도의 HSPDA를 홍보하는 한편, 보완재 역할을 해줄 와이브로에 보다 집중해 나갔다.
SK텔레콤은 수도권뿐만 아니라 부산과 대구, 대전, 제주 등 25개 주요 도시에 3G+를 제공하고 연내 84개시를 커버할 수 있도록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목표 가입자수는 30만명. 지원단말은 약 6종까지 계획했다.
3G+ 첫 단말은 삼성전자의 SCH-W200, 후속 모델은 LG전자 SH-100이 준비돼 있었다. WCDMA 단말 지원금 정책으로 인해 70만원의 출고가는 40만원대의 실구매가로 낮아졌다.
경쟁사인 KTF는 6월 30일 전국 50개시를 커버할 수 있는 HSDPA 서비스 상용화를 알렸다.3) SK텔레콤과 마찬가지로 연말이면 84개시를 아우른다는 계획을 밝혔다. 단말은 LG전자 KH-1000(SH-100)이 출시되면서 2종을 동시에 선보였다.
비동기식 IMT-2000 서비스가 2GHz 주파수를 활용함에 따라 본격적인 로밍 활성화에도 보탬이 됐다. WCDMA는 그간 미운 오리로 불렸던 과거를 딛고 화려한 백조로 다시 태어나면서 날개를 활짝 펴 날기 시작했다.
단말 부족과 서비스 커버리지 미흡으로 인해 HSDPA 시장은 초기 어려움을 있긴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은 나아졌다. SK텔레콤과 KTF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투자비도 오름세를 기록했다. SK텔레콤은 당초 5천700억 수준의 투자 비용을 8천100억원으로, KTF는 3천500억원에서 7천억원까지 올려 책정했다. 전국망 시기 역시 누가 먼저 개시할지를 두고 아웅다웅할 정도였다.
다만, 이동통신 용어는 고객입장에서는 다소 난해했다. 이통사들은 좀 더 고객 친화적인 브랜드 통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2006년 8월 1일 SK텔레콤은 새로운 이동통신 브랜드인 ’T’를 론칭했다.4) HSDPA 서비스는 ’T 3G+’, 요금제는 ’T plan’ 등 ’T’를 앞세워 상품들을 정렬했다. 아울러 오프라인 매장도 고객친화적으로 바꾸고 ‘T월드’로 명명했다. 가입자 대상 ‘T 로그인’도 구축했다.
2007년 새해가 밝자 이통3사는 누구나 1등을 목표로 한다는 굳은 의지를 피력했다. 특히 KTF는 만년 2위 사업자에서 벗어나 WCDMA를 통해 1등 사업자로 거듭나겠다고 천명했다. LG텔레콤 역시 새로운 사업모델을 구축해 1위로 올라서겠다는 당찬 포부를 전했다. 점차 뜨거워지는 과열경쟁의 서막이 열린 셈이다.
그 가운데, KTF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대적인 마케팅 홍보에 돌입했다. “쇼(SHOW)를 하라”라는 단순한 광고였는데 과거 SK텔레콤이 TTL 광고를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의도를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웠다.5)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쇼’ 캠페인의 정체는 2007년 3월 1일 되서야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6) KTF가 3G HSDPA 전국망 서비스 선언과 동시에 통합 브랜드 ‘쇼(SHOW)’를 론칭했다. KT의 CDMA 첫 홍보 카피가 ‘소리가 보인다’ 였는데, KTF는 과거를 이으면서도 새롭게 차별화하겠다는 의미의 '쇼'를 내세운 셈이다.
특히, 3G HSDPA는 이동통신을 통한 영상시대 개막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KTF 브랜드명과도 맞아 떨어졌다. 쇼 요금제는 무려 19종으로 다양하게 재편했다. 최대 30만원의 보조금을 통해 가입자 유치에 불을 켰다. 그 기세가 대단했기에 실제로 1위 사업자로 도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심지어 조영주 KTF 사장이 직접 발품을 팔아 ‘쇼’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그 결과 불과 1주일만에 3G 신규 가입자 1만3천명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실제 업계에서는 KTF가 SK텔레콤을 누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 등 최초의 시장 역전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사실 KTF가 재빠르게 HSDPA 전국망 서비스를 개시할 수 있었던 숨은 공신은 모회사인 KT였다. KTF의 1.8GHz 주파수 CDMA 운용 경험도 주효했다.
앞서 800MHz 주파수를 활용해 이동통신 서비스를 꾸려온 SK텔레콤의 경우 2GHz 주파수 대역의 WCDMA는 또 다른 도전이었던데 비해 KTF는 앞서 CDMA 1.8GHz 주파수에 대한 설비와 노하우가 마련돼 있었다. HSDPA 전국망에 승부를 걸 수 있었던 것은 모회사 KT와 KTF의 기존의 인프라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SK텔레콤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3월 29일 예상보다 빠르게 인구대비 99% 수준의 전국망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7) 진정한 의미의 IMT-2000, WCDMA, HSDPA, 즉 3G 시대가 본격화된 때다.
이통시장은 요금인하와 보조금 경쟁, 저가 휴대폰의 등장으로 더 뜨겁게 타올랐다. 실제 KTF는 1위 사업자라는 염원을 잠깐동안 이루기도 했다. 1위로 올라서겠다고 발표한 KTF는 50여일만에 3G HSDPA 가입자 1위를 달성했다. 전체 이동통신 시장에서는 SK텔레콤이 부동의 1위긴 했으나 위기의식을 갖기 충분할만큼 위협적이었다.
SK텔레콤과 KTF는 다운로드 속도뿐만 아니라 업로드 속도를 개선한 고속상향패킷접속(HSUPA) 상용화도 서두르겠다고 발표했다. 최대 5.76Mbps 업로드 속도를 낼 수 있기에 모바일 UCC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였다.
3G가 활성화된 2007년말 가입자는 어느덧 600만명을 넘어섰다.
1) 백재현 기자, <내년말에는 WCDMA 가입자 수 25만명 될 듯>, 아이뉴스24, 2004.10.13.
2) 정경미 기자, <SK텔레콤 HSDPA 서비스 상용화>, 디지털데일리, 2006. 5.15.
3) 김응열 기자, <HSDPA-와이브로 `서비스 전쟁`>, 디지털타임스, 2006. 6.30.
4) 박영례 기자, <"무료통화 내맘대로 조절"...SKT, 새요금제 출시>, 아이뉴스24, 2006. 7.31.
5) 이학선 기자, <KTF "SKT 잡는다" 자신하는 4가지 이유>, 이데일리, 2007. 2.27.
6) 박영례 기자, <KTF, 세계최초 HSDPA 전국서비스 3월1일 개시>, 아이뉴스24, 2007. 2.28.
7) 박영례 기자, <SK텔레콤, HSDPA전국 서비스 개시>, 2007. 3.28.